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집으로 가는 길 그리고 살렘 예디디아
“들어가서 직접 구했다고?”
“예.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결론은 그렇습니다.”
그 뒤로 아이비에게 해 주는 아드리아스의 이야기들은 비비안 자신이 기억하던 내용과 똑같았다.
‘아드리아스가 요정님이 맞았어.’
비비안은 자신의 입과 멱살을 잡은 채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드리아스에게 뭐라고 해야……?
“이제 해명이 됐습니까?”
“…….”
“할 말이 더 이상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아드리아스는 그 말을 끝으로 연무장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자 아이비가 제자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입을 열었다.
“거기. 아까부터 숨어 있는 거 알고 있었어. 누구지?”
아이비의 말에 비비안은 조심스레 기둥 밖으로 나왔다.
설마 비비안이 있을 줄은 몰랐던 아이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차분히 말했다.
“너도 관계자니까 별로 상관없겠네. 혹시 다 들었냐?”
끄덕.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비가 물었다.
“방금 아드리아스가 한 말, 진짜야?”
끄덕.
“그래. 알았어. 내가 요즘 예민해져서 괜한 사람을 잡았나 봐. 너도 웬만하면 여기 있었던 일은 잊어라.”
아이비는 바닥에 침을 한 번 뱉어 발로 비비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떠나가자 아무도 없는 연무장에는 비비안만 홀로 남은 채 멍하니 바닥을 보고 있었다.
‘아드리아스가…… 요정님.’
그로 인해 삶이 구원받았다.
실제로 과거가 바뀐 건 아니지만 원래였으면 그녀를 괴롭혔을 지긋지긋한 감정들이 많이 사라졌다.
나는 특별하다.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얇은 막 하나가 벗겨진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은혜를 갚아야만 했다.
* * *
꽤나 큰 홍역을 치렀음에도 여타 과목의 평가는 계속해서 진행이 되었다.
그래도 나름 노력한다고 노력한 덕분에 전 과목에서 중간은 가는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나는 성적을 확인하며 안도의 숨을 뱉어 냈다.
물론 에버라스트 포션 덕분에 다달이 막대한 금액의 돈이 들어올 거다.
하지만 그간 가난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장학금이 들어온다고 생각되자 기분이 좋아졌다.
‘에이미가 사과나무 저택으로 이사 갔다고 했지.’
사실 며칠 전에 에이미에게서 편지가 하나 왔었다.
별 내용은 없었고 이사를 무사히 마쳤다는 이야기, 루핀을 오랜만에 만났고 그 가족들이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으로는 되도록 빨리 집에 한번 와 보라고 한 건데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평가도 다 끝났고 내일이면 주말이니 한 번 다녀와 볼까.’
가끔씩은 쉬기로 했으니 이 틈에 집을 한 번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게다가 아직 연말 행사가 진행되려면 2주 정도가 남았고.
그렇게 나는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과나무 저택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 * *
내가 예전에 살았던 사과나무 저택이 있는 웰튼 영지는 라마 웰튼 자작이 다스리는 수도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땅이었다.
특별히 인상에 남는 귀족은 아니어서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그저 그가 다스렸던 땅이 생각보다 살기 좋았다는 사실만 떠오른다.
‘영지 내에서 매일 뛰어다녔던 거 같은데.’
그렇게 활발했던 아드리아스가 어쩌다 이런 음침한 녀석으로 자랐는지는 의문이다.
아마 머리가 굵어지고 가세가 기운다는 걸 실감한 후로 변한 것 같다.
로들렌 아카데미가 수도의 동쪽에 붙어 있는 탓에 수도 남서쪽에 있는 웰튼 영지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약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책을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쿵!
‘뭐지?’
갑자기 내 머리 위에서 들려온 소리에 열차 천장을 바라봤다.
무언가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다시 소음이 들려왔다.
텅. 텅. 텅. 텅.
