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데슈른 폴론 그리고 가르침
크라테스 산맥의 최고봉인 크라탄.
구름이 손에 닿을 정도로 높은 산봉우리에 위치한 어느 절벽 끝에는 마치 신선이 살 것만 같은 작은 정자와 허름한 오두막이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막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근육질의 백발노인이 돌연 고개를 돌려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온 모양이군.”
그는 이내 2인분의 밥상을 들고 집 밖으로 나와 정자로 향했다.
때마침 누군가가 온몸에 몬스터의 피를 묻힌 채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오느라 고생했네. 조금만 아래쪽으로 가면 개울이 있으니 좀 씻고 오게나.”
마치 아는 사람을 대하듯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에 아드리아스는 인사할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샛길로 내려갔다.
“녀석, 별 특이한 체질이 다 있군.”
노인은 미소 지으며 그가 씻고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 * *
간단하게 피를 씻어 내고 다시 올라가자 정자에 앉은 데슈른이 내게 손짓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침은 먹었는가?”
말이 끊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정자에 다가갔다.
게임으로 봤을 때도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하다.
백발의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장한 체격과 근육들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검성, 데슈른 폴론.
“그러면 같이 식사나 하지.”
“감사합니다. 데슈른님.”
그리고 성격은 예상했던 대로 털털하군.
나는 데슈른의 맞은편에 앉아 그가 차려 준 밥을 먹기 전에 품속에 넣어 둔 종이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데슈른은 종이를 건네받고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어서 먹으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솔직히 밥도 밥이었지만 종이를 확인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는데 그가 확인할 생각이 없어 보여 그냥 밥부터 먹기 시작했다.
‘그동안 건조 식량만 먹어 왔더니 이 정도만 해도 진수성찬이네.’
짐승을 사냥해서 요리해 먹을 수도 있었으나 굳이 다른 몬스터를 불러들일 위험은 감수하지 않았다.
그래서 산맥에 진입한 이후 매일 육포나 말린 과일 따위만 먹어 오다 데슈른이 해 준 밥을 먹자 이보다 맛있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데슈른의 눈치를 살며시 살피며 식사를 마치자 그가 상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를 도우려 일어나자 데슈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손님이면 가만히 앉아 쉬거라.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도 했을 텐데.”
“예. 감사합니다.”
밥을 해 주고 손님 대접도 좋지만 마음이 급했다.
데슈른이 어서 바하트가 준 종이나 확인했으면 좋겠는데.
내 마음을 읽은 듯 그는 상을 놓고 오자마자 종이를 확인했다.
“허허. 이 애송이 녀석이 많이 컸군. 감히 나한테 이런 편지를 보내다니.”
애송이? 바하트를 말하는 건가?
하긴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바하트도 어리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바하트의 나이가 60이어도 데슈른은 무려 100을 바라보는 나이일 테니.
이내 시선을 돌려 나를 본 데슈른은 내게 손짓하며 말했다.
“어차피 궁금하던 참이었다. 소화도 시킬 겸 검을 뽑아 보거라.”
그의 말을 따라 검을 뽑자 이내 손을 까딱거렸다.
“수준부터 보자꾸나. 반격하지 않을 테니 공격해 보거라.”
바하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건가. 다행이다.
상대는 현존하는 오러 마스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괴물이니만큼 사양 않고 검을 휘둘렀다.
“마나를 사용해도 좋다.”
갑작스러운 데슈른의 말에 휘둘러지던 검을 나도 모르게 멈췄다.
……방금 뭐라고?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 마저 공격해 보거라.”
나는 데슈른을 보며 애써 긴장을 이완시켰다.
살렘도 내가 듀얼코어인 걸 알아챈 마당에 데슈른이 눈치챘다고 이상할 건 없지.
아마 저쯤 되는 괴물들은 알 수 있는 방법이 다 있나 보다.
‘아니면 나처럼 마나 재능이 있거나.’
그것도 나와 같은 수재급 재능이 아닌 영재나 천재일 수도 있지.
그렇게 따지면 내 ‘그릇’ 특성을 눈치채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전력으로.’
검은색의 마나가 갈락슈르를 휘감았다.
그와 함께 육체 능력을 뻥튀기시킨 나는 전과 다른 속도로 데슈른에게 쇄도해 나아갔다.
“좋군!”
얕은 감탄사를 흘리며 데슈른이 검을 피해 냈다.
하지만 이미 짐작했던 나는 그가 움직일 곳을 미리 선점해 들어가며 피할 수 없는 일격을 가했다.
“호오?”
정신을 차려 보자 어느새 나의 검 끝에 손가락을 얹고 있는 데슈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어느새 막힌 거지?
단지 손가락 하나였음에도 밀어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자석처럼 달라붙은 그의 손가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단 뒤로 물러났다.
“눈이 좋구나.”
여유롭게 감상을 말하는 데슈른을 보자 다시 한 번 오러 마스터의 힘을 실감했다.
생각해 보면 중간 조별 평가 직전에 무안공을 만난 걸 제외하면 처음으로 본 오러 마스터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그저 인사만 나누었을 뿐 실력을 확인하진 않았으니 이번이 진짜 경험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숨을 한 번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데슈른에게 뛰어들었다.
‘왼쪽!’
예지에 가까운 전투 재능이 데슈른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하지만 이내 내 몸은 고장 난 것처럼 덜커덕거렸다.
‘왼쪽이 아니야?’
내 감각들이 혼선을 빚어냈다.
실제로 처음 데슈른의 호흡과 근육들의 움직임을 살폈을 때는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확실시되었으나, 직전에 불규칙하게 바뀐 상대의 호흡과 각도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흐하하! 눈이 좋다는 건 확실히 장점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겪어 본 모양이구나.”
