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근면하는 나태 그리고 비비안 벨로칸
네임드급 캐릭터들이 있는 만큼 아이템도 여러 ‘네임드템’이 존재했다.
특히 이종족과 전설적인 인물들 그리고 신들이 실존했던 세계인만큼 다양한 종류의 아이템들과 능력들이 존재했다.
[코덱스 아포칼립스: 7장 근면하는 나태]
[마나 회복률 +321%]
[흑마법 숙련도 상승률 +123%]
[마나 배열 속도 +213%]
[술식 구성 속도 +213%]
[마나 저장 기능]
[스킬 ‘나태의 춤사위’로부터 에너지 흡수]
[아이템 소유 시, 저주에 걸립니다. (저주 목록…….)]
[내장된 스킬……]
역시 네임드급 아이템, 정보가 게임 화면처럼 바로 뜬다.
아이템의 능력치를 보자 상대가 조금만 더 제대로 된 흑마법사였으면 손 한 번 못 쓰고 죽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막상 손에 들어온 나태의 페이지를 보자 걱정부터 되었다.
물론 눈치 보지 않고 쓸 수만 있다면 이만한 아이템이 없었지만 이런 물건을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특히나 이만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이템을 가지고 그대로 복귀한다면 다른 이는 몰라도 바하트 알븐이 눈치챌 가능성도 있었다.
네임드 아이템들은 주인이 정해진 순간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는데 게임의 경우 그냥 습득한 순간 주인으로 인정받는 식으로 진행됐었다.
하지만 방금처럼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끊임없이 존재감을 발산해 마나의 고동을 일으킨다.
“머리 아프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태의 페이지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고동이 느껴지는 걸 보면 나도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모양이다.
아마 재능이 뛰어났으면 자연스레 인정받고 고동이 멈췄겠지.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니켈이 보무당당하게 다가와 손을 펼쳐 보였다.
마나도 다루지 못하는 스켈레톤 주제에 저리 멀쩡한 걸 보면 확실히 오러 마스터는 다르구나 싶었다.
“뭐.”
니켈은 이내 내가 들고 있는 검을 손짓했다.
거 참, 원하는 게 확실한 양반이네.
나는 니켈에게 검을 주고 준 김에 나태의 페이지까지 건넨 뒤 그대로 소환 해제 시켰다.
더 이상 눈에 띄는 건 좋지 않지. 나태의 페이지도 숨길 겸.
주변을 둘러보자 폐허가 따로 없었다.
그나마 살아 있던 주민들도 흑마법사의 마법과 녀석이 소환해 낸 하얀 손들에 휩쓸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크리스토퍼도 사라졌네. 미안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점이 눈에 띄었다.
“이건 또 왜 안 없어지냐.”
나태의 저주였나?
나태의 페이지에 내장된 스킬로 발동하는 검은 결계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시전자가 죽었음에도 발동되고 있는 걸 보면 시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템의 문제인 듯싶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반구형의 결계를 만져 보았다.
퉁.
약간의 반발력이 느껴지고 이내 손이 푹 들어갔다.
푸딩처럼 떠는 결계를 보며 나는 다시 손을 뺐다.
‘그냥 이대로 두고 갈까?’
솔직히 아이비라면 몰라도 비비안은 두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고민을 했지만 결국 구해 주는 쪽으로 생각을 틀었다.
애초에 이렇게 거리 한복판에 뻔히 보이는데 아이비를 구하게 되면 이걸 본 아이비가 뭐라고 하겠는가.
당연히 구하자고 하겠지.
어차피 구해야 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구해 주는 게 나을 거다.
‘그냥 빼내기만 하면 되겠지?’
결론을 내리고 망설임 없이 결계를 향해 몸을 던졌다.
투웅!
* * *
짝!
오자마자 보게 된 광경에 뻘쭘하게 서서 바라만 봤다.
한 여인이 고작 10살도 되지 않았을 법한 여자아이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초록 머리카락과 메말라 버린 녹색의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아 보였다.
설마 저 아이가 비비안인가?
“재수 없는 년. 눈을 그렇게 뜨면 어쩔 건데? 뭐, 죽이기라도 하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부인.”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짜악!
저게 말대꾸냐?
내가 볼 때는 그냥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모르니 보고만 있었다.
애초에 저 둘한테는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을 흉흉한 학대 장면을 지켜보았을까, 드디어 괴로운 시간이 끝났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저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고 보이지 않는 것과 별개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렇다는 건 내가 말을 하면 들린다는 건가.
아직 시도는 해 보지 않았다.
잠시 뒤, 온몸에 멍이 들었을 법한 아이가 부인이라 불린 여인의 방을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아픈 몸을 질질 끌며 움직이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일단은 지켜보고만 있었다.
똑똑.
“누구세요?”
“어머니. 저예요.”
