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심사 그리고 마탑
창가를 통해 스며들어 오는 햇빛이 침대에 누워 있는 한 여인을 비췄다.
조각으로 빚어낸 듯 기품 있는 얼굴은 아름답다는 말로도 모자라 눈이 부실 정도였다.
“으음.”
몸을 한차례 뒤척이자 폭포수와 같은 검은 머릿결이 침대 가장자리로 쏟아졌다.
그러다 인상을 찌푸린 디에네는 눈을 감은 채 상체만 일으켜 세웠다.
뾰로통한 얼굴로 앉아 있던 그녀는 이내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서일까, 그녀는 멍해지는 정신을 깨우려 거칠게 세수를 했다.
“푸하.”
똑똑.
그녀가 세면을 마치고 욕실 밖으로 나올 때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친구 중 하나인 유리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에네! 안에 있어?”
“응, 잠시만.”
디에네는 가볍게 침대를 정리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잤구나?”
“응. 어제 책을 좀 읽느라 늦게 자서.”
“너 또 기사들 나오는 잡지 봤지? 아무리 오늘 수업이 없어도 그렇지, 너 자꾸 그러면 피부 상한다?”
“예예. 알겠어요. 엄마.”
“난 너 같은 딸 둔 적 없다.”
시답잖은 농담과 함께 미소를 지은 둘은 이내 기숙사 방에 딸린 테라스로 다과를 준비해 나갔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둘은 간간이 이런저런 가십거리와 디에네의 주 관심사인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기사학부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자 유리히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근데 웬일이야? 수업 끝나자마자 바로 온 거야?”
“그걸 이제 물어보는 거야? 얘기하느라 나도 까먹고 있었네. 너 루시아 에버라스트 알지?”
“알지.”
“이번에 새로운 물약 제조에 성공해서 그 제조법이 로들렌 마탑에서 심사를 받고 있대.”
오오. 디에네는 나직이 감탄을 토해 냈다.
루시아 에버라스트는 그녀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기린아였다.
신입생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재능으로 잠룡이라 불리는 루시아는 듣기로 재능과는 달리 게으른 성격이라 했다.
근데 그런 아이가 한 건 해냈다고 전해 들으니 대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게으르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천재면…….”
“에이, 네가 할 소리야? 물론 넌 노력까지 하니 조금 억울하기도 하겠다.”
“아니, 절대 아니야. 1학년이 새로운 물약 제조법을 알아낸 거면 정말 대단한 거지. 난 1학년 때 주변에서 떠받들기만 하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
“너, 조금 밥맛이야.”
“왜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키득거린 두 여인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근데 확실히 놀랍긴 해. 설마 1학년이 그런 업적을 세울 줄이야. 게다가 물약도 보통 물약이 아니더라.”
“뭘 만들었는데?”
“모하임으로 만든 체력 상승 물약 있지? 그걸 보완해서 장점은 높이고 부작용은 아예 없애 버렸대.”
사실 반쯤은 기대하지 않고 물었는데 그 내용을 듣자 디에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짜? 그게 가능해?”
“몰라. 일단 심사가 끝나야 알지. 어쩌면 들어가는 재료가 전설의 약초, 막 이런 거면 의미도 없는 거고.”
“에이, 설마 그런 걸 넣을 리가.”
“그래도 그 유명한 에버라스트 상단이 뒷배인데 의심해 볼 만하지 않아?”
확실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타당한 의심이 생겼지만 디에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들은 루시아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어. 그런 천재가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했겠어?”
“하긴 그래. 아, 그리고 이번 물약을 만든 게 루시아 에버라스트 혼자가 아니래.”
“공동 제작?”
“응. 듣고 놀라지 마.”
도대체 누구기에 듣고 놀라지 말라는 걸까?
디에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기품과 어울리지 않는 귀여움으로 유리히의 심장을 녹였다.
“아흑. 안 말해 줄래, 그냥.”
“뭔데! 말해 줘!”
“하악, 하악. 디에네 언니. 사랑해요!”
“장난 그만 치고 빨리 말해 줘. 진짜 궁금하단 말이야.”
디에네의 애원을 한껏 음미한 유리히는 이내 씨익 미소 짓더니 자신이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던 그 이름을 말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뭐라고?”
“음침, 변태, 귀축 아드리아스!”
“하아…….”
디에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하지 말고 빨리 말해 줘. 아니면 애초에 루시아 혼자였던 거야?”
