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아드리아스의 해명
북부 산맥 경계에 인접한 영지, 보르기옌.
비록 전선은 아니었으나 최전선 요새인 통곡의 협곡과 이어지는 영지로서 물자조달과 병사들의 휴가 지역으로 항상 사람이 북적이는 도시였다.
그런 보르기옌의 영주인 히크샴 보르기옌 백작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측근들을 전부 물린 채 오직 영주인 히크샴과 괴이한 복장의 인물 하나뿐인 공간.
히크샴이 상대가 내민 헝겊 자루를 받았다.
“이게 그……?”
“3일에 한 번, 녀석의 피를 묻혀서 함께 주어진 못으로 찍으십시오. 4번을 반복하면 저주가 이루어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제스터 님.”
제스터라 불린 인물은 삼각 고깔모자에 자신의 머리를 전부 뒤집어쓴 괴이한 복장의 남자였는데 그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결코 선인은 아니었다.
그렇게 서로가 만족한 거래를 마치고 회담이 끝나려 할 때.
“똑똑!”
누군가 입으로 똑똑 소리를 내며 문을 두드렸다.
히크샴은 눈가를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제스터 님. 분명 아무도 다가오지 말라고 했거늘.”
“그럴 수 있지요.”
“그럼! 당연히 그럴 수 있지.”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둘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하자 어느새 전혀 의외의 인물이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살렘 예디디아……!”
“그래, 그래. 반갑다.”
제스터가 경악성을 뱉었고 히크샴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하며 그 둘을 보았다.
“제스터 님, 저자는?”
“당신이 이곳 영주인가? 미안해. 잠깐 이 친구랑 할 얘기가 있어서 부득이하게 찾아왔어.”
살렘은 태연하게 다가와서는 책상에 놓인 술병을 들어 마셨다.
그리고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터앉아 제스터를 보았다.
“야, 제스터.”
“……정말 경우가 없군. 살렘. 아주 안하무인이야.”
“이제 알았어? 그것보다 나한테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제스터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살렘의 왼팔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살렘의 왼팔에 새겨진 듯했는데 온갖 해괴하고 기묘한 마법진들이었다.
왼팔에서 빛을 뿜으며 살렘이 웃었다.
“네가 아주 날 좆으로 보는구나?”
“이번 습격 때문인가?”
“잘 아네?”
히크샴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하다 방에 들어온 남자가 평범해 보이지 않아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우리는 바하트 알븐의 딸인 디에네 알븐을 노렸다. 그게 뭔가 걸렸나?”
“이 새끼 봐라. 너 진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왔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빛을 뿜던 왼팔에 이제는 불꽃이 피어나며 살렘의 옷이 타들어 갔다.
불꽃의 휩싸인 손은 인간의 손이라 부르기 힘든, 마치 악마의 그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얼 해 주면 되지?”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살렘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왼손에 붙은 불을 마치 성냥개비 꺼트리듯 털어 냈다.
그러자 악마의 손 같았던 왼팔은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탄탄한 근육이 돋보이는 그의 드러난 팔은 문신으로 그려 넣은 마법진이 빼곡했다.
“내 경고를 무시하고 감히 용병에게 아드리아스의 암살 의뢰를 넣은 것. 이건 뭐 나를 무시하다 못해 밥으로 본 거지. 음?”
“근면하는 나태를 일주일 더 빌려주지.”
“그게 끝? 적어도 당장 빌려줘야지 화가 좀 풀릴 것 같은데?”
“지금은 루나가 가지고 있다. 녀석에게 받아 내려면 받아 내 봐라.”
“좋아. 아주 좋아.”
살렘은 만족한 미소를 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느새 문밖으로 나가려던 히크샴을 보았다.
“아, 영주? 오늘은 미안해. 내가 좀 마음이 급해서 무작정 쳐들어와 버렸네? 저 녀석이랑 마저 하던 이야기 해.”
그는 그대로 히크샴을 지나쳐 나가며 술병을 흔들었다.
“이거 맛 좋네. 좀 빌릴게?”
살렘이 떠나며 문이 닫히자 히크샴은 그저 질린 표정으로 그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로서는 갑작스러운 날벼락 그 자체였다.
“멍청한 것들.”
제스터가 나직이 욕지거리를 뱉어 내며 히크샴을 돌아봤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겠군요. 물건은 보장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예. 들어가십시오.”
“아, 그리고 방금 일은 못 들은 걸로 하십시오. 오래 살고 싶다면.”
“아, 알겠습니다.”
제스터마저 그렇게 집무실에서 나가자 홀로 남은 히크샴이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 * *
검은 로브인들의 습격이 지나가고 며칠이 흘렀다.
이번 습격으로 인해 죽은 이들은 총 13명으로 학생 9명에 조교 4명.
생각보다 적은 숫자였지만 마법학부 3학년의 총 인원수가 고작 300명 남짓인 걸 생각하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하필이면 나랑 디에네가 가장 먼저 발견된 축에 속해서 피해가 커지지 않았지. 아니었으면 학생들을 더 죽이고 다녔을 거야.’
그래도 이 일로 인해 톨먼 베뉴엘은 다음 학기까지 정직 처분을 받고 알븐 가문은 물론 아카데미의 두 학부장과 교장까지 진상조사에 나섰다.
‘톨먼도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희생자가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상대의 인원은 생각보다 많았었다.
디에네에게 몰린 인원들을 제외하고도 수십 명은 더 되었던 로브인들은 산의 이곳저곳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그중 주도자로 꼽힌 ‘검은 혀의 키드웰’은 아이비에게 즉살됐다.
