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전투 그리고 흑마법사의 정체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리는 결계를 뒤로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되돌아온 곳은 여전히 좀비와 같은 마을 주민들이 춤을 추고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후련했다.
“어떻게?”
가면을 썼음에도 동요를 감추지 못한 흑마법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놔두고 옆을 보자 또 하나의 검은 반구 형태의 결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비안인가.’
보아하니 저 검은 결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나태의 페이지로 인한 능력인 모양이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마을 주민들이 저렇게 변해 버린 것도 마법사 본인의 능력이 아닌 저 아이템의 능력이지 않을까 싶었다.
‘혹시라도 아이비가 조종당하면 끔찍하겠는데?’
그때 예고도 없이 날아온 검은 꼬챙이가 슬쩍 피해 낸 내 발치에 박혀 들었다.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지? 네가 나태의 저주를 풀었다고? 말도 안 된다.”
흑마법사의 주위로 다크 스피어가 세 자루가 둥둥 떠 있었다.
하급 마법을 부리는 것으로 보아 첫 예상과 다르지 않게 수준 자체는 별 볼 일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상대.
‘게다가 나태의 페이지가 추가적인 능력을 지녔을 수도 있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나는 입부터 털기로 했다.
“집회에서는 알고 있나?”
“……!”
집회라는 단어가 나오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몰래 사용하는 모양이군.
“네가 집회를 어떻게 알고 있지?”
“왜겠어.”
비록 초급 수준인 흑마법이었지만 전장은 내가 유리했다.
마침 다른 사람들도 결계에 갇혀 있으니 시선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초급 사령술: 스켈레톤 소환을 시전합니다.]
[시체 스물세 구가 감지됩니다.]
[시전자의 역량이 부족합니다. 아홉 구가 반응합니다.]
[초급 사령술: 스켈레톤 소환 성공]
[스켈레톤(일반) 일곱 구, 스켈레톤 솔저(일반) 두 구를 소환했습니다.]
―딱딱딱딱!
비비안이 죽인 마을 주민들이 백골로 변해 몸을 일으켰다.
“네크로맨서!”
역시 수준이 낮은 녀석이라 그런지 일일이 동요하는 게 눈에 보였다.
처음에는 별 괴상한 소리나 지껄이며 최종 보스처럼 등장하더니.
나는 사경을 헤매며 쓰러져 있는 크리스토퍼의 검을 집어 들었다.
“집회의 이름으로, 네가 가진 나태의 페이지를 수거하겠다.”
상대의 동요를 더욱 끌어내고자 흑마법 집회의 이름을 팔았다.
그리고 확실히 상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럴 리 없다. 벌써 집회가 눈치채다니.”
“가라. 찰스, 한스, 알렉스, 앨리스, 제이스, 그 외 나머지.”
내 명령을 들은 해골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흑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집회에서 왔다고 해도 나를 잡아갈 수는 없다.”
쾅! 콰직!
역시 평범한 스켈레톤들의 내구도는 형편없었다.
상대가 만들어 낸 다크 스피어는 나의 해골들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그리스.’
순간 상대가 선 바닥의 마찰력을 0으로 만들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을 파훼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동안 상대의 마법으로 인해 세 구밖에 남지 않은 내 해골들은 두려움을 모르고 전진해 나갔다.
퍼벅!
때마침 남아 있던 마을 주민들이 육탄으로 해골들을 막았다.
그러나 평범한 스켈레톤이 아닌 2티어의 솔저들은 마을 주민들을 밀쳐 내고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콰가각!
‘블랙 실드. 중급 흑마법사였네.’
중급 흑마법.
상대가 비웃는 듯한 느낌이 내게 전해져 왔다.
그는 해골들이 달라붙어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재차 다크 스피어를 만들어 냈다.
퍼벙! 펑!
그리고 뒤이어 주민들이 터져 나가자 결국 남아 있던 내 해골들도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집회에서 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하찮군.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나태의 저주를 벗어난 거지?”
나는 가방에 있던 회복 물약과 체력 상승 물약을 빨고 다시 한 번 해골을 소환했다.
이번에는 수가 줄었지만 그래도 일곱 구나 되는 해골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블랙 실드를 두른 상대는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다크 스피어를 만들어 냈다.
“같은 방법이 통할 거라 보는가?”
거 참 말 많네.
날아오는 다크 스피어를 중첩해서 사용한 어스 실드로 간신히 막아 냈다.