“농담 아닌데?”
“뭐?”
“농담 아니야. 진짜 그 아드리아스가 공동 제작자 명단에 올라갔어.”
진지한 유리히의 말에 디에네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아드리아스가? 굴러다니는 쓰레기보다도 재활용 가치가 없던 그 아드리아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랬고. 근데 사실인 걸 어떡해? 이미 공문도 발표됐어. 태블릿 확인해 봐.”
공문이 발표된 거면 하늘이 두 쪽 나거나 엄청난 실수가 아니었던 이상 사실이다.
그리고 디에네는 그런 실수가 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은 매직 태블릿을 확인해 보았다.
‘루시아 에버라스트, 아드리아스 크롬웰.’
정말 둘의 이름이 함께 올라와 있었다.
“이야. 맨날 우리 디에네만 보면 발바닥이라도 핥을 것처럼 굴었던 우리 벌레 왕자 아드리아스가 이렇게 터트릴 줄이야! 디에네 님,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
아무 말도 없이 태블릿을 보고 있던 디에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에네 님? 디, 디에네?”
“나가 봐야겠어.”
“어딜?”
“루시아 에버라스트.”
싸늘해진 디에네의 두 눈이 심연처럼 깊어졌다.
“만나서 확인해 볼 거야.”
* * *
“헉, 헉!”
최대한 일정한 호흡을 내뱉으려 애썼다.
들숨과 날숨을 조절해야 더 오래 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의지와는 달리 자꾸 엇나가려는 몸이 문제였다.
“끄어어.”
다행히 호흡이 어긋나기 전에 목표했던 거리를 완주해 냈다.
폐를 찌르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트레칭을 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서 숨을 들이켜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 내며 불편함을 감수했다.
현재 시각은 새벽 5시.
어스름이 깔린 시간이었다.
요즘 들어 매일 운동을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스트레칭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체력 단련실로 향했다.
웃기다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라 해야 할까.
마법학부의 체력 단련실에는 기사학부에 있는 것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기구들과 도구들이 있었다.
아마 마법학부 학생들의 불평불만에 어쩔 수 없이 같은 수준으로 준비한 모양인데 그렇게 만들어진 체력 단련실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심령 스폿이 되어 버렸다.
그럼 그렇지, 솔직히 골방에 틀어박혀서 마법 연구나 하는 놈들이 운동은 무슨.
덕분에 이곳은 내 개인 체육관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자, 오늘은 하체를 조질 차례였나?
“선배.”
“흡!”
순간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내고 단련실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신영을 확인했다.
“루시아?”
“하암. 좋은 아침이에요.”
하품을 하며 몽롱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냐?”
“선배 기다렸어요. 기다리는 김에 잔 거구요.”
“그게 뭔 소리야?”
“선배 매직 태블릿 없잖아요.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까 새벽에 운동한다는 말 듣고 어제부터 미리 기다렸다고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다고 왜 굳이 이런 식으로 기다려?
애초에 여기서 잤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선배, 오늘이에요.”
“뭐가?”
“심사 결과 나오는 거랑 면담. 그니까 저랑 같이 마탑에 가셔야 해요.”
“그거 말해 주려고 어제부터 기다린 거야? 그냥 어제 찾아와서 말했으면 되잖아.”
“어제는 어떤 선배들한테 붙들려서 찾아갈 시간이 없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이미 반쯤 눈이 감긴 채 또다시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어나.”
“5분만 더…….”
아예 침낭과 베개까지 가져온 상태인 그녀는 그대로 다시 잠에 빠졌다.
며칠 동안 그녀를 지켜본 결과, 그녀는 약초학과 제조학을 제외하고는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게으름뱅이였다.
어찌나 게으른지 방금 말한 두 과목을 제외하고는 강의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놀라운 건 출석률이 개판이어도 저번 중간고사 시험은 모두 백 점이었다고 하니 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였다.
워낙 마이웨이에다 4차원인지라 대하기가 어려웠었는데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는 중이었다.
잠에 빠진 그녀를 놔두고 오늘 분량의 운동을 끝내자 7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루시아, 일어나.”
“우웅…… 조금만 더.”
“마탑에 가야 된다며. 언제까진데.”
“으으.”
마탑이라는 말에 결국 게슴츠레 눈을 뜬 루시아가 나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일곱 시…… 반.”
