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할머니의 전화 (97/128)


#97화. 할머니의 전화
2022.10.03.


재희는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태블릿PC 화면 속 글을 몇 번이나 읽었지만,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이름과 정보가 빼곡한 태블릿PC 화면을 재희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왜 이걸 무혁 씨가.’

경영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재희는 얼추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신채근의 회사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기사 속 아버지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한층 더 늙어 보였다.

한참 동안 아버지를 보던 재희가 괴로운 얼굴로 이내 화면을 꺼버렸다.


“재희야.”

씻고 안방으로 들어온 무혁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재희를 곁으로 다가갔다.


“무혁 씨. 이게 뭐예요?”

재희가 태블릿PC 화면을 켜며 무혁에게 내밀었다.


“왜 아버지 회사에 대한 자료가 여기에 있어요?”

당황할 거란 예상과 달리 무혁은 태블릿PC를 받아들고 재희 옆에 앉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장인어른의 회사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야.”

“혹시 아버지가 무혁 씨한테 도움을 요청했어요?”

“아니.”

재희의 불안한 마음을 단번에 짧게 부정하곤 무혁은 태블릿PC 화면을 꺼버렸다.


“어쨌든 같은 업계인 이상 여기저기서 정보는 들어오게 되어 있어.”

“…….”

“하루 이틀 된 일은 아닌 것 같아. 이 정도면 자금을 막기에도 급급했을 건데 이제야 내 귀에 들어온 거라면 몰릴 대로 몰렸단 소리지.”

전보다 늙은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 집에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고, 재혁도 아무 말이 없어서 꿈에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재희가 입을 열었다.


“저랑 이젠 상관없어요.”

“그래.”

“그때 전 다시는 그 집과 안 엮일 거라고 다짐했어요.”

“그래.”

“무혁 씨가 그 집과 엮이는 것도 싫구요.”

“그래.”

무혁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단 재희 자신에게 한 말에 가까웠다.

무혁은 재희에게 자잘한 키스를 흩뿌리며 대답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재희는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쓰…….”

재희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숨결 하나라도 놓칠세라 무혁이 깊게 입 맞춰왔기 때문이었다.

단번에 침대에 눕혀진 재희는 무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깊은 입맞춤에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가느스름하게 뜬 재희의 시선이 태블릿PC로 향했다.

짙은 시선으로 재희를 응시하며 욕심껏 입술을 탐하던 무혁의 미간이 못마땅함으로 좁혀졌다.

재희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혁이 손으로 태블릿PC를 밀어냈다.

툭, 태블릿PC가 바닥에 떨어지자 그제야 재희의 시선이 무혁에게 닿았다.

살짝 입술을 떨어뜨린 무혁은 다시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나한테 집중해.”

“피곤할 텐데.”

그 말에 반박하듯 무혁은 가볍게 재희의 목덜미를 입술로 문질렀다.

뜨거운 감촉과 간지러움에 재희가 어깨를 한껏 움츠리자, 무혁은 이를 세웠다.

흠칫, 굳은 재희의 귓가에 기분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피곤해지겠지.”

“그러니까 얼른 일찍…….”

“재희, 네가.”

짧은 말 속에 든 의미를 눈치챈 재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무혁은 재희의 양손을 한 손으로 쥐고 머리 위로 올렸다. 재희가 바둥거리며 손목을 빼내려 하자, 무혁은 강하지만 부드럽게 다시 틀어쥐었다.

벗어나길 포기한 재희는 위에서 누르는 적당한 무게에 얕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마치 짐승에게 사냥당한 작은 동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그런 밤이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신채근은 피로에 찌든 얼굴로 퇴근했다.

최근 자금 사정이 최악으로 치닫는 와중에 진행하던 프로젝트까지 엎어지니 순식간에 회사가 크게 휘청였다. 어떻게든 바로 세우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지만, 자금을 구하기가 요원했다.

임원진들은 재희가 KJ 그룹에 시집을 갔으니 지원을 요청해 보면 어떠냐고 말했지만, 신채근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도 임원진에게 시달린 신채근은 크게 지쳐 있었다.


“아범아!”

현관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할머니가 달려 나왔다.

할머니는 신채근의 양팔을 붙잡고 거의 숨넘어갈 것처럼 애타게 소리쳤다.


“우리 재혁이가 사흘째 안 들어온다!”

신채근은 오자마자 저를 붙잡고 한탄하는 어머니를 지친 눈으로 잠시 보다 고개를 저었다.


“학교 과제로 늦는 모양이죠.”

“아니다. 아니야. 지금은 과제 기간도 아니거니와 내 전화도 안 받는다.”

“어머니.”

“요 며칠 외박도 잦더니, 집에 들어오면 날 보지도 않는다. 아이고. 아이고.”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신채근이 달래주려 했지만, 할머니는 듣지도 않았다.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냐? 재혁이 친구들한테 전화해 봐도, 다들 모른다고만 한다. 아이고, 우리 재혁이. 어쩌면 좋으냐.”

“어머니.”

“저번에 재희, 고것이 재혁이를 꼬드기는 것 같더니 이번에도 수를 쓴 모양이다.”

할머니의 말에 신채근의 눈가에 짙은 피로감이 쌓였다.

신채근은 인내심을 발휘해 화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재희가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럴 리가 없긴! 저번에 나한테 눈 똑바로 뜨고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자기가 재혁이를 이용한 거 맞다고 하더라. 얌전한 얼굴로 뒤에서 우리 귀한 재혁이를 꼬드긴 게 분명해. 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일 당장이라도 고것한테 그냥!”

