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감시 그리고 뜻밖의 변화
요정의 꽃은 당장 가져갈 방법이 없어서 일단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금방 시들지는 않을 테니 언젠가 날을 잡고 채집해야지.
원죄를 수습하고 밖으로 다시 나오자 에이미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나오자마자 말했다.
“손님 오셨어. 오빠. 일단은 기다려 주시라고 말했거든?”
“누가?”
“라마 웰튼 자작.”
내가 저택에 방문하자마자 온 손님이라.
조금 의심이 갔다.
‘황제의 감시자인가?’
아마 황제는 지금쯤 애틋하게 원죄의 행방을 찾고 있을 터.
그런 그가 집 주변을 항상 감시한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일단은 에이미에게 알았다고 말하며 응접실로 향했다.
“아이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크롬웰 각하.”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라마 웰튼 자작의 외모는 여전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도 어쩌다 한 번씩 방문했었는데 세월의 흐름을 빗겨 간 듯한 젊은 외모였다.
“오랜만이군요. 웰튼 공.”
“하하. 각하께서 방문하셨다는 말에 오랜만에 안부도 물을 겸 찾아왔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실례가 많군요.”
“아닙니다. 편히 계시죠.”
나는 대답을 하며 상석에 앉아 그의 기색을 살폈다.
과연 그가 황제의 심복으로서 이곳에 온 걸까, 아니면 정말 그의 말대로 안부를 전하기 위해 온 걸까.
“예전에는 참 좋았었는데 세월이 무상하군요.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십니까? 최근 들어 보니 뛰어난 활약을 하셨다 들었습니다만.”
“별거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았지요.”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 몇 마디가 오간 뒤 드디어 라마가 조금은 의심스러운 질문을 해왔다.
“각하께서 다시 이곳에 돌아와 기쁘군요. 제가 일부러 명을 내려 저택의 가구나 물건들을 치우지 못하게 했었는데 혹시 잃어버린 건 없으셨습니까?”
“없었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전 그저 혹시라도 선대 각하의 유품이라도 잘못 건드릴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요. 들어보니 선대께서 유언장도 남기지 않으셨다지요?”
“그렇습니다.”
“허……. 거 참 특이한 일이군요. 혹시 뭐 집에 돌아온 후로 발견한 건 없습니까?”
아주 노골적으로 물어보는군.
그의 눈동자와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행동을 보고 나는 반쯤 그가 황제의 감시자임을 직감했다.
“저도 답답합니다. 뭐라도 남겨 주셨어야지. 이건 뭐 아무것도 없으니 죽겠더군요. 하다못해 돈이라도 남기고 가시지.”
“아이고. 저런. 흠흠. 그렇군요.”
내가 아버지 흉을 보듯 말하자 라마 웰튼은 차마 동조는 못 하고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눈 그는 이내 볼일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하의 가족분들께서 불편한 일 없도록 제가 최대한 신경 쓰겠습니다.”
“말만으로도 감사하군요.”
“예. 그러면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각하.”
“살펴 가십시오.”
그가 돌아가자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에이미를 불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얘기 잘했어?”
“어. 에이미. 그것보다 할 말이 있어.”
내 말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던 그녀는 이내 알겠다는 듯 말했다.
“서재 얘기지?”
“어. 앞으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왜?”
나는 여기까지 말하고 그녀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좋은지 고민했다.
그래도 가족이니만큼 그녀도 조금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버지의 유품이 있었어.”
“유품? 그게 뭔데?”
“에이미.”
“갑자기 왜 분위기를 잡아. 유품이 뭐였냐니까?
“아버지는 살해당했어. 어머니도. 그리고 우리 가문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나.
에이미는 내 말을 듣고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설명을 원하는 에이미를 자리에 앉혀 놓고 간단하게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고 이내 방에서 생각을 해 본다며 응접실에서 나갔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하지만 그녀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는 진실을 알려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황제라…….’
