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나태의 결계 그리고 과거
사실 상대가 ‘나태’와 관련된 아이템을 가졌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유추해 낼 수는 있었다.
애초에 죄악과 관련된 아이템을 가진 게 아니라면 ‘나태’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을 테니.
‘골치 아프게 됐네.’
나는 기억을 뒤져 죄악, 그중에서도 나태와 관련된 아이템이 뭐가 있었는지 떠올렸다.
죄악과 관련된 아이템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나는 한 가지 물건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코덱스 아포칼립스.’
전부 모으게 되면 게임의 최종 보스를 불러내게 되는 아이템이었다.
각각 본체와 찢겨져 흩어진 7개의 페이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페이지 한 장, 한 장이 엄청난 위력을 지닌 아이템이었다.
아마 상대가 가진 아이템은 코덱스 아포칼립스에서도 나태의 페이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타다다닥.
나는 달려드는 사람들을 피하고 조원들에게 합류하기 위해 길을 되짚어갔다.
상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일단 합류하고 나서였다.
다행히 그동안 꾸준히 늘린 체력과 운동 재능 덕분에 좀비처럼 달려드는 사람들을 수월하게 피해 내고 하잘과 비비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푸화악!
“아.”
선홍빛 핏줄기가 사방에 퍼져 나갔다.
그곳에는 미쳐 날뛰고 있는 한 명의 광인이 존재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온몸에 피 칠을 한 비비안이 귀신과도 같은 검술로 주변을 도륙 내고 있었다.
그리고 하잘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크리스토퍼를 바닥에 내팽개쳐 둔 채 구경만 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본성이 드러나는 게 너무 빠르지 않냐?
“아드리아스?”
그제서야 나를 발견한 하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이내 크리스토퍼를 살피던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나도 어울려 주지.
“지금 이게……?”
나도 덩달아 연기를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물어봤다.
“무사했군요. 비비안이 아무래도 정신을 놓은 모양입니다. 저도 저런 모습은 처음 봐요.”
조금 전까지의 차가운 얼굴은 어디 갔는지 금세 당황한 연기를 하는 하잘을 보자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근데 아이비 조교께서는 어디 가셨죠?”
“당했습니다. 함정에 걸려서 결계에 갇힌 모양이에요.”
“상대는 어디 있죠?”
“지금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달려드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넘기고 있는 비비안도 무섭지만 역시 하잘처럼 속내를 숨기고 있는 놈이 더 경계가 되었다.
적보다 같은 편이 무서운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은 마나 디텍트부터 펼쳤다.
『가엾도다, 가엾도다, 가엾도다.』
『그대들이 죽이고 있는 자들이 선량한 주민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느냐, 있느냐, 있느냐.』
“이 목소리는?”
하잘은 처음 듣는 모양인지 몸을 흠칫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 기회에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내려 애썼다.
다시 한 번 말을 하게 도발하는 것은 덤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네가 죽이는 건 신의 뜻이고 우리가 죽이는 건 천벌 받을 짓이냐?”
『딱하도다, 딱하도다, 딱하도다.』
『진리의 틈새도 발견하지 못한 어린 중생이 신의 깊은 뜻을 어찌 알리오, 알리오, 알리오.』
‘찾았다.’
이번에도 함정일지 몰랐지만 일단은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그 위치는 공교롭게도 조금 전, 아이비와 함께 갔던 곳이었다.
처음 찾은 곳이 아무래도 맞았던 모양이다.
마침 잘됐네.
“하잘.”
“예. 찾으셨습니까?”
“파악이 됐는데 하필이면 조금 전, 아이비 조교가 함정에 빠진 그곳입니다.”
“흠.”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혼자 가 보겠습니다. 이곳은 비비안이 날뛰고 있으니 아마 그리 위험한 상황은 없을 거예요.”
“하잘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압니다. 하지만 나설 수 있는 인원이 저밖에 없는 이상 어쩔 수 없지요. 크리스를 잘 부탁합니다.”
그는 그 말만 남겨 두고 내가 알려 준 위치로 뛰어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미쳐 날뛰는 비비안의 뒷모습을 보며 배낭에 챙겨둔 회복 포션과 재생 포션을 크리스토퍼에게 먹였다.
