59화. 춘계 토너먼트
“아드리아스 크롬웰 학우. 안에 계십니까.”
“예.”
입학식이 끝난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새벽 운동에서 막 돌아와 샤워를 마친 후였다.
대충 물기를 털어 내며 문을 열자 그곳에는 마법학부 전투 마법학 조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춘계 토너먼트에 대한 안내를 해 드리러 왔습니다. 학우께서는 매직 태블릿이 없다고 체크가 되어 있어서 부득이하게 찾아왔네요.”
기다리던 게 왔군.
나는 상대가 내미는 안내장을 받고 설명을 들었다.
“대충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 번 설명을 하겠습니다. 우선 학우분께서는 올해로 4학년 진급을 하셨기 때문에 토너먼트의 거부권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토너먼트의 결과나 시합 내용은 전투 마법학의 성적에 포함되는 점 유의해 주시고, 상대는 제비뽑기를 통해 추첨됩니다. 대전 상대는 기사학부와 마법학부의 가림이 없고 무작위 선정이며 지금 여기서 뽑으시면 됩니다.”
조교가 수정구를 하나 내밀었다.
예전에도 어렴풋하게 해 본 기억이 있어서 수정구에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했다.
8.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앞쪽의 번호가 나왔다.
매년 치러지는 이 토너먼트의 참가 인원수는 대략 3,000명.
기사학부 2,000명과 마법학부 1,000명가량이 치고받고 싸우는 또 하나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잘됐네. 대기 장소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빨리 끝내고 쉬는 게 낫지.’
내가 뽑은 번호를 확인한 조교가 들고 있던 태블릿에 내 이름과 번호를 적었다.
“아드리아스 학우 출전 번호 8번 확인되었습니다. 상대는 기사학부 2학년 아슬란 학우입니다. 혹시 기권 의사 있습니까?”
“아니요.”
“확인했습니다. 아드리아스 학우는 다음 주 월요일 오전 8시까지 기사학부 대경기장의 대기 장소 쪽으로 와 주시면 되겠습니다. 토너먼트 전체 일정은 2주이며 첫 주의 시합은 하루에 총 2번이 있습니다. 승리하시게 될 경우 월, 수, 금 각각 2번씩의 경기를 치른 뒤 본선에 올라 2주 차 월요일부터 32강을 치르게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결과를 바랍니다.”
조교가 떠나고 다시 방에 돌아온 나는 물기가 남은 머리를 마저 털었다.
아드리아스의 기억 속에서 치기 어린 2학년 때 참가했던 토너먼트가 떠올랐다.
‘예선 1차전 탈락.’
쓴웃음이 나왔다.
토너먼트는 올해 입학한 신입생들은 참가가 불가능했으며 2학년으로 진급한 학생들부터 참여가 가능했다.
그리고 3학년까지는 자율이었지만 4학년부터는 필수 참가였다.
‘물론 그냥 기권하는 수도 있지만.’
4학년부터는 기권을 하게 되면 낙제가 불가피할 정도로 불이익이 심했다.
그러니 싸움을 싫어하는 이들도 이를 악물고 1차전은 통과하려 애쓸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 전체 인원이 참가하는 만큼 분위기는 거의 연말 축제와 대등했다.
심지어 각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토너먼트를 구경 오거나 각종 단체의 스카우터들도 대거 관람을 하니 기회의 장이 될 수도 있는 이벤트였다.
그리고 이 이벤트를 통해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들도 수련의 동기를 만들게 된다.
강력한 선배들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수련의 원동력이었다.
‘그냥 적당히 해야지. 무난하게 졸업할 정도로만.’
나는 오랜만에 내 재능과 특성들을 열어 보았다.
―특성: 그릇(유니크), 진화(유니크), 깨달음(에픽), 원죄(??)
―재능: 흑마법 사령 계열(수재), 원소 마법 물 계열(둔재), 포션 제조 버프 계열(수재), 운동(영재), 전투(영재), 마나(수재)
처음과 비교했을 때 뭔가가 많이 늘어났다.