아무래도 이곳은 귀족 가문의 성인 듯싶었다.
내가 알기로 광녀 비비안은 귀족의 자제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가 비비안의 가문인 벨로칸 백작가인가?
“……들어와.”
“네.”
방에 들어가는 비비안을 따라 들어가자 그곳에는 수척한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어머니. 제가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부인께서 어머니를 찾아오실 거라고…….”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비비안은 벨로칸 가문의 영애로 알고 있는데 백작 부인이 따로 있고 비비안의 어머니가 따로 있다고?
“널…….”
잠시 침묵을 하던 비비안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널 낳는 게 아니었어.”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 상황을 보니 비비안이 미친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친엄마까지 저러니 미치지 않고서야 배기겠나.
그렇게 온종일 비비안의 뒤를 귀신처럼 붙어 다니며 알게 된 건 그녀의 어머니는 정실로서 비비안을 낳았지만 그녀를 낳은 후 건강이 나빠져 후계를 만들지 못하게 됐다는 것과 그로 인해 벨로칸 백작이 아들을 만들기 위해 후처를 데려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렇게 데려온 후처가 아들을 낳는 바람에 이 꼴이 난 거고.
백작도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있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길고 긴 하루가 지나 자신의 방에 돌아온 비비안은 침대에 쪼그려 앉아 숨을 죽인 채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탁!
“흡! 누, 누구세요?”
내가 소리를 내자 최대한 울먹임을 숨기며 문 쪽을 바라보는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아, 내가 천하의 광녀한테 연민을 가질 줄이야.
그래도 아이가 학대당하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광녀라 불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광녀는 아닌 셈이지.
“누, 누구세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외치는 그녀를 향해 최대한 놀라지 않게끔 옆에 있는 탁자의 의자를 꺼내 앉았다.
“으힉!”
그녀의 눈에는 아마 의자가 스스로 움직인 것처럼 보이겠지.
나는 최대한 인기척을 내며 여기에 내가 앉았다는 걸 표현했다.
“귀신?”
“흠흠. 들리시나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보이지 않는 친절한 요정 콘셉트를 잡아야지.
“귀신!”
“아니에요. 전 귀신이 아니라 요정입니다.”
“요, 요정!”
일일이 호들갑을 떨며 반응해 주니까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비안 벨로칸, 맞습니까?”
“네, 네! 맞아요.”
“비비안. 흠, 흠. 제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다름이 아닌 비비안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저를요?”
이 결계를 깨뜨리는 방법.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저 과거를 극복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인지하고 절망과 좌절이라는 알을 깨부수고 나와야 한다.
실패한다면 나태의 늪에 빠지게 되겠지.
“예. 그렇습니다. 비비안 벨로칸.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 나타난 요정입니다.”
“와아.”
환호성을 뱉어 낸 비비안은 이내 눈물을 글썽이더니 울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비, 비비안?”
“죄송해요. 갑자기, 갑자기 눈물이. 죄송해요. 요정님. 지금까지 제 편은 아무도…….”
아, 이런 분위기 너무 싫다.
하지만 견뎌야지.
이미 이 공간에 들어와 버린 이상 빠져나가는 방법도 모르고.
최대한 그녀를 도와 이 결계를 부수는 수밖에.
“근데 요정님은 어떻게 저를 알고 오신 거죠?”
“비비안. 당신은 특별합니다. 당신은 모르고 있겠지만 당신은 특별함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일단은 학대를 당해 시궁창까지 떨어져 버린 자존감부터 올려 주기로 했다.
“제가, 특별하다고요?”
“그럼요. 당신은 세상에서 둘도 없을 특별함을 지닌 사람입니다.”
“뭐가 특별해요?”
음, 말을 일단 막 내뱉기는 했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가 터질 듯 돌아갔다.
다행히 어색하지 않게끔 금방 대답을 생각해 냈다.
“비비안. 당신은 뛰어난 검술의 재능을 지니고 있어요.”
“제가, 검이요?”
오늘 하루의 일과를 보아서 알았지만 아직 검을 배우기 전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예. 아주 뛰어난 재능이죠. 반짝반짝 빛나는 특별함입니다.”
이렇게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것도 미래의 그녀를 알기 때문이다.
2년 뒤, 그녀는 홀로 기사학부 5학년 전원을 없애 버린다.
심지어 함께 있던 교수와 조교들까지 혼자서 죽여 버리지.
“못 믿겠어요. 저는 항상 잘못해서 야단만 맞고 벌만 받는 걸요.”
“비비안. 전 요정입니다. 요정이 잘 알까요, 인간들이 더 잘 알까요?”
“그, 글쎄요.”
“비비안. 당신은 특별해요. 당신을 괴롭히는 백작 부인도 다 그런 당신이 질투가 나서 그러는 거예요.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뭔가 말하다 보니 어둠의 속삭임처럼 느껴진다.