마치 누군가가 열차 위를 걸어 다니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열차의 문 쪽까지 이어지더니 이내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뭐야 저건?’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평범해 보이는 사내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인상의 사내는 달리고 있는 열차 지붕에서 내려온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당당했다.
그는 옷을 털며 들어오더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승무원에게 금화를 건넸다.
“여기 열차 값.”
그리고는 태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들었다.
“이여! 오랜만이야.”
나?
나 말하는 거야?
주변 승객들의 시선이 전부 나를 향했다.
내가 황당함과 당황을 동시에 느끼고 있을 때 그가 미소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레 차갑게 침전되는 감정을 느끼며 생각에 빠졌다.
‘누구지? 흑마법사? 암살자? 용병?’
온갖 생각이 뇌 속을 흔들고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 때.
“뭐야. 나 잊은 거냐? 이거 조금 실망인데.”
그의 태도와 말투에서 누군가가 떠올랐다.
설마?
“살…….”
……렘?
차마 엄청난 금액의 현상 수배가 걸린 그 이름을 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뜻이 전해졌는지 살렘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내 옆에 앉았다.
“알아채는 게 조금 늦었지만 그 정도는 봐줄 수 있겠어.”
“도대체 제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이 건방진 새끼. 이럴 때는 안부부터 묻는 거라고.”
그는 뒤이어 다가오는 열차 경비원들에게도 각각 금화 한 닢씩을 던져 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요즘 어떠냐. 잘 지내고 있었어?”
“예.”
“으음? 아닐 텐데. 내가 분명 오면서 소식을 들었는데?”
키드웰의 습격 사건을 말하는 건가.
솔직히 나를 직접적으로 노린 건 용병 듀오였기 때문에 이번 습격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오히려 티무르의 강함을 확인했기에 괜찮은 해프닝이라 여겼다.
“딱히 위험하진 않았습니다.”
“그래? 오올. 그러면 별로 필요 없겠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네 덕분에 그 일을 사주한 놈을 협박해서 장난감을 일주일 대여 연장하기로 했단 말이야. 그게 고마워서 기껏 찾아왔더니…….”
“필요 없다고 한 적 없습니다.”
살렘이 주는 무언가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나는 다급하게 그의 말을 끊고 강하게 내 의견을 말했다.
그런 모습이 웃겼는지 살렘은 끌끌거리며 혼자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 이놈아. 그것보다 어디 가는 중이었냐?”
“……그냥 잠시 용무가 있어서 나왔습니다.”
“그니까 그 용무가 뭐냐고 묻잖아.”
살렘한테 우리 집의 위치를 알려 준다고?
내가 미쳤냐.
물론 살렘의 능력이라면 내 가족은 물론 어디 사는지까지 금방 알아낼 수 있을 테지만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에는 조금 꺼려졌다.
“머리를 조금 식히려고 여행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럼 잘됐다. 머리 식히는 김에 내가 네 녀석의 마법을 조금 봐 주지.”
계획에도 없던 살렘의 말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목적지가 어디야?”
나는 윗옷 주머니에 넣어 뒀던 목적지가 적힌 열차 티켓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대충 둘러댔다.
“아마 다다음 정거장일 겁니다.”
“그래? 금방이네. 그럼 도착하면 깨워라. 난 조금 자련다.”
그렇게 말한 살렘은 정말 3초도 되지 않아 그대로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렸다.
내가 말한 다다음 정거장까지는 길어도 30분에서 40분.
나는 조용히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 * *
예정에도 없던 콘딧 영지에서 내린 나와 살렘은 적당한 식당에 들러 밥부터 먹었다.
“뭐? 익힌 게 고작 그거밖에 없다고?”
대낮부터 맥주를 들이켜던 살렘이 내 이야기를 듣고 기가 막혀 했다.
나도 충분히 그를 이해한다.
처음에 능력치창을 보고 속으로 얼마나 쌍욕을 했었는지.