뒤늦게 가면과 검을 숨기고 온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면의 검사가 나를 구해 주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다.
디에네와 나를 구한 걸로 된 가면의 검사는 그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많은 인원들이 수색에 나섰지만 결국 못 찾았다.
‘그건 뭐 당연하지. 그게 나니까.’
아무도 내가 가면의 검사라고 의심할 수 없었다.
정황이 보이더라도 상상을 할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이쪽 사람들에게 있어서 듀얼 코어라는 것은 아직 정식적으로 알려진 게 없는 현상이기에 마법사가 검을 휘두른다는 걸 상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근데 그와 별개로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야. 수업 끝났냐?”
강의실에서 나오는 나를 아이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걸 어떻게 떼어 내나 고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끝났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좀 따라와 봐.”
껄렁껄렁한 평상시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나름 진지해 보였다.
그녀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앞서 걸어 나갔는데 나로서는 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추궁당하겠네.’
습격이 있었던 날 뒤늦게 나타난 나를 보며 아이비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었다.
꽤 유명한 흑마법사인 검은 혀의 키드웰이 잡혔기에 이번 습격의 주체는 흑마법 집단의 소행으로 여겨졌는데 하필이면 나는 볼로릭 사건에 연이어 얽혀 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사건 직후라 정신이 없었고 그 후로도 수습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에 별말이 없었지만 드디어 날을 잡았나 보다.
그녀는 열차까지 탑승을 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데려갈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차분히 뒤를 따랐다.
아이비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기사학부에 있는 연무장이었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나와 아이비가 나타나는 걸 보고 어디론가 후다닥 사라졌다.
“안 물어보네? 왜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알아서 설명해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갑자기 아이비가 말을 길게 늘였다.
그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그녀의 근육과 호흡, 자세가 공격을 가해 올 거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 하단에서 올려 쳐지는 횡베기.’
순식간에 계산이 된 나는 오른발을 뒤로 빼며 몸을 틀었다.
그리고 마치 짜고 친 듯한 아이비의 검이 내 면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넌 평범한 새끼가 아니야.”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인 나를 보며 아이비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검은 검집 채로 휘둘러진 상태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 지금 그걸 물어볼 때야?”
아이비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너, 뭐 하는 새끼냐?”
* * *
평상시와 같이 모든 강의가 끝난 비비안 벨로칸은 연무장에 도착해 몸을 풀었다.
날이 추워졌음에도 그녀의 일상은 항상 같은 루틴으로 돌아갔다.
‘……가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속내는 지금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일어난 전투 마법학 평가 습격 사건.
그 일로 인해 기사학부까지 소란이 있었다.
볼로릭 때와는 다른, 명백히 학생들을 노리고 가해진 공격.
덕분에 기사학부 졸업반들까지 차출되어 인력에 보태질 정도였다.
‘아드리아스.’
흑마법사 집단의 추종자들과 용병들의 습격은 그녀가 최근 들어 계속 떠올리고 있는 아드리아스를 하필 공격했다.
다행히 그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싫어하려나.’
그러나 그와 자신은 볼로릭을 제외하면 접점이 없었기에 망설여졌다.
맨 처음 생각 없이 찾아갔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최근에 치료소에서 마주친 후로는 그만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왜 이럴까.’
비비안은 그런 자신이 미웠다.
이런 생각을 할 틈이 있다면 차라리 검을 한 번 더 휘둘러야 하는데.
그때 누군가가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참 아드리아스에 대한 생각을 하던 비비안은 연무장에 들어오는 이가 아이비와 아드리아스라는 것을 눈치채고 자신도 모르게 연무장 기둥 뒤로 숨었다.
‘아드리아스? 왜?’
호기심이 인 그녀는 연무장에 들어온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연무장에 들어온 둘은 티격태격대더니 아이비의 검을 뽑으라는 말과 아드리아스의 거절로 이어졌다.
“난 너를 확인해야겠다. 그 검이 장식이 아니라면 어서 뽑아라.”
“갑자기 찾아와서는 무슨 횡포인지 모르겠군요. 전 호신을 위해 검을 구입한 거지 이러려고 산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호신을 위해 검을 뽑게 해 주지.”
스르릉.
아이비의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기둥 뒤에 숨은 비비안은 나서서 막아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혹시 저를 흑마법사의 앞잡이로 보시는 겁니까?”
“우연도 겹치면 필연이라 했지. 하필 네가 낀 사건에 평상시에는 숨어서 찾기도 힘든 흑마법사들이 두 번이나 발견된다고?”
“지금 증거도 없이 저를 몰아가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설명해 봐. 난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볼로릭 때의 일이야. 겨우 너랑 크리스 둘이서 그런 대단위 흑마법을 사용하던 흑마법사를 잡았다고? 누굴 병신으로 아냐?”
“이미 수사관들도 짚고 넘어간 부분입니다. 더 이상 해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군요.”
“아니, 해명하지 않은 게 하나 있어. 비비안 벨로칸. 걔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갑자기 본인의 이름이 나오자 비비안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서 갑자기 비비안이 왜 나옵니까.”
“내가 처음으로 너를 발견했을 때 넌 분명 걔랑 손을 잡고 있었어. 그 뒤로는 떨쳐 내려고 손을 털고 있었고.”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볼로릭에서 돌아온 후에 그녀는 바뀌었어. 네가 뭔 짓을 한 거 아니야?”
비비안은 두근대는 심장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제발, 심장아. 조금만 조용히 있어 줘.
“전…… 그녀를 구했을 뿐입니다.”
“뭐라고?”
“그녀가 흑마법사의 결계에 갇혔기에 제가 직접 들어가서 구해 줬을 뿐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비비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