황제뿐만이 아니라 바하트 알븐도 있었다.
어쩌면 마법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른 공작들도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고.
복잡한 생각과 함께 이제는 식어버린 차를 들어 조용히 마셨다.
* * *
“뭔가 알아냈나.”
“제가 볼 때는 아무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성격이 변한 느낌도 있지만 대화를 나누어 보니 여전하더군요.”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통신 아티팩트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라마 웰튼은 그저 머리를 긁적이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런 낌새가 없었는데 뭐 어쩌라는 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애초에 케인 크롬웰이 뭔가를 남겼다면 저희가 진즉 발견했을 거고요.”
“알았다. 일부러 저택 구입을 막지 않은 건데 자식들에게조차 단서를 남긴 건 없나 보군.”
“저택에 단서가 없더라도 결국 찾다 보면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무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그 발이 달리지 않은 나무를 케인이 숨겼다는 자체가 문제인 거다. 뭐 어쨌든 다른 죄악이 곁에 없으면 조금 특이한 나무일 뿐이니 급할 건 없다. 괜히 들쑤시지 말고 감시만 이어 가도록. 이만 끊어라.”
라마는 그대로 통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지금은 웰튼 영지의 영주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진짜 신분은 정보국의 부국장이었다.
그는 이제 그만 이 지긋지긋한 영지와 이별하고 싶었다.
“케인이 죽은 지 벌써 2년인가. 거참 잘도 숨겨 놨네.”
원죄의 정보를 알고 있는 자들은 거의 한 번씩은 수색을 해 보았음에도 아무것도 나오지를 않았다.
정보국 내에서는 그 대단한 바하트 알븐마저 찾는 데 실패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지. 그에 대해서는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정보국 내에서 나오고 있지만.’
자신이었으면 어떻게든 유서를 남겼을 거다.
솔직히 말해 뒤통수를 맞은 건데 억울해서 못 살지.
하다못해 폭로의 형식으로라도 세상에 알렸을 거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라마 웰튼은 정말로 답답했다.
* * *
다행히 에이미는 금방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정말로 마음이 강한 소녀일 수 없었다.
어쨌든 내 말을 잘 알아들은 그녀는 서재에 방문하더라도 마법진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사건이 대충 일단락되자 그녀와 함께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오랜만에 휴식을 취했다.
비록 머릿속은 아버지가 남긴 쪽지로 인해 복잡했지만 일부러라도 내색하지 않으며 얼굴을 마을에 비추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나를 몹시 어려워했다.
‘이제는 나도 백작이니.’
솔직히 나는 내가 백작인 게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한국에서 살아왔던 김진환의 경험도 그렇지만 아드리아스로서의 기억으로도 아카데미 재학 중에 얼떨결에 물려받은 작위라 실감할 틈이 없었다.
게다가 백작이 되자마자 카론의 밑에서 매일 까이면서 흑마법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백작으로서의 정체성은 옅어져만 갈 수밖에 없었다.
“벌써 가게?”
마을을 한차례 둘러보고 짐을 다시 챙겼다.
에이미는 내가 금방 떠나는 것이 싫은 눈치였지만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건 여러 의미로 위험했다.
‘에이미가 나로 인해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분노가 차오른다.
그렇기에 온 지 하루 만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어.”
“몸조심하고.”
“그래. 너도 일 힘들면 그만두고 쉬어.”
“알았어.”
그녀는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문을 나섰다.
뒤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작별인사를 들으며 역으로 향했다.
* * *
되돌아온 아카데미는 여전했다.
물론 겨우 이틀 동안 나와 있던 거라 여전한 게 당연했다.
‘나는 조금 변했지만.’
살렘에게 배운 마법과 원죄를 얻었다.
이 두 가지만으로 훨씬 강해진 기분이었다.
‘이제 며칠 뒤면 테러가 일어난다.’
이왕 알게 되었으니 최대한 막아 봐야지.