의도적으로 불규칙적인 근육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다니.
몸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도저히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 대단한 건 상대가 단순히 힘과 속도로 나를 제압하지 않았다는 거다.’
오러 마스터인 만큼 그 육체적인 능력치에서 나와 압도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을 터.
하지만 데슈른은 그런 육체의 이점을 이용하지 않고 가볍게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이야. 상대는 기다려 주지 않아. 그렇게 망설인 순간 너의 목은 이미 날아가 있을 게다.”
데슈른의 충고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상대의 움직임에 현혹되면 안 된다.
그저 본능으로!
휘익.
이미 습관이 된 건가.
전투 재능에 의지하지 않고 공격해 보려 했지만 자동 반사적으로 데슈른의 호흡을 읽는 나 자신을 눈치챘다.
덕분에 다시 한 번 데슈른의 속임수에 당한 나는 허공에 칼질을 수놓았다.
“아마 네 의지대로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게다. 그걸 고치는 데는 좋은 방법이 하나 있지.”
“배움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나는 절실했다.
그동안은 니켈에게만 검술을 배웠기에 이러한 가르침이 너무나 고팠다.
“그럼. 당연하지. 원래부터 그러려고 실력이나 보자고 한 건데. 애초에 바하트 녀석의 부탁이 아니었어도 너에게는 흥미가 동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는데 그 기색이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것 같은…….
맞아! 살렘이 나태의 페이지를 봤을 때 저런 표정을 지었던 것 같은데?
“흐흐. 아이야. 넌 오히려 내게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거니 마음 단단히 먹고 내 놀이에 어울려 주어야겠다.”
뭔가…….
뭔가가 잘못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퍼억!
“컥.”
나는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을 느끼며 이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쓰는 건지 고통에 대한 내성이 상당하다고 자부하는 나조차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으로 손이 떨려 왔다.
“어서 일어나거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엎어져 있어.”
데슈른의 웃음기 섞인 말에 애써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스가 자신의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는 데슈른을 싫어하기에 도대체 왜 그러나 게임을 할 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더 열 받는다.’
데슈른이 말한 좋은 방법이란 ‘매가 약이다’라는,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처맞다 보면 자연스레 습관이 고쳐진다는 이론이었다.
그리고 고통이 없으면 습관도 고쳐지지 않는다며 특이한 방법으로 나를 쥐어팼는데, 분명 맞으면서 외상이나 내상은 거의 없었지만 고통만은 극대화되는 희한한 마나 사용법을 썼다.
“후우.”
이번에는 속지 않으려 최대한 생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데슈른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는 순간 넌 이미 죽어 있을 거라 말했을 텐데.”
펑!
“커흑.”
폐가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어마무시한 고통이 옆구리로 번져 가며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아이야. 너의 그 재능은 약자들을 상대할 때는 압도적인 위력을 보일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조금만 수준 높은 녀석들을 만나게 된다면 다섯 합 이내에 간파되어 이와 같이 못 볼 꼴을 보게 될 게야.”
조금만 수준 높다는 게 당신 기준으로 도대체 어느 정도야.
내가 볼 때 데슈른은 분명 오러 마스터를 상정하고 하는 이야기 같았다.
“물론 그러한 재능도 없어서 골골대는 녀석들에 비하면 넌 확실히 축복받았다. 그러니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지.”
“으아아!”
너무 처맞아서 악에 받친다.
나는 기합을 내지르며 훈수를 두고 있는 데슈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달려든 것처럼 페이크를 준 뒤 머릿속은 냉정하게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다.
‘왼쪽! 하지만 이번에도 속임수겠지.’
그렇다면 왼쪽을 제외한 전 방위를……!
마나가 가속하고 나태를 사용함으로써 사용법을 깨우친 살렘의 파동을 검에 실었다.
‘이거라면!’
퍼억!
“이놈아. 말을 하고 있지 않느냐.”
다시 한 번 허공에 뜨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데슈른의 말이 들리는 걸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고 기절했다.
* * *
데슈른은 아침부터 밤까지 처맞기만 하다가 기절을 한 아드리아스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고 녀석. 물건이군.’
체질을 보아하니 마법도 사용하는 모양인데 이만한 육체 재능과 전투 센스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인재를 만났다고 생각하며 그를 집으로 옮기려는 순간.
“……?”
데슈른은 갑자기 느껴지는 스산한 감각에 오른팔을 보았다.
그러자 옷소매가 얇게 베어져 바람에 나풀거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흐흐흐. 흐허허허허!”
마지막의 그 수였던가?
무턱대고 덤비는 것처럼 보여도 아드리아스가 냉정하게 검을 휘둘렀다는 걸 데슈른은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알고 있으면서도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자신이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본 실력을 사용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에게 검이 닿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재능이 증명된 셈이다.
“아카데미 학생이라고 했던가. 아쉽군.”
만약 그에게 충분한 시간만 있었다면 몇 년 동안 우려먹을 정도로 흥미가 동한 녀석이었다.
물론 자신에게는 할 일이 있었기에 그건 그저 바람만으로 끝났다.
쓰러진 아드리아스를 업고 집으로 향하던 데슈른은 손에 닿을 듯 가까운 하늘의 별들을 보며 몇 달 전에 볼일을 보다 마주쳤던 소년이 떠올렸다.
‘루이스였나? 그 녀석도 마침 올해 아카데미에 입학하겠군. 이 녀석과 만나게 되면 볼만하겠어.’
시대가 바뀌어 가는구나.
데슈른은 새로운 시대의 거름이 되어 싹을 틔운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주먹이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