펑 퍼버벅!
사람들이 또 한 번 터져 나갔다.
불안한 마음에 비비안 쪽을 보자 그녀는 본인의 피인지 주민들의 피인지 알 수 없는 액체를 온몸에 바른 채 멀쩡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비비안도 저 광증만 아니면 꽤 괜찮은 캐릭터인데.
애초에 그녀가 빌런이라는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저 어마 무시한 전투력 때문이었다.
단순히 미치기만 하고 싸움을 못하는 캐릭터였으면 내가 굳이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지.
“안타깝군. 저렇게 소모될 재료들이 아니었건만.”
“나왔냐?”
크리스토퍼의 상태를 살피던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목소리에 대답해 주었다.
“놀라지 않는군?”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
크리스토퍼를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흑마법사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건너편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알고 있었나?”
“짐작이라니까.”
알고 있었음에도 하잘을 보냈다.
솔직히 말하면 하잘은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위험 요소.
녀석은 수틀리면 우리를 인질 삼아 혼자만 도망칠 놈이었다.
“조금 전, 네 녀석의 동료는 도망쳤다.”
어떻게 된 게 예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네.
“그래?”
“이번에도 놀라지 않는군.”
“딱히 쓸모없는 녀석이니까.”
“어째서 그리 초연하지? 죽음을 받아들인 건가?”
“죽어? 내가?”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어 상대를 바라봤다.
“난 절대로 죽지 않아. 적어도 여기서는.”
“뭘 믿고 그리 자신만만한지 모르겠군. 그래도 일단은 그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시련을 내려 주지.”
시련?
그리고 미처 생각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아이비를 가두었던 것과 똑같은 결계가 바닥에서 솟구쳐 나와 나를 집어삼켰다.
* * *
“김진환.”
“확인.”
뭐였지?
뭔가 꿈을 꾼 것 같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꿈 타령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팀장, 김현우의 신호에 따라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이미 선두에는 포인트맨인 정용호가 대기 중이었다.
내가 용호 형의 뒤를 따라 건물 벽에 붙자 뒤이어 막내인 박성보가 반대쪽 기둥에 붙었다.
‘목표는 사살, 그 외에 인물들도 현장에서 즉시 제거.’
이내 용호 형이 전방 경계를 하며 조심히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손에 부착된 특수한 장비는 이러한 건물 외벽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아래에서 후방 경계를 하며 주위를 살피던 내게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분명 어디서 겪어 본 느낌이…….
건물을 마저 다 올라간 용호 형 쪽에서 신호가 왔다.
나는 임무에 집중하려 애쓰며 뒤이어 건물을 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Black!”
적이 나타났다는 짧고 강렬한 팀장의 암구호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를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오며 내 몸이 내팽개쳐졌다.
귀에서 이명이 울리며 머리가 새하얘졌다.
하지만 내 몸은 반복된 훈련에 의해 습관처럼 각인이 된 동작으로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피아식별이 힘들었다.
하필이면 야간 작전인 탓에 총구가 내비치는 불꽃만이 내 시야에서 아른거렸다.
이마를 만져 보자 야시장비가 폭발의 충격으로 날아간 모양인지 없었다.
탕! 탕! 탕!
총성과 고함, 비명 소리.
나는 누운 자세에서 그대로 사격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내 몸을 움직여 엄폐물을 찾고 보이지 않는 적들과 한바탕 총격전을 펼쳤다.
뭐가 잘못된 건지 왼손이 불편한 탓에 한 손 사격을 해야 했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정신없는 총격과 비명 끝에 드디어 사위가 잠잠해졌다.
나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신이 도왔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어둠에 적응한 시야로 간신히 확인되는 건 작전 구역으로 정해졌던 건물이 폭발로 무너져 내린 것뿐.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 보자 여기저기에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탕! 탕!
나는 확인 사살을 일일이 해주며 팀원들을 찾아 헤맸다.
“……!”
나와 같은 복장을 한 팀원 하나가 누워 있었다.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우선은 주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었다.
마침내, 모든 적들의 확인 사살을 마치고 되돌아갔다.