요 며칠 강해진 만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몰랐으면 몰라도 카를로스 알븐이 껴 있는 걸 안 이상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바하트 알븐이 우리 가문의 흑막과 연결된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책임을 굳이 카를로스와 디에네에게까지 전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둘이 알았을 리도 없고.’
더불어 겸사겸사 알븐 가에 빚을 지워 둘 수도 있는 거고.
애초에 바하트 알븐의 태도도 이상했다.
그는 또라이처럼 굴기는 했지만 항상 내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만 움직여 줬다.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하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억측은 금물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기숙사에 돌아와 검술 수련을 위한 준비를 했다.
“며칠 안 했다고 몸이 굳었네.”
그래도 실전을 몇 번 겪어서 그런지 실력 자체는 월등히 올라갔다.
곧 있으면 단전의 마나가 심장의 마나를 따라잡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몸을 이리저리 풀며 아공간에서 니켈을 불렀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니켈은 곧바로 검을 허공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징글징글하다, 너도.”
그때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코덱스 아포칼립스: 0장 순수한 원죄’가 ‘근면한 나태’를 감지합니다.]
[‘코덱스 아포칼립스: 0장 순수한 원죄’가 성장을 시작합니다.]
“이게 뭔……?”
개소리지?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당황했다.
근면한 나태라니? 감지했다고? 여기에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고개를 돌려 니켈을 바라봤다.
휘익―!
내 시선을 눈치챈 니켈이 검을 휘두르다가 무슨 볼일 있냐며 댄의 가면을 쓴 채 날 보았다.
“말도 안 돼. 너 잠깐 다시 들어가 봐.”
나는 곧바로 니켈을 역소환했다.
그러자.
[‘코덱스 아포칼립스: 0장 순수한 원죄’의 성장이 멈춥니다.]
“하! 하하.”
이거 개꿀잼 몰카 맞지? 그렇지?
하지만 내 이성은 사실이라고 강하게 머리를 때리고 있었다.
니켈을 다시 소환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성장이 시작된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니켈, 너 뭐냐?”
내가 그러든 말든 그는 잔말 말고 수련을 하라는 듯 검을 들었다.
설마 나태의 페이지를 흡수한 건가? 아니면 뭐지?
분명 나태의 페이지는 제스터에게 넘길 때 멀쩡했다.
여전히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었고 고동과 같은 마나의 파동도 느껴졌었다.
“복사 버그냐.”
어떻게 된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원죄가 니켈도 나태의 페이지라고 판단한 게 틀림없었다.
만약 내게 진화 특성이 없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진화를 못 했다면 니켈은 여전히 스켈레톤 솔저였을 테니까.
[‘코덱스 아포칼립스: 0장 순수한 원죄’가 성장을 마쳤습니다.]
[‘코덱스 아포칼립스: 0장 순수한 원죄’가 ‘근면한 나태’와 연동합니다.]
[추가 기능 생성]
[추가 성능 생성]
[기본 성능 강화]
그리고 변화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검을 휘두르던 니켈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내 곁에 다가와 허공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
설마 버프를 받는 건가?
그 설명은 다행히 니켈의 상태창에 나와 있었다.
[슬로스 팬텀sloth phantom(전설)]
―니켈 라이프힐
―언데드
―5티어
―마나: 2113
―특성: 자아/극의: 검劍, 유체화, 나태
―현재 ‘순수한 원죄’의 효과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원죄의 모든 효과를 같이 받고 있는 건가.
미친 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원죄의 성능도 올라갔거든.
[코덱스 아포칼립스: 0장 순수한 원죄]
[마나 회복량 188% 상승―나태]
[마나 감응력 66% 상승―나태]
[6일에 1번 특수기술 사용 가능(현재 저장된 기술: 나태)]
[마나의 질이 시간이 흐를수록 올라갑니다.]
[마나의 성질이 시간이 흐를수록 어두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