그리고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흙의 장벽을 엄폐 삼아 은밀하게 니켈을 소환해 냈다.
덜그럭?
나는 니켈에게 들고 있던 검을 건네주고 상대의 뒤를 몰래 습격할 것을 생각만으로 명령했다.
다행히 내 뜻을 알아들은 니켈은 있는 듯 없는 듯 기척이 옅어지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스켈레톤 솔저 주제에 별 기술을 다 사용하네.
“네 녀석 때문에 그간 공들인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죽음으로 그 죄를 사하라.”
“남 탓 오지네. 그게 왜 내 잘못이냐.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디?”
“네 이놈!”
역시 부모 욕은 만국 공통으로 먹혀드는 모양이다.
상대는 다크 스피어 뿐만이 아니라, 플레임 에로우, 포이즌 니들, 가시나무 채찍 등을 소환하며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그 공격 속에 내 해골들이 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드디어 내 마나도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어스 실드도 전부 무너져 내리며 엄폐물이 사라졌다.
“네까짓 게 어찌 결계를 탈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죽을 시간이군.”
“볼로릭 남작과는 무슨 관계지?”
“흐흐. 곧 죽을 놈이 궁금한 건 많군.”
“그래. 곧 죽을 놈이라 생각하고 말 좀 해 줘라.”
“닥치고 얌전히 죽어라.”
5개나 되는 다크 스피어가 맹렬한 기세를 뿜어내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움직여 공격들을 피해 냈다.
“무슨 사술이지?”
그동안 어스 실드로 간신히 막아 낸 듯한 연출을 했기에 내가 간단히 피해 내자 상대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정직하게 직선을 그리면서 날아오는 공격도 못 피해 내면 내 재능이 아깝지.
‘직선 공격은 총알 정도 되는 속도여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총구의 방향만 미리 알면 총알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전생의 나는 충분히 그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번 대가로 마침내 니켈이 흑마법사의 뒤편에 나타났다.
“헛!”
쨍!
상대도 뒤늦게 기척을 알아채고는 황급히 뒤를 돌며 마법을 시전했지만 블랙 실드가 깨지고 말았다.
“고작 스켈레톤 따위가!”
아무래도 니켈의 외형이 평범한 스켈레톤과 다를 바가 없어 블랙 실드가 깨졌다는 사실도 잊고 얕잡아 본 듯했다.
곧바로 다크 스피어로 응수했지만 니켈은 가소롭다는 듯 검으로 빗겨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뭐냐. 이 해골은…….”
그제야 평범한 해골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듯 그는 품에서 황급히 무언가를 꺼냈다.
‘나태의 페이지.’
그가 품속에서 꺼낸 기묘한 큐브를 보고 나도 곧장 달려갔다.
니켈이 엄청난 속도로 흑마법사를 뒤쫓았지만 나태의 페이지가 발동되는 것이 더 빨랐다.
촤르륵.
큐브 모양의 나태의 페이지가 검은빛을 뿜으며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흑마법사의 주위로 땅이 검게 물들며 거대하고 창백한 손 6개가 튀어나왔다.
깡!
니켈이 휘둘러지는 손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손들은 하나하나가 사람만 한 크기에 붉은 손톱을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니켈의 검을 맞고도 멀쩡한 걸 보면 단단함도 짐작이 가능했다.
“이 개 같은 것들! 내가, 내가 얼마나 힘들게 모아 놓은 힘인데!”
마을 주민들을 이용해 힘을 축적해 놓은 걸 결국 지금 사용한 모양이다.
정확히 무슨 마법인지는 몰라도 그만한 힘을 사용했으면 평범한 것은 아닐 게 자명했다.
‘방금 공격으로 죽였어야 했는데.’
상대의 감이 생각보다 좋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새하얀 손들이 니켈을 노리고 있었다.
깡! 깡!
“고작 스켈레톤 따위가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상대는 니켈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면 안 되지.
휘익, 쿵!
내가 흑마법사에게 다가가자 손들 중 하나가 채찍처럼 날아와 내가 있던 자리를 찍었다.
맞아 보지는 않았지만 한 방에 쥐포가 될 거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나태의 페이지로 손들을 소환한 것과 별개로 마법도 사용 가능한지 다크 스피어를 만든 상대는 여전히 내게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니켈을 노렸다.