나는 가장 먼저 발견했던 팀원에게 다가가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다.
‘…….’
아직 따뜻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복면을 슬쩍 들어 올려 신원을 확인했다.
막내인 성보였다.
“이 씨발, 성보야. 네가 어떻게 나보다 먼저 가냐.”
차마 큰 소리로는 말을 못한 채 꿍얼대며 그의 야시경을 챙겼다.
우리는 극비 부대인 만큼 신원을 확인할 만한 그 무엇도 들고 다니지 못했고, 하물며 군번줄조차 없는 부대였다.
어쩔 수 없이 야시경이라도 챙기는 내가 한이 사무쳤지만 감정을 접어 두고 다른 팀원들을 찾아 헤맸다.
가족과도 같은 팀원들이었다.
가족이 없는 내겐 유일한 관계들이었고 포기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내 마음은 팀원들의 시신을 발견해 낼 때마다 부서져 갔다.
“끅.”
억지로 참아 낸 울음이 뼈가 시리도록 서글펐다.
그냥 나도 죽을까.
여기서 죽으면 나도 임무 도중 전사로 끝날 수 있지 않나.
손에 쥔 권총이 내 입속으로 들어갔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화약의 냄새가 입안을 파고들었다.
“거기, 누구…….”
희미하게 들려오는 한국어.
나는 권총을 빼내고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복면이 벗겨진 용호 형이 보였다.
나는 다급하게 달려가 조심조심 잔해를 치워 용호 형을 꺼냈다.
그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곧 죽을 것만 같은 모습에 손이 떨려 왔다.
“누구냐, 진환이냐?”
“어.”
“이 쉐키. 떨지 마라. 떨리는 거 다 느껴진다. 나 안 죽어, 인마.”
“그래.”
나는 움직이지 않는 왼손을 놔두고 오른손만으로 간신히 형을 업은 채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살 수 있을까. 적들이 쫓아오지 않을까.
어떻게 탈출하지?
“진환아.”
“왜.”
“네가 그런 거 아니다.”
우뚝. 발걸음이 멈췄다.
“넌 아무 잘못 없다.”
부정해 왔던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야간 사격.
피아식별도 불가능했던 상황.
과연 내가 쏜 총알이 전부 적군에게만 향했을까?
“넌, 아무 잘못 없어. 내가 죽더라도 말이야.”
“용호 형.”
“왜, 이 쉐키야.”
그간 지우지 못했던 마음의 응어리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왜냐고?
바로 얼마 전에 다짐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
새로 생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날 짓누르는 과거에서 벗어나기로 다짐했었다.
그랬던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또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난 한 번 했던 고민과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
그게 이곳이 현실이 아닌 이유다.
그렇게 깨닫고 나자 이곳이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결계라는 걸 눈치챘다.
“나, 사실 후회 많이 했어.”
“음?”
“나, 후회도 많이 하고, 반성도 많이 했어. 그래서 형이 전역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부대에 남아 임무를 수행했어. 근데 말이야.”
“…….”
“이미 놓아 줬어. 이왕 새사람이 됐으니까 다시 시작해 보려고.”
애써 잊으려 한 사실이지만 잊을 수 없는 과거.
그렇지만 아드리아스로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으며 이미 반쯤 부숴 버린 과거.
덕분에 자각을 하게 된 나는 조용히 용호 형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후회 없이 살 거야.”
“그래?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세가 남긴 구절을 되뇌며, 나는 용호 형과 닮은 녀석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난 앞으로 나아갈 거야. 이런 곳에 주저앉아 있지 않아.”
“너는, 왜. 나태해지지 않는 거지?”
“절망을 느낄 거라 생각했으면 반은 성공했어. 하지만 난 말 그대로 새사람이 됐지.”
나는 아드리아스인 나도, 김진환인 나도 부정하지 않는다.
둘 모두 나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마지막 한 마디를 다짐하듯 뱉어 냈다.
“난 아드리아스 크롬웰. 이제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아.”
탕!
* * *
[김진환―아드리아스 크롬웰, 동기화 100% 달성.]
[김진환의 재능 ‘전투(영재)’를 계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