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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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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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할머니
2022.10.06.
어둑어둑한 노을 서점 내부에 노을이 스며들어 주황빛이 흩뿌려졌다.
한참 책장을 닦으며 청소에 집중하던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벌써 시간이.”
잡생각을 지우려고 집중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졌다.
서둘러 집에 갈 채비를 마치고 막 노을 서점을 나서려던 재희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우리 노을 서점.’
책장 하나를 두고 무혁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를 떠올리자 재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탁.
어긋난 문지방을 무혁이 수리해준 덕분에 여닫기 힘들었던 문이 매끄럽게 닫혔다.
인기척이 사라진 노을 서점은 여전히 노을을 머금고 있었다.
마치 다시 사람이 돌아올 거란 걸 알기라도 한 듯이 따뜻한 노을을.
* * *
“저 왔어요.”
집에 돌아온 재희가 막 안으로 발을 들일 때였다.
현관에 놓인, 못 보던 신발이 재희의 시선에 걸렸다.
‘이 신발이 왜 여기에.’
단번에 그 신발의 주인이 누군지 눈치챈 재희의 표정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신발이었다.
재희가 대충 신발을 벗어둔 채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다.
“사모님. 오셨어요?”
평소와 달리 경자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재희의 눈치를 보며 맞이했다.
“지금 누가 왔어요?”
“그게…….”
경자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대답은 다른 데서 들려왔다.
“귀가했으면 냉큼 들어와야지, 거기 서서 뭘 우물쭈물하고 있어!”
절대 여기서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 무엇보다 듣고 싶지도 않았던 목소리에 재희의 표정이 굳었다.
“안 들여보내려고 했는데 너무 막무가내이셔서요.”
재희는 경자에게 왜 미리 연락하지 않았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공용 입구에서부터 사모님 이름 부르면서 난리를 피우는 통에 어쩔 수 없었어요. 죄송해요.”
재희는 한숨을 삼키며 거실 쪽을 바라봤다.
경자 나름대로 주변의 시선도 있었을 테니, 안 들여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재희의 친할머니인 데다, 할머니의 성격상 온순한 경자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터였다.
“이만 퇴근하세요.”
“하지만 사모님.”
“괜찮아요. 내일 아침 부탁드려요.”
두 시간도 보지 않았지만, 고압적인 할머니의 성격에 경자는 완전히 질려버린 상태였다.
그런 할머니와 재희를 단둘이 두자니 영 내키지 않아서 머뭇거렸지만, 이내 경자는 수긍했다.
모르긴 몰라도 집안 사정인 데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사모님.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전화하세요.”
“알았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현관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걱정하던 경자가 퇴근하자 재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
거실에는 마치 집주인처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앉아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가 차가운 얼굴로 재희를 돌아보며 호통쳤다.
“얌전히 앉아서 퇴근할 남편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 이 시각까지 뭐 하다 오는 거냐!”
재희가 반응하지 않자 할머니가 혀를 차며 타박했다.
“거기다 그 꼴이 뭐냐! 여자가 단정하지 못하게! 어디서 잔뜩 먼지 같은 거나 묻히고 오고. 쯧쯧.”
재희는 옷을 내려다봤다.
노을 서점을 청소하느라 조금 지저분해졌지만, 더럽지 않았다.
재희가 또렷한 눈으로 할머니를 보며 말했다.
“어쩐 일이세요. 그때 전 다시는 뵙지 않을 거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당돌한 얼굴과 담담한 목소리.
할머니는 연희동에서 본 마지막 재희의 모습을 그저 치기 어린 태도로 치부했다. 생일이랍시고 기분이 둥둥 떠서 감히 제게 대든 거라고, 그리 여겼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았다.
당돌한 재희의 태도에 할머니가 기가 막힌 듯 혀를 찼다.
“허. 이것이 보자 보자 하니 아주 방만해졌구나.”
“무슨 일인지 묻지 않을게요. 주거침입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테니 나가주세요.”
“주거침입?”
재희의 말에 흥분한 할머니가 벌떡 일어섰다.
발을 굴리며 할머니가 위협적으로 다가왔지만, 재희는 꼿꼿하게 서서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말해 보아라. 주거침입?”
“네. 여긴 제집이에요. 집주인이 허락하지 않은 집에 멋대로 앉아있는 건 주거침입이에요.”