게다가 지금은 거의 기본부터 다시 쌓아 올리고 있기에 다른 마법을 배울 틈이 없었다.
“흐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냐?”
“운이 좋았습니다.”
그는 내 말에 딱히 의문을 품지 않았다.
애초에 그냥 뱉어 본 말인 듯 내 대답에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좋아. 원래는 다른 걸 알려 주려고 했는데 네가 못 받아먹겠다.”
그는 생각을 정리한 듯 맥주를 들이켜고는 시원한 감탄사를 터트리더니 말했다.
“아주, 아~주 기본적인 걸 알려 주겠어.”
“가르쳐만 주신다면 뭐든 배우겠습니다.”
안 그래도 배움에 목이 말라 있었다.
아카데미에서도 강의를 듣지만 내가 익혀야 할 수준보다 훨씬 높은 내용이다 보니 실제로 도움이 되기보다는 이론만 얼추 잘 긁어모은 정도였다.
그마저도 못했으면 아마 평가를 모두 낙제점을 받았겠지.
“일단은 마저 다 먹고 지금은 귀찮으니 저녁쯤에 가르쳐 주마.”
아니 진리를 쫓는 악마가 실제로는 이렇게 게으를 줄이야.
나는 그가 지식에 고파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그렇게 밥을 다 먹은 우리는 도시 이곳저곳을 둘러 다니며 관광 아닌 관광을 즐기다가 저녁 무렵에서야 도시 근처에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에 올랐다.
“여기서 알려 주지.”
“굳이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러고 싶다면 넌 그냥 받아 처먹어.”
“예.”
그는 등에 멘 사악한 뱀을 헝겊 채로 들고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래였으면 내가 가르쳐 줄 건 이거였다.”
나는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뭡니까?”
“쯧. 넌 정말 재능이 없나 보군. 저번에 내가 네 녀석들을 습격하려던 흑마법사 놈들을 죽였을 때 썼던 거 기억나냐?”
“예. 그냥 단순한 마나 파동…….”
“그래. 내가 알려 주려던 게 원래 그거였어.”
그는 다시 언덕의 바닥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그저 낙서와 영문을 알 수 없는 글자들 몇 개였다.
“모았다가 터트리는 거다. 이런 식으로. 그러면 단순한 마나 파동으로도 상대를 터트려 버릴 수도 있지. 이걸 마법에 사용하면? 아니면 신체 활성에 적용하면?”
뭔지는 몰라도 그가 사용했던 마나 파동의 원리를 마법에 사용하거나 기사의 마나로 신체 활성에 사용하면 엄청난 파괴력을 보일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사용할 방법을 알려 줘도 못 배운다는 것.
내가 그저 대단할 것 같다고 대답하자 살렘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좋은 선생은 아니지만 너도 좋은 학생이 아니라 서로 피곤하군. 좋아. 일단 이런 게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라.”
나는 그의 말에 바닥에 그려진 낙서를 외울 기세로 보았다.
지금 당장은 활용할 수 없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써먹을 수도 있었다.
‘나한테는 진화가 있으니까.’
대기만성형인 특성을 지닌 만큼 뭐든 일단 알아 두는 게 좋았다.
그런 게 아니어도 천하의 살렘의 심득이 담긴 낙서인 만큼 어떻게 해서든 외워 두는 게 좋았다.
“원래는 기본만 알려 주려고 했는데 어차피 익히지도 못하는 거 실컷 봐 둬라. 솔직히 말하면 장난감 일주일보다 더 큰 대출혈 서비슨데 넌 마음에 든 녀석이니 봐준다.”
“감사합니다.”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인사를 했다.
애초에 자칭 스승인 카론조차 요즘 들어 내게 말도 걸지 않고 있었는데 가르쳐 주려는 마음조차 감사히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이제 이건 지우고 네가 사용할 수 있을 만한 걸 알려 주지. 이건 아마 너한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다.”
살렘은 이번에는 자신 있다며 크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