특성은 게임을 했을 때도 유니크를 두 개 이상 먹어 본 적이 없는데 벌써 두 개나 가지고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등급의 특성도 있었다.
‘물음표가 뭐냐, 물음표가.’
내가 볼 때 원죄는 조금 특별하니 논외로 치고 그릇과 진화 두 개만으로도 웬만한 플레이어블의 뺨따귀를 두어 번 후려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특성과 비슷할 정도로 중요한 재능도 그새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운동은 니켈한테 기초 검술을 배우다가 생겼고, 전투는 나태의 결계를 깨고 얻었었지. 마나 재능은 정말 예상하지 못하게 진화로 얻었고…….’
처음에는 나만 한 쓰레기 캐릭터가 없었는데 지금 보니 나보다 뛰어난 캐릭터는 몇 없을 것 같았다.
이게 그간 이루어진 내 노력의 산물이라고 느껴지자 감회가 남달랐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꿇리지 않네.”
다만 내 적들이 너무 강하다는 게 문제지.
물론 당장 급할 건 없으니 조금은 여유를 갖고 행동을 하는 대범함도 필요할 거다.
‘근데 굳이 적당히 할 필요가 있을까.’
갑자기 든 생각이었지만 굳이 실력을 숨길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적이라고 볼 수 있는 집회에도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빌어먹을 황제 녀석도 아버지가 숨겼던 원죄로 인해 나를 신경 쓰고 있을 게 뻔했다.
제파르 교단이야 위에 둘에 비하면 무섭지는 않았으나 이미 충분히 원한을 산 상태.
이런 상황에서 내 능력을 감추어도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유명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진짜 나쁘지 않은데?”
화려하게 데뷔하기에는 토너먼트 만한 것도 없으니 시기도 적절했다.
게임 속에서는 얼마 못 가 죽기만 했던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비상이 임박했다.
* * *
주말이 지나고 토너먼트 예선 당일이 되었다.
일어나서 준비를 마치자마자 도착한 대경기장의 대기실에는 바글바글한 학생들이 각자 몸을 풀거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상대는 기사학부 2학년의 아슬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워낙 학생들이 많으니 몇몇 중요 인물이나 사건을 일으키는 특이 인물들을 빼고는 알지 못했다.
그 뜻은 곧 내가 치러 낼 1차전의 상대가 별 볼 일 없는 녀석일 확률이 99%일 거라는 의미였다.
일단은 예선인 만큼 굳이 검을 뽑지는 않고 마법으로만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위험했겠지만 지금은 온갖 재능, 특히 마나와 전투 재능이 있는 만큼 자신이 있었다.
“1번부터 20번 참가자 밖으로 나오실게요!”
진행 맡은 기사학부의 조교가 대기실에 들어와 선수들을 불렀다.
그를 따라서 밖으로 나오자 아직은 텅 빈 관중석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조금 있네.’
텅 빈 줄 알았던 관중석 한 곳에 신입생들로 보이는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이제 막 입학을 한 만큼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수련에 힘쓰기보다 낭만적인 아카데미 라이프를 즐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저 중에 플레이어블은 없어 보였다.
‘아니네. 한 명 있네.’
루시아 에버라스트가 비비안과 함께 팝콘을 들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참가를 안 한 건가? 아직 3학년이고 그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듯했다.
‘비비안은 참가할 줄 알았는데…….’
그때 나를 본 루시아가 손을 흔들었다.
“여! 선배! 아드리아스! 여기, 여기!”
선배한테 버릇이 없군.
이제는 이름까지 막 부른다.
내가 그쪽에 시선을 주자 활짝 미소 지으며 팔을 휘저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비비안이 작게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그때 경기장 한가운데에 있던 기사학부 교수가 소리쳤다.
“자, 이제 번호순으로 경기장 위에 정렬해 주십시오.”
대경기장은 이름에 걸맞게 넓은 크기를 자랑했는데 구역들을 잘게 나눠 총 10개의 간이 경기장을 만든 상태였다.