마나를 저렇게 소모했음에도 아직도 마법을 난사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나태의 페이지가 마나를 늘려 주는 모양이다.
끼기긱. 퉁!
역시 전생 오러 마스터.
비록 코어가 없는 몸이라 마나를 다룰 수는 없지만 그 자아와 경험 그리고 검술은 녹슬지 않았다.
니켈은 전과 같이 무리하지 않고 최대한 공격을 흘려 내고 막기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넓어지는 검은 땅에 하얀 손들의 행동반경이 늘어나자 니켈도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니켈. 수고했다.
이제 내 차례다.
“미친놈이. 마법사가 직접 와서 어쩌겠다는 거지? 주먹질이라도 할 셈인가?”
어느새 그의 근처까지 다가가자 그는 비웃듯 내뱉으며 가시 채찍을 소환해 휘둘렀다.
확실히 채찍은 그 움직임을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상대가 채찍의 달인이 아닌 이상에야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채찍의 특성상 거리가 가까울수록 공격의 딜레이가 컸다.
덕분에 공격을 피한 나는 단숨에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그래. 이 새끼야. 이게 대한민국 특수 부대의 주먹이다.”
퍼억!
정말로 주먹을 휘두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대비조차 못 한 상대의 얼굴에 제대로 주먹이 꽂혔다.
가면이 저 멀리 날아갔다.
‘볼로릭 남작가 집사?’
스쳐 지나가는 생각과 함께 나는 기세를 잃지 않고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둘렀다.
“이건 우리 찰스의 몫.”
퍼억!
“이건 우리 한스의 몫.”
퍽!
“이건 우리, 그 외 나머지의 몫!”
“으아아!”
괴성을 지른 흑마법사는 영거리에서 마법을 쐈다.
순간 슬쩍 몸을 뒤튼 덕분에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사이 간신히 뒤로 물러나며 일어선 그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코와 입에선 피를 흘리며 말했다.
“이 또라이 새끼가! 뒤져!”
니켈에게 가 있던 손 중 두 개가 내 쪽으로 왔다.
나는 재빨리 손아귀를 피하며 흑마법사에게 다가가려 했다.
“죽어, 죽어, 죽어!”
다시 한 번 마법이 난사되었고 그의 마법은 나와 손들의 구분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덕분에 대부분의 마법을 거대한 손들이 막아 줘 무사할 수 있었다.
쇄애액.
깡!
어느새 여유가 생긴 니켈이 흑마법사를 공격했다.
상대는 다급하게 블랙 실드를 사용했으나 전과 같이 깨졌다.
다급하게 달라붙은 손들이 다시 니켈을 막아서자 나는 니켈에게 소리쳤다.
“니켈!”
내 뜻을 알아챈 니켈이 검을 던졌다.
던져진 검은 회전을 하며 흑마법사에게 날아갔다.
“흐헉!”
몸을 뒤틀어 간신히 피해 낸 흑마법사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런 공격에 당해 줄 줄…….”
서걱.
흑마법사의 뒤편에서 니켈이 던진 검을 낚아챈 나는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상대의 목을 베어 넘겼다.
얇은 실선이 생긴 흑마법사의 목에서부터 머리가 굴러 떨어졌다.
그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채였다.
애초에 니켈이 던진 검이 노렸던 건 그가 아닌 나였다.
내가 니켈을 부른 이유도 검을 내게 던질 것을 명한 거였다.
털썩. 푸화악.
머리를 잃은 시체가 무릎을 꿇더니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검은빛을 뿜고 있던 나태의 페이지도 빛을 잃고 회전을 멈췄다.
끼어어억.
괴상한 소리와 함께 검게 물들었던 땅이 점차 제 색을 되찾았으며 하얀 손들은 그대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누가 흑마법사 아니랄까 봐.”
실전 경험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들키지 않으려 숨어서 지내는 특성상 전투 경험이 전무한 녀석들이었다.
흑마법사가 싸웠다는 이야기는 정체를 들킨 경우가 대부분이라 죽느냐 사느냐 둘 중 하나다.
만약 정체를 들키고도 살아남았다면 평범한 녀석이 아니라는 소리지.
그리고 그런 이들은 대부분 이름을 알린 유명한 흑마법사들뿐이었다.
나는 죽어서도 움켜쥐고 있는 나태의 페이지를 녀석의 손에서 빼앗았다.
이 게임의 종결 아이템 중 하나인 코덱스 아포칼립스가 손에 들어온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