“할머니가 손녀 집에 좀 들어왔기로서니 주거침입이라고?”
“엄밀히 말하자면 남이죠. 그때 전 다시는 뵙지 않겠다고 했으니까요.”
“이, 이 못 배워먹은 것이! 감히 천륜을 끊으려고 해?”
“뭐라고 하셔도 상관없어요.”
움츠렸던 전과 달리 물러서지 않는 재희를 보며 할머니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노려보았다.
예전이라면 손이 올라갔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연희동에서 제게 화를 내던 재혁이 걸렸다.
“우리 순진한 재혁이를 이용해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나가더니 아주 기세등등해졌구나.”
“마음대로 생각하시고 나가주세요.”
‘이런 가증스러운 것 때문에 우리 재혁이가 나한테…….’
고작 재희한테 손 좀 올렸기로서니 우리 귀한 재혁이가 저를 화난 표정으로 대하며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게 아직도 충격이었다.
여기서 한 번만 더 재희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함부로 대한다면 재혁이는 정말로 영영 자신을 보지 않을 것 같았다.
재혁도 재혁이지만 무엇보다 무혁이란 존재 때문에 재희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간 나이는 헛먹지는 않은지라, 연희동에서 재희가 제게 보인 태도에서 무혁이 얼마나 재희를 귀하게 여기는지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때 저도 모르게 벼루를 재희에게 던졌지만, 재혁이 대신 맞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만약 그때 재희가 벼루에 맞았다면 무혁이 가만있지 않았을 터였다.
살 만큼 산 할머니조차 무혁은 껄끄럽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좋다. 나도 우리 귀한 손주 사위 집에 오래 있고 싶지 않구나.”
재희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끝까지 인정하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게 이 집에서 자신을 지워버리는 할머니가 씁쓸했다.
“하지만 이건 알고 가야겠다. 우리 재혁이, 어디다 감췄느냐.”
“재혁이요?”
갑자기 재혁의 이름이 언급되자 재희가 되물었다.
“시치미 떼지 말거라. 네가 우리 재혁이 꼬드긴 것 다 알고 있다!”
“무슨 말씀이세요? 재혁이가 지금 무슨 상관이에요?”
“허. 내가 너 어릴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래서 싫었다. 예나 지금이나 영악하기 그지없어.”
할머니는 오 일째 들어오지 않는 재혁이 너무 걱정되었다.
신채근에게 말해봐도 그는 무관심했고, 홍연화 역시 대답을 피할 뿐 답을 해주지 않았다.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영산댁에게 물어봤지만, 영산댁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여러 차례 재혁에게 전화를 걸어도 수신 거부로 넘어갔다.
재혁의 친구들도 할머니 전화를 수신 거부했는지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이도 저도 못 한 채 결국 할머니는 재희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네가 우리 재혁이 꼬드겨서 가출하라고 시키지 않았느냔 말이다!”
할머니의 억지에 재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재혁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렇게 무작정 집으로 찾아온 할머니의 억지에 기가 막혔다.
“할머니. 재혁이는 애가 아니에요.”
“뭐라고?”
“재혁이는 성인이에요. 그런 애가 제 말만 듣고 가출할 리도 없거니와, 이 일은 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말을 마친 재희가 옆으로 비켜섰다.
할머니의 날 선 시선이 닿았지만, 재희는 담담한 얼굴로 마주 보았다.
“이만 나가주세요.”
“그때처럼 네가 재혁이가 나가는 걸 알고도 방치한 건 아니고?”
조금 전까지 흥분했던 기색은 가시고 차분해진 할머니의 말에 재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제 아비 사랑 한번 독차지하겠다고 어린 재혁이가 나가든 말든 모른 척 한 거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건……. 그건 재혁이가 저 몰래 나간 거예요.”
겨울.
어린 재혁이 맛있는 거 먹고 싶다고 나가자고 졸랐다.
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나가자고 했는데도 재혁은 막무가내였다. 집에 어른이 없어서 재희는 안 된다고 거절했고, 심통이 나긴 했지만 재혁은 그렇게 포기한 줄 알았다.
“거짓말 말거라. 우리 착한 재혁이가 그럴 리가 없다. 아니, 사실이라도 쳐도 스스로 나간 거니 모른 척하긴 쉬웠겠구나.”