그리고 각 경기장마다 두 명의 조교가 만일을 대비해 배치되어 있었다.
‘톨먼도 나와 있군.’
전투 마법학 교수, 톨먼 베뉴얼은 그저 묵묵히 경기장에 서 있었다.
저번에 처벌을 받아 정직이 된 걸로 아는데 조금 일찍 풀린 모양이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반갑네.
마침 내가 배정된 경기장도 톨먼이 서 있는 근처였다.
“룰은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다시 설명합니다. 살해는 무조건 퇴학 그리고 무력한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도 퇴학. 기권한 상대를 공격하는 건 실격패. 그 외의 장애가 남을 정도의 피치 못한 상해는 조교와 교수의 판단으로 죄의 경중을 가리겠습니다.”
나는 눈앞에선 기사학부 학생을 보았다.
이제 2학년이 된 녀석이라 그런지 노련함보다는 투기와 열정이 가득해 보였다.
‘하루에 2회전, 그것도 오늘 하루가 끝이 아니지.’
체력 관리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장외로 나가는 것도 실격패이며 기권할 의사가 없다고 해도 조교와 교수의 재량으로 경기를 중단하고 승패를 가를 수 있습니다. 그럼 공이 울리면 시작하겠습니다.”
긴장된 공기가 경기장 안을 훑고 지나갔다.
서로 죽이는 싸움도 아닌데 심각해지는 분위기가 조금은 웃겨서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웃어?”
맞은편에 있는 아슬란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미안. 조금 웃긴 생각을 해서. 그건 그래도 선배한테 반말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냐?”
“난 나보다 약한 놈은 선배로 보지 않아.”
“그래? 그럼 이제 존댓말 하게 해 줄게.”
적막 속에서 우리 둘의 대화 소리만 울려 퍼지자 조교가 손을 들었다.
“잡담 금지.”
“예. 죄송합니다.”
내가 무안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아슬란이 끝까지 깐죽거렸다.
“언제까지 처웃나 보자.”
아니 근데 저게 아까부터 말버릇이…….
땡!
공이 울렸다.
체력 안배를 위해 단숨에 끝내려 했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넌 교육 좀 해야지. 안 되겠다.’
전략적 도발을 한 거면 성공이라고 감히 말해 주고 싶군.
“흐아아압!”
상대는 예상대로 잔뜩 흥분한 채 경직된 움직임으로 달려왔다.
아무리 뛰어난 로들렌의 인재라고 해도 고작해야 아카데미 2학년생.
노련해지기에는 한참 남았다.
‘그리스.’
가장 기초적인 그리스를 사용하자 상대가 마법을 눈치채고 그리스를 피하기 위해 좌우로 뛰며 다가왔다.
나는 그런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미리 마법을 깔았다.
‘어스 실드.’
퍼억!
좌우로 뛰던 상대의 움직임을 노려 상대가 옆으로 뛸 때 어스 실드를 소환했다.
그러자 땅에서 솟구치는 어스 실드에 본인이 직접 몸을 박은 것과 같은 그림이 만들어졌다.
“크윽. 잔재주를……!”
한 대 얻어맞고 분노한 아슬란이 몸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자 이미 그곳에는 내가 서 있었다.
경기장이 10등분 된 만큼 거리가 짧았기에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바로 앞에 내가 도착한 상태였다.
“안녕?”
퍽!
상대의 턱을 후려갈긴 나는 연이은 주먹을 뻗어 냈다.
정신을 못 차리는 상대를 향해 정의의 주먹이 빗발쳤다.
* * *
톨먼 베뉴얼은 전체적인 시합의 양상을 지켜보다 갑자기 일어난 구타 현장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나 무자비한 구타가 일어남에도 심판을 맡은 조교가 왜 말리지 않는지 따지려던 그는 이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로브?’
처음에는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구타를 하고 있는 학생이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구타를 당하고 있는 학생은 우습게도 기사학부 학생.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뭔가, 뭔가가…….
경기장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