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재희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네. (100/128)


#100화. 재희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네.
2022.10.13.


무혁과 재희의 집에 그대로 끌려온 재혁은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경자가 시원하게 냉침한 차를 테이블 위에 두고 갔으나, 아무도 선뜻 손을 대지 않았다.

재희는 팔짱을 낀 채 재혁을 응시하고 있었고, 무혁은 밀렸던 업무를 태연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재혁은 지은 죄가 있는지라 가시방석 같은 이 침묵을 견뎌내고 있었다.

재희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정리가 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재혁을 찾았다며 무혁이 식사를 들기도 전에 나가려 하자 재희가 붙잡았다.
 


“저도 같이 가요.”


“여기 있어.”


“가만히 기다리는 게 더 속이 타서 그래요.”

 
안 그래도 바쁜 무혁이 재혁 때문에 일정을 미루자 재희는 미안해서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무혁은 그런 재희에게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라며 다독여 주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재혁을 찾으러 가면서 재희는 마음이 복잡했다.

다행인 건 그날 무혁에게 질려버린 건지 할머니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 할머니 성격상 전화나 문자를 했을 테지만, 이미 수신을 차단한 상태여서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는 재혁을 차 안에서 지켜보던 재희는 화가 났다.

저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철없는 동생이 원망스러웠다.


“재혁이, 너!”

원망스럽고 미워서 화를 내려던 재희는 밭일하느라 조금 탄 재혁의 얼굴을 보자 차마 더 화를 내지 못하고 말끝이 흐려졌다.


“누나. 미안해.”

재혁이 머쓱하게 웃었지만, 재희는 전혀 웃지 않았다.

무혁이 결재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추는 것 없이 똑바로 얘기해라.”

“그럴 거예요. 제가 누나한테 감출 게 뭐 있다고.”

“나중에 장인어른과 할머님에게도.”

“네?”

재혁의 되물음에도 무혁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지러운 속을 정리한 재희가 물었다.


“왜 가출한 거야?”

한층 누그러진 누나의 목소리에 재혁의 표정이 환해졌다가, 자신을 보는 무혁의 무거운 시선에 찔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재혁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가출이라니. 그냥 친구 집에 가 있었을 뿐이야.”

“말도 없이?”

“할머니에게 쪽지 남기고 왔어.”

쪽지…….

재희는 기가 찼는지 재혁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럼 할머니 전화는 왜 피한 거야.”

“시끄러워지니까.”

“…….”

“할머니는 전화를 한번 받아주면 계속하셔. 집에 들어올 때까지 계속. 그게 너무 피곤했어.”

“그게 가출한 이유야?”

“아냐. 할머니는 나한테 거는 기대가 너무 커. 그게 내내 답답했고 부담스러웠어.”

“……또?”

“그러니까 이제 좀 할머니랑 멀어지고 싶었어.”

“그게 다야?”

재혁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재혁이 할머니에게 정이 떨어진 건 4월 23일, 재희 생일 때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할머니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어.”

“왜?”

“누나 생일 때, 할머니가 누나한테 벼루를 던졌으니까.”

탁.

무혁의 손에 들려있던 서류뭉치가 테이블 위에 거칠게 던져졌다.

재희가 깜짝 놀라 무혁을 돌아봤다. 그는 마치 재희에게 벼루를 던진 당사자가 재혁인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로 재혁을 노려보았다.


“다시 말해봐.”

그 기세에 눌린 재혁이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그의 화를 여실히 보여주듯 꽉 다문 턱과 목덜미에는 핏줄이 한껏 서 있었다.


“누구한테 뭘 던졌다고?”

“할머니가 누나한테 벼루를…….”

재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혁이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연희동에 쳐들어갈 기세에 재희가 서둘러 무혁의 손을 잡아당겼다.


 


“무혁 씨. 전 괜찮아요.”

“…….”

“그때 재혁이가 막아줘서 안 맞았어요. 오히려 절 막아주느라 재혁이가 다쳤어요.”

“왜 말 안 한 거지?”

“그건…… 별로 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벼루에 맞을 뻔했는데 말할 일이 아니라고?”

끝없이 치솟는 화를 억누르는 무혁을 보던 재희가 몇 번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처음 맞는 생일이었으니까요.”

재희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에 무혁의 커다란 몸이 움찔했다.


“무혁 씨와 처음 맞는 생일인데 나쁜 일은 되도록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즐겁고 행복한 생각만 하기에도 모자랐으니까요.”

무혁은 복잡한 눈으로 재희를 보다,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분노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지,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눈치 보던 재혁이 무혁과 눈이 마주치자 꼬리를 말았다.

저렇게 무시무시한 기세로 앉아있는데 동요하지 않는 재희를 보며 재혁은 내심 누나에게 감탄했다.

화를 가라앉히듯 무혁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버리자, 재희가 그런 그의 팔을 가볍게 다독여 주었다. 이윽고 재희가 재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할머니 얼마 전에 여기 찾아오셨어.”

“뭐?”

“내가 널 꼬드겨서 가출하게 만든 거로 믿고 계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할머니 진짜!”

이번엔 재혁이 흥분해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희는 그런 재혁이를 차분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어?”

“네가 제대로 말씀드리지 않았으니까.”

“뭐, 내가 뭘. 할머니한테 쪽지 남겼어.”

“그게 정말 네가 할 일 다 한 거야?”

“…….”

“정말 그걸로 할머니가 이해하셨을 거로 생각했어?”

“그건, 아니지만…….”

당장은 힘들어도 연락을 어느 정도 무시하고 그걸 몇 번 반복하다 보면 할머니도 포기할 거로 재혁은 생각했다.

곧 그게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재희와 무혁이 찾아올 때 깨달았지만.