“할머니.”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 못할 건 뭐냐. 재혁이가 너무 착해서 네 말을 잘 듣는 모양인데, 우리 재혁이 내놓거라.”
재혁이가 제게 화난 표정으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받았던 충격이 울분으로 바뀌며 울컥 올라왔다.
할머니는 재희의 양팔을 붙잡고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우리 재혁이 어디로 빼돌렸느냐! 말하거라! 다시는 내 얼굴 보지 말라고 네가 시킨 게지? 그래서 우리 재혁이가 그런 게지?”
할머니의 우악스러운 손에 흔들리면서도 재희는 아무런 반항을 할 수 없었다.
사라진 재혁이, 황량한 빈 거리, 재혁이를 찾으려고 뛰어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얼른 우리 재혁이 돌려……!”
쉴 새 없이 재희를 흔들던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우악스러운 커다란 손이 재희를 끌어당기며 할머니를 밀쳐서 떼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비틀거리며 한발 물러서고는 난데없는 방해꾼을 노려보던 할머니의 시선이 금세 풀렸다.
“재희야.”
방해꾼, 무혁이 굳어 있는 재희를 품에 안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멍하니 서 있던 재희가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무혁 씨.”
안심이 됐는지 덜덜, 갑자기 재희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입술만 달싹일 뿐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 재희를 보던 무혁이 그대로 아내를 돌려세워 제 품에 안았다.
할머니를 보지 못하도록.
제 품 안에서 덜덜 떠는 작은 몸에 무혁의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소, 손주사위 왔는가.”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한층 누그러진 할머니를 보는 무혁의 눈동자는 차가운 분노로 짙게 가라앉았다.
“지금 아내가 힘들어 보이니 모셔다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할머니의 대답에 무혁의 미간이 대번에 좁혀졌다.
무혁은 최대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 말 좀 듣게. 지금 일은 다 오해야. 차분히 설명해 줄 테니.”
“나가란 말 안 들립니까.”
무혁의 기세에 눌린 할머니는 서둘러 짐을 챙겨 집을 나갔다.
허겁지겁 나가는 할머니를 노려보던 무혁의 시선이 이윽고 재희에게 닿았다.
“재희야.”
재희의 얼굴을 보기 위해 품에서 떼어놓으려던 무혁이 멈칫했다.
재희가 무혁의 옷자락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절박한 행동에 무혁은 다시 가만히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떨림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재희가 먼저 무혁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무혁은 순순히 품에서 놓아주며 재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등장으로 그 짧은 시간 안에 얼굴이 초췌해진 재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무혁 씨. 식사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렇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직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는 재희를 무혁이 안아 들었다.
놀라 버둥거릴 줄 알았던 재희는 순순히 무혁에게 안겼다. 무혁은 재희를 소파에 앉힌 뒤 물컵을 내밀었다. 재희가 컵을 받아서 들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오늘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온다고 했어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아니, 좀 더 이른가. 지금 몇 시…….”
아직도 조금 전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한 반응에 무혁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에게서 연락이 왔어.”
평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던 경자가 윤 비서에게 먼저 연락해 왔다.
윤 비서에게 보고받은 무혁이 전화를 받자 경자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게 가정 사정인데 제가 나서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모님이 너무 신경 쓰여서요.”
할머니의 방문과 재희.
경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무혁은 당장 모든 일정을 미루고 곧바로 달려왔다.
그런데 도착해서 본 모습은 할머니에게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 재희였다.
그 모습을 목도한 무혁이 그 자리에서 눈이 돌아가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인내심이었다.
“그랬는데 지금 내가 본 게.”
무혁이 재희의 옆에 앉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가 화를 겨우 억누르고 있다는 걸 보여주듯 손등에 핏줄이 섰다.
재희는 여실히 느껴지는 무혁의 감정에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무혁이 돌아보자 재희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무혁은 낮은 한숨을 흘리며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우선 쉬자. 그리고 오늘 일은 나중에…….”
“재혁이 때문에 온 거예요. 할머니.”
“…….”
“무혁 씨랑 처음 만났던 그 겨울에…….”
재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혁은 묵묵히 그런 재희를 기다려주었다. 재희는 괴로워 보였지만, 무혁은 알 수 있었다.
재희가 용기 내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재혁이가 저 몰래 집을 나간 적이 있어요.”
재희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 재혁이가 나간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