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재희와 재혁 (99/128)


#99화. 재희와 재혁
2022.10.10.



“재혁이가 저 몰래 집을 나간 적이 있어요.”

재희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 재혁이가 나간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요.”

집 안에 적막이 깔렸다.

재희는 발끝만 내려다보았고, 무혁은 그런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재희는 겁이 났다.

끔찍한 일을 저지른 자신을 무혁이는 어떻게 볼까.

경멸할까, 화를 낼까, 이게 본 모습이냐며 속았다고 탄식할까, 아니면 모른 척 그냥 넘어갈까.


“그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덤덤한 목소리에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무혁은 갑갑한 듯 타이를 풀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행동에 재희가 멍하니 무혁을 바라보았다.


“그게 다예요?”

“그럼.”

“제가 재혁이가 나가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요.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정말 그게 다예요?”

“재희야.”

“보통은 놀라거나, 경멸하거나 그렇잖아요. 그런데 무혁 씨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아니까.”

무혁의 거리낌 없는 대답에 도리어 재희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저 타이를 풀어 테이블에 올려둔 무혁이 재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아내의 양 뺨을 감싸주었다. 재희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무혁은 그런 아내의 시선에 가슴이 저몄다.

이 작은 머릿속으로 수없이 자신의 반응을 그리며 마음 졸았을 재희를 생각하니 안타까움이 앞섰다.


“정말로 모른 척했다면 그때 재희는 그런 모습으로 노을 서점에 오지 않았을 거야.”

처음 만났을 당시 재희의 모습은 너덜너덜했었다.

손이며 무릎은 상처가 나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고, 옷은 흙투성이에 더러웠다.

틀림없이 절박하게 뭔가를 찾다가 넘어졌지만, 제 한 몸 돌보지 못한 그런 모습이었다.

상처가 새겨진 눈동자를 보았던 서점 할아버지가 그때 그 눈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가끔씩 말씀하시곤 했다.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분명 뭔가 이유가 있었을 테지.”

무혁이 엄지로 재희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재희가 가만히 눈을 감자, 무혁이 가볍게 입술에 키스했다.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며 재희의 입술을 가만히 제 입술로 문지르던 무혁이 숨결이 맞닿을 만큼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런 표정으로 앉아있을 수가 없으니까.”

무혁의 무거운 중저음의 목소리에 안심이 된 재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잘게 흔들렸던 눈동자가 또렷해져 있었다.


“맞아요……. 모른 척한 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그때 일을 떠올리자 다시금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심통이 나서 정원에서 혼자 노는 줄 알았거든요.”

살짝 호흡이 가빠져 올 정도로 힘들었지만, 재희는 무혁을 마주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 정말 재혁이 혼자 대문 밖으로 나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 * *

한창 공부하던 재희가 이상함을 느낀 건 늦은 오후였다.

아무리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서 심통이 났다 하더라도 재혁이가 정원에서 노는 시간이 평소보다 길었다.


“이상해서 정원에 나가서 찾아봤는데, 재혁이가 안 보이더라구요.”

평소 무서워하던 할머니 방까지 들어가서 찾았지만, 재혁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영산댁은 장을 보러 나간 상태였고 집안 어른들도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재희가 재혁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지만, 벨 소리가 들려온 곳은 재희가 앉아 있던 거실이었다.


“무서웠지만, 바로 아버지에게 전화했어요. 재혁이가 사라졌다고.”

할머니와 홍연화에게 도저히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재희가 아버지에게 겨우 전화를 해서 이 사실을 알렸고, 그날로 집 안이 발칵 뒤집혔다.소식을 듣고 달려온 홍연화가 그런 재희를 보며 소리 질렀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우리 재혁이가!”


“아이고. 우리 재혁이. 우리 재혁이가.”


“재희 탓하지 마. 어머님도 진정하시고요. 경찰에 신고했으니 일단 기다려 보죠.”

 
결국 걱정과 자신이 제대로 재혁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집 안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재희는 동생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외투조차 입지 못하고 추운 거리를 헤매며 한참 재혁을 정신없이 찾다 보니 미처 돌부리를 발견하지 못해 넘어졌다.

차가운 길바닥에 넘어지면서 무릎과 손바닥이 바닥에 쓸려 살이 까지고 피가 났다. 알싸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재희는 자신의 상처를 돌볼 새도 없었다.

당시에는 재혁이를 찾는 게 먼저라고 여겼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재혁을 찾지 못한 재희가 집에 돌아왔을 때 본 것은 할머니 품에 안겨 있는 재혁이었다.

가족 모두 재희가 들어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재혁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누나 잘못 아니에요! 누나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말 안 듣고 나갔다가……. 정말 길을 잃어버릴 줄은 몰랐어. 죄송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재희는 순간 안에서 뭔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 길로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 재희는 누가 먹다 흘렸는지 흙이 잔뜩 묻은 호떡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마치 그 모습이 자신 같아서 재희는 울음을 삼키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재희는 다시 걸었다.

거의 반항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가족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 버스나 타고 내려서,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곳이 바로 노을 서점이었다.

* * *



“노을 서점에 있다가 밤늦게 집에 가니까 재혁이가 사과하더라고요.”

잠도 안 자고 재희를 기다렸던 재혁은 미안하다며 열심히 사과했다.

그러나 재희는 그런 동생을 외면했다.

재혁에겐 단순한 반항이었겠지만, 재희는 도저히 받아줄 수 없었고 용서 또한 하지 못했다. 그때 일 덕분에 노을 서점을 발견하고 서점 할아버지도 알게 되고, 이렇게…….


“내 비밀 친구인 무혁 씨를 만나게 됐지만, 그래도 전 재혁이를 용서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재혁과 사이가 서먹해진 채로 자랐고, 재희는 무혁과 결혼을 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감정이 풀렸지만, 그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자 재희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재혁이가 또 사라졌대요. 오 일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찾고 싶어?”