“뭐?”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일곱 시? 저녁 일곱 시?”
“오전 일곱 시 반.”
뭐라고?
나는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누워 있는 루시아를 반사적으로 들쳐 멨다.
“으잉?”
루시아가 깜짝 놀라 버둥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으로 그녀를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늦었어! 달려!”
다행히 마탑은 아카데미 부지 내에, 그것도 마법학부 근처에 있었기에 늦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오는 도중에 루시아가 내려서 스스로 뛰었기에 가능했다.
“루시아 에버라스트, 아드리아스 크롬웰, 맞습니까?”
“예.”
“저를 따라오시죠.”
마탑에 소속된 조교를 따라가자 복잡한 탑의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게 되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그냥 원통형 건물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했다.
조금 걷는가 싶으면 전혀 의외의 공간이 나타나고, 계단을 올라갔다 생각하면 어느 순간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머리가 돈다, 돌아.’
조교가 없었으면 꼼짝없이 미아가 될 상황이라 긴장을 늦추지 않고 뒤를 따랐다.
“선배. 저거 봐요.”
그렇게 정신없이 따라가던 중에 루시아가 어딘가를 손짓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을 보자 퍼런빛의 거대한 맹금류 한 마리가 깃대에 앉아 자신의 부리를 긁고 있었다.
“스톰브링어!”
“저도 들어만 봤는데 실제로 보니까 신기하네요.”
영물로 분류되는 몬스터의 일종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번개와 바람을 사용하는 몬스터다.
영물이다 보니 지능이 매우 높고 친해지면 동료가 될 수 있었다.
나도 게임 속에서 수없이 많은 세이브, 로드 신공으로 간신히 길들였었지.
“어?”
그렇게 스톰브링어를 구경하던 우리는 이내 당황했다.
“어디 갔지?”
조교가 사라졌다.
정말 5초도 안 된 사이에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사라진 조교에 나와 루시아는 서로를 뻘쭘하게 바라봤다.
“미아가 됐을 때는 가만히 서 있는 게 상책이지.”
“선배. 여기는 마탑 안이라 가만히 서 있어도 공간이 계속 비틀려요.”
“……그래?”
게임 속에서는 보지 못했던 설정이다.
그때는 캐릭터가 마탑에 들어가면 그냥 방문 목적에 맞게 바로 이동이 되었었으니까.
이렇게 걸어가는 과정은 표현되지 않았었지.
“아,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뭔데? 방법이 있어?”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어저께 말이에요. 선배들한테 붙잡혔다고 했잖아요.”
굳이 그 이야기를 지금 해야 하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머릿속을 한번 구경해 보고 싶었다.
“선배? 듣고 있어요?”
“어. 그래서.”
“그랬는데 그 선배들 중 한 명이 디에네 알븐 선배였거든요.”
“그래?”
디에네가 루시아를 찾아왔다라…….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애초에 아카데미에 거주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은 어떻게든 모두 마주치게 되어 있다.
재능이 있는 만큼 재능 있는 자를 알아본 거지.
근데 무슨 이야기를 했으려나. 아직 게임이 시작되기 전의 시간대라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근데 절 찾아온 이유가 선배 때문이었어요.”
“나?”
“예, 선배요.”
나를? 왜?
아니, 디에네가 왜 굳이 루시아를 찾아가서…….
“물약 때문인가?”
“맞아요. 선배를 왜 공동 제작자로 명의를 올렸는지 물어보더라고요. 엄청 의심하던데.”
음,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되도록 디에네와는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루시아와도 너무 엮였지.’
안일하게 대하기는 했다.
애초에 죽을 녀석이라는 심정도 컸고.
“그래서?”
“그냥 사실대로 얘기했어요. 선배가 전부 다 했다고.”
“야!”
“네?”
“아니야, 잘했어.”
안 돼!
더 이상의 플레이어블의 관심은 사양이다.
이러다가 게임 속에서보다 더 빨리 죽는 건 아니겠지?
루시아의 대처를 욕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녀석은 나름 날 배려해 줬다고 생각할 테니.
“선배, 디에네 선배랑 아는 사이셨나 봐요?”
“어, 어. 그렇지. 썩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그럼. 좋은 관계는 아니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나와 루시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양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 중년의 남성이 깃대에 기대 앉아 한쪽 다리를 늘어트린 채 자리했다.
그런 그의 팔 위에는 스톰브링어가 올라가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바하트 알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