마치 내가 흑막이 된 것 같달까.
근데 사실인걸? 내가 봤을 때 비비안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그저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
설령 잘못을 했다고 해도 학대는 잘못된 거지.
“이제부터 제가 비비안의 옆을 따라다니며 조언을 해 드릴게요. 대신 비비안은 제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면 안 돼요. 알겠죠?”
“네! 알겠어요.”
그 뒤로 나는 매일 비비안의 곁을 쫓아다니며 조언을 해 주었다.
나도 비록 인간관계에는 서툴렀지만 10살도 안 된 꼬마에게 해 줄 만한 조언은 넘쳐 났다.
우선은 내 말을 따라 벨로칸 백작에게 조금은 어려워하는 듯하면서도 당당하게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 것부터 그녀는 점차 변해 가기 시작했다.
백작 부인에게 꼬투리를 잡힐 때도 내가 최대한 옆에서 알맞은 언행을 조언해 줬다.
덕분에 그녀는 점차 학대에서 벗어났고 애초에 검술 수련을 명목으로 부인과 접점이 사라지자 더욱 상태가 좋아졌다.
“요정님! 들었죠? 검술 선생님이 절 칭찬해 줬어요!”
어느덧 결계에 들어온 지 한 달이나 지나고 있었다.
꽤 밝은 성격으로 변한 비비안은 내가 있는 방향의 반대에 대고 말을 걸었다.
“저 여기 있습니다. 비비안.”
“아! 거기 있었구나!”
비비안과 함께 지내며 꽤 정이 든 나는 마치 딸이 있었으면 이랬을까 싶은 심정으로 대했다.
그러다 보니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역시 비비안은 특별합니다. 저도 옆에서 지켜봤지만 비비안의 성장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렇죠? 히히.”
그때 문득 그녀가 내게 손을 뻗어 왔다.
나는 슬쩍 뒤로 물러나 그녀의 손이 닿지 않게 거리를 조절했다.
“요정님은 절 볼 수 있는데 왜 저는 요정님을 볼 수 없을까요? 저도 요정님을 보고 싶어요.”
“그건 제가 요정이라 그래요. 비비안만 볼 수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못 보잖아요?”
“저는 특별하다고 말했잖아요!”
“하하. 언젠가 비비안이 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더 이상은 안 된다.
속으로는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기댈 곳 없는 비비안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다짐이 무너진다.
그래. 이제 조금 밖에 안 남았어. 조금만 더.
……애써 생각을 돌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벨로칸 백작이 비비안의 수련을 보게 되었다.
“아, 아버님을 뵙습니다.”
“비비안. 다시 한 번 해 보아라.”
“네?”
“방금 그 검술, 다시 한 번 해 보아라.”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한 달간 연습한 기본 동작과 심화 동작을 부드럽게 펼쳐 보였다.
확실히 재능이 있던 비비안은 고작 한 달이라는 기간이 놀라울 만큼 눈에 띄는 실력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그녀가 배웠던 모든 걸 펼쳐 보이자 냉한 인상의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는군. 역시 벨로칸의 핏줄답다.”
“가, 감사합니다.”
백작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비비안은 그가 한 말에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눈물까지 글썽이며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아무도 없기에 조용히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제가 말했죠? 역시 비비안은 대단하다니까요. 앞으로도 이렇게 열심히 하면 훨씬 더 잘될 겁니다.”
“요정님. 고마워요. 저, 처음으로 아버님에게 좋은 말을 들어 봤어요. 항상 저를 좋게 말하지 않으셨는데.”
하아. 이 딱한 것아.
내가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허공에 금이 간 걸 느꼈다.
뭐지? 설마?
“요정님. 고마워요. 저 진짜,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서 저만의 길을 찾을 거예요. 벨로칸의 쓸모없는 딸이 아닌, 자랑스러운 비비안 벨로칸이요.”
그녀가 말을 뱉어 내자 세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어어?”
비비안도 말을 하다 말고 당황한 눈빛으로 부서지는 세상을 보았다.
딱히 현실이 아닌 걸 몰라도 되는 모양이네.
이제 헤어질 시간인가.
“요, 요정님? 이건?”
“비비안. 잘했어요. 저랑 한 가지 약속할래요?”
나도 모르게 정이 든 나머지 오지랖을 부렸다.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말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비비안에게 전하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요정님?”
“앞으로도 이렇게 열심히 살겠다고, 그래서 비비안 벨로칸만의 길을 찾는다는 그 다짐, 잊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닿은 내 손에 살짝 놀란 비비안이었지만 이내 내가 소지를 걸자 마치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을 주었다.
“약속이에요, 비비안?”
“네! 약속이요.”
그렇게 비비안의 세계가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