“안 그러면 할머니는 계속 찾아올 거니까요. 전 그게 싫어요. 무혁 씨랑 내 공간에 할머니가 찾아오는 건 참을 수 없어요.”

무혁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하던 무혁이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무혁 씨. 신경 쓰지 말아요. 이 일은 제가…….”

그 집과 무혁이 엮이는 걸 원치 않았던 재희는 남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신재혁. 소재 파악해. 당장.”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누구? 형수님 동생?

휴대전화 너머로 당황한 우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혁은 대답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재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무혁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직진인 줄은 알았지만, 바로 눈앞에서 일을 바로 진행할 줄은 몰랐다.


“재희는.”

무혁이 재희의 휴대 전화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처남한테 전화해. 메시지든 뭐든.”

“…….”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흔적 정도는 남겨 놔야 하니까.”

“어째서요.”

“이 일과 재희는 아무런 관련 없다는 증거로 남겨둘 거야.”

재희는 무혁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 *



“야. 과일 먹어라. 아부지가 너 고생한다고 과일 주셨다.”

밭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호미질하던 재혁이는 친구가 발로 저를 툭툭 차자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말로 해라, 말로.”

“너 같으면 말로 하겠냐? 다 큰 자식이 가출이나 하고.”

“아~! 가출은 무슨. 할머니한테 쪽지 남기고 왔다고. 내일 돌아간다고.”

“그랬는데 나한테 이틀 내내 네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냐.”

“…….”

“너 내일 꼭 가라. 우리 부모님이야 일손 하나 늘었다고 좋아하시지만, 난 가시방석이다. 아주.”

“알았다고.”

재혁은 투덜거리며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재희의 생일 이후로 재혁은 도저히 할머니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간 할머니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도 한 거지만, 재희에게 벼루를 던지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가 재희에게 사과는커녕 자신만 걱정하는 그 모습에 질려버린 재혁은 귀가 시간을 조금씩 늦추었다.

그러다 재혁은 좀 더 과감해지기로 결심했다.

아예 할머니에게서 며칠간 떨어지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할머니인지라 재혁은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쪽지만 하나 덜렁 남겨두고 친구 집에 온 상태였다.

지잉.

재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친구가 질린다는 얼굴로 자리를 뜨자, 재혁이 머쓱한 얼굴로 발신인을 확인했다.

[우리 누나]

병원에서 헤어진 뒤로 한동안 연락이 없던 재희였다.

재혁이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다시 전화를 걸려던 재혁은 이어진 메시지에 당황한 얼굴을 했다.


[재혁아. 너 어디야.]

[너 가출했다고 들었어.]

[무슨 일 있어? 메시지 보면 연락해.]

연속으로 뜨는 메시지를 본 재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할머니가 재희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재혁이 화난 얼굴로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가출이라니.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소리야? 일주일 동안 친구 집에 있겠다고 할머니한테 쪽지 남겼어. 설마 할머니가 누나한테 찾아갔어?]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재혁은 신경질적으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내일 바로 서울로 돌아가야겠다 마음먹은 재혁은 친구가 멀리서 부르자 걸음을 옮겼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갑갑한 마음에 산책이라도 하기 위해 재혁은 집을 나섰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재혁은 반대편에서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커다란 세단이 보이자 눈을 게슴츠레 떴다.

세단이 재혁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재혁은 저가 길을 막았나 싶어 길가로 비켜섰지만, 세단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뭐야.”

투덜거리며 마저 산책하려던 재혁은 문득 어디서 많이 본 세단인 걸 눈치채고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차 문이 열리며 내리는 두 사람을 본 재혁의 얼굴이 일순 당황으로 얼룩졌다.


“재혁이, 너…….”

화 난 표정으로 서 있는 재희와


“돌아가지.”

덤덤한 얼굴의 무혁이었다.


“누나. 매형.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재혁이 멀거니 서 있자, 울컥한 재희가 거의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 있는 재혁을 보자 재희는 저도 모르게 양 주먹을 치켜들었다.


“너, 네가 몇 살인데 지금!”

재희가 두 주먹으로 재혁의 상체를 퍽퍽 때렸지만, 힘이 실리지 않아서인지 아프지 않았다.

처음 보는 누나의 반응에 당황한 재혁이 힘없이 뒤로 밀렸다. 그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재혁은 또 자기를 때리려는 누나의 손목을 방어하듯 두 손으로 잡았다.


“누나! 진정해, 진정! 왜 그래.”

재희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던 재혁이 반항하다 곧 제 옷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자, 입을 다물었다. 양 손목을 붙잡힌 재희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재혁을 원망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왜 끝까지 너밖에 몰라. 왜 너만 알아. 이 이기적인 놈아.”

재희 입에서 처음 나오는 욕이었지만, 재혁은 처음 보는 누나의 눈물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네가 정말 날 생각했다면 이럴 수 없어. 신재혁, 넌 진짜.”

“누나. 그게…….”

저벅,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무혁이 다가왔다.


“이 손 놓지.”

위협적인 무혁의 목소리에 움찔한 재혁이 손에 힘을 풀었다.

재혁의 손이 풀리자 무혁은 재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재희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재혁을 끝까지 노려보았다.


“매형…….”

“제대로 충분히 잘 설명해야 할 거다.”

“아니, 그게.”

무혁은 재희의 눈가를 엄지로 쓸어주었다.

재희에게 더없이 다정한 행동이었지만, 재혁에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


“내 시간은 비싸다.”

재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재희 눈물값은 그보다 더 비싸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위험할 거라는 적신호가 울렸다.

무혁이 한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재혁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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