재희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할머니 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제대로 매듭지어.”

“그렇게 하려고 했어! 근데 내가 어딜 가든 할머니는 친구들한테까지 전화하셔. 내가 그러지 마시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도 소용이 없었어. 그러니까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

“…….”

“내가 해외로 나가도 아마 그러실 거야.”

재혁이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릴 때는 마냥 좋았던 할머니의 기대와 사랑이 커가면서 점점 버거워졌다. 자신이 잘못하면 그 화살이 재희에게 돌아가는 걸 보는 것도 괴로웠다.


‘근데 이게 뭐야. 결국 나 혼자 뻘짓한 거잖아.’

재혁이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재혁이 나름 방법이라고 생각한 가출도 소용없게 되었다. 결국 할머니는 누나를 찾아갔고, 누나가 할머니에게 험한 소리를 들었을 거로 생각하니 재혁은 눈앞이 깜깜했다.


“결국, 어리광을 부린 거군.”

재희와 재혁의 시선이 무혁에게 향했다.


“누가!”

자신의 반항을 어리광으로 치부한 무혁을 반항 섞인 시선으로 노려보던 재혁은, 무혁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금세 꼬리를 말았다.


“…… 지금 누가 어리광을 부렸다고.”

그래도 못내 억울한지 재혁은 웅얼거렸다.


“그래도 죄송해요. 바쁜 매형까지 이 일에 끌어들여서.”

“정신 못 차렸군. 정말 미안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걸 보니.”

“무슨…….”

재혁의 말도 무시한 채 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출장에 한 명 더 데려갑니다. 신재혁입니다.”

재혁의 입이 벌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인식을 못 하는 듯했다.

전화를 끊으며 무혁이 재혁을 돌아봤다.


“여권은 있겠지.”

“어, 네? 네.”

“이번 두바이 출장, 너도 간다.”

당황한 재희가 무혁의 손을 잡았다.

무혁이 익숙하게 깍지를 끼자 더욱 당황한 재희가 손을 빼려 했지만, 무혁은 놓지 않았다.

결국, 재희는 의미 없는 실랑이는 그만두기로 했다.


“무혁 씨. 아니죠? 정말 재혁이 이번 출장에 데려갈 거예요?”

무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재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이런 개인적인 일에 회사 일을 끼울 순 없어요.”

“내 개인적인 업무야. 가서 보조해줄 사람도 필요하고.”

“무혁 씨.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처남이 결정해. 낙하산 소리 들어도 갈 건지, 아니면 여기 남아 있을 건지.”

재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혁의 제안은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출장에 데리고 가겠다는 무혁의 의중은 알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절호의 기회였다.
할머니와 떨어질 기회.

할머니가 원망스러운 재혁이었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할머니한테 끌려다닐 수만은 없었다.

치열하게 고민하던 재혁이 이내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낙하산 소리 들어도 좋아요. 갈게요.”

“재혁아!”

“누나. 나 더 이상 누나한테 폐 끼치기 싫어. 지금까지 충분히 나 때문에 괴로웠으니까, 이제 그러지 마.”

“…….”

“그리고 나 매형 좋아해. 잊었어? 나 매형 가장 존경하는 거.”

씩 웃는 재혁을 보는 재희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결정했다면 이번 일 확실하게 처남 선에서 정리하도록 해.”

“네?”

“처남이 저지른 일 모두.”

재혁이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엔 제대로 정리할게요.”

“그리고 체력을 좀 더 길러두는 게 나을 거다.”

재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무혁을 바라봤다.


“말하지 않았던가. 재희 눈물값은 비싸다고.”

무혁의 의중을 알 길이 없는 재혁의 어리둥절함을 더욱 깊어갔다.

* * *

대표실.

신채근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조금 전에 참석했던 회의에서 임원들에게 시달린 탓이었다.
 


“어떻게 합니까. 이 프로젝트에 모두 기대를 걸었는데 날아가 버렸습니다.”


“공사가 중단되면서 손실한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다가 모두 다 죽습니다.”

 
차라리 사위인 무혁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신채근은 그럴 수 없다며 못을 박았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회의는 끝나고 말았다.

피로한 상태로 고민에 빠져있는데, 비서가 손님 방문을 알렸다.


-대표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KJ 건설의 강무혁 상무님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방문에 신채근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방문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커다란 덩치와 주변을 압도하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무혁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서 오게.”

몇 번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사위였다. 그러나 신채근을 보는 무혁의 시선은 마치 남을 보듯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리와 앉으시게.”

신채근의 권유에 무혁이 자리에 앉았지만 서로 말이 없었다.

비서가 두고 간 차가 적당히 식을 때쯤 무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근 공을 들이시던 사업이 중단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이 자네 귀에까지 들어갔나.”

의외로 담담한 신채근의 반응에 무혁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답답한 현재 그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듯 신채근의 낯빛은 어두웠다.


“맞네. 하지만 곧 이겨낼 거네.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한 번쯤은 이럴 때도 있으니.”

“길면 두어 달. 짧으면 한 달.”

잔을 들려던 신채근의 손끝이 허공에 멈췄다.

찰나였지만, 무혁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소리인가.”

짐짓 모른 척 신채근이 물었지만, 무혁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이 회사가 버틸 수 있는 시간 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다른 이도 아닌 사위가 자신의 회사의 남은 시간을 지적하자, 신채근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왜 자금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

“재희와 제가 결혼할 때 요청하지 않았던 자금 지원, 지금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무혁이 원해서 결혼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집안끼리 엮인 결혼이기도 했다.

그런만큼 신채근이 충분히 자금 지원을 요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토록 회사가 궁지에 몰렸는데도 입을 꾹 다문 신채근의 의중이 무혁은 궁금했다.

신채근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무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재희는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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