“어머니!”

신채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할머니는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귀한 아들이 저에게 소리를 지른 게 처음이라 충격이 큰 듯했다.


“재혁이, 어린애 아닙니다. 제 딴에도 다 생각이 있을 테니 놔두세요. 상관없는 재희도 이제 놔두시고요!”

“어떻게 놔둬! 넌 아비가 돼서 우리 재혁이 걱정도 안 되냐?”

“피곤합니다. 그만하시죠.”

“아비야, 아비야!”

신채근은 뒤에서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외면한 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아이고. 아들이, 내 아들이 나를…….”

신채근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들어가 버리자 할머니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경자는 흥얼거리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 4월 23일을 기점으로 재희와 무혁의 사이가 어색해 보였다. 집 분위기가 무거운 것도 무거웠지만, 사이좋은 부부가 이대로 사이가 틀어질까 경자는 내심 마음을 졸였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둘의 사이가 좋아지고 예전처럼 돌아가니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예전엔 참 둘이 부부치고는 어색해 보였는데 말이지.’

처음엔 신혼이어서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 둘의 사이는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밀해 보였다. 그렇다고 정으로만 사는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서로에게 푹 빠진 것처럼 보였다.

보는 이마저도 행복해질 정도로 달콤한 부부의 모습에 경자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두부를 썰어 냄비에 집어넣었다.

국이 막 끓어오를 때 뒤에서 밝은 재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사모님.”

“제가 뭐 좀 도와드릴까요?”

“아유. 또 그러신다. 앉아 계세요. 제가 할 테니.”

“도움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재희가 환기를 위해 베란다 문을 여는 모습을 보며 경자는 엄마 미소를 지었다.

전과 똑같은 집인데 이전보다 훨씬 더 밝아진 느낌이었다.


‘어머.’

옷을 갈아입고 나온 무혁이 조용히 재희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혁이 가만히 재희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잠깐 놀란 듯 재희가 움찔했지만, 이윽고 무혁을 올려다보며 웃음 지었다.

무혁은 그런 재희를 마주 보며 다른 손으로 가볍게 볼을 만져주었다.

재희는 그의 커다란 손에 가만히 뺨을 비비고는 곧 어딘가를 가리키며 조잘대기 시작했다.

무혁은 그런 재희의 말에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재희가 돌아보자 무혁이 갑자기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순식간에 재희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자 경자가 얼른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유. 나 좀 봐.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겠네.’

경자는 마저 상을 빠르게 차려내고는 조용히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래. 저게 바로 신혼부부지. 예쁘다. 예뻐.’

마치 딸자식 내외를 보는 기분에 경자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아주머니 안 계시네요.”

한창 대화를 나누다 식탁으로 돌아온 재희는 경자가 보이지 않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볼일 보러 나가셨을 거야.”

“이 시간에요?”

“아마도.”

대충 눈치챈 무혁은 별다른 말은 보태지 않았다.

대신 늘 그랬던 것처럼 의자를 빼주자 재희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무혁이 컵에 물을 따라 재희에게 내밀며 물었다.


“미셸은 프랑스로 돌아갔어?”

“네. 아마 다시 올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에이전트랑 얘기 나누는 것도 그렇고 정리할 것도 있으니까요.”

“섭섭하겠네.”

“다시 볼 거니까요. 그보다 도화가 하도 울어서 난감했어요.”

며칠 전, 프랑스로 돌아가기 싫다는 도화를 달래느라 세라와 케빈, 그리고 재희는 한참 진땀을 빼야 했다. 결국 재희가 얌전히 프랑스에 다녀오면 예쁜 공주님을 그려주겠다고 도화와 합의한 거로 겨우 달랠 수 있었다.


“미셸이 올 때까지 새로 팀을 짜기로 했었나.”

직원 명단이 이미 넘어와 늦게까지 고심하는 재희를 무혁은 종종 봤었다.

미셸이 오기 전까지 재희는 새로 팀원을 뽑아서 본격적인 기획 일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무혁이 출장 가고 난 뒤라 조금은 가볍게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역시 무혁을 몇 달이나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가끔씩 우울해지기도 했다.


“네. 그리고 퇴근하면 전 노을 서점에 있으려구요.”

“노을 서점에?”

“이젠 제가 여기저기 손질해야 하니까요.”

그 말에 무혁의 미간이 단번에 좁혀졌다.

재희가 손수 손질한다고 하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만둬. 전문 관리인이 있으니.”

“무혁 씨.”

“재희가 힘들게 관리할 필요 없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재희는 가만히 무혁의 손등을 감쌌다.

무혁이 시선만 올려 쳐다보자, 재희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재희야.”

“무혁 씨가 저한테 준 선물이니까 제 손으로 가꾸고 싶어서요.”

“…….”

“우리 노을 서점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할거예요. 힘들지 않아요.”

순하지만 고집스러운 시선에 무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한숨을 흘렸다.


“힘들다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해.”

“물론이에요. 우리 이제 감추는 거 없기로 했잖아요.”

기쁜 듯 웃는 재희를 보며 무혁은 가만히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작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이 온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긴 할까.

겨우 되찾은 이 평화로운 일상이 전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오는데 참 많이도 돌아왔다고 무혁은 생각했다.

무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식탁을 돌아 재희 앞에 섰다.


“무혁……!”

갑자기 무혁이 재희를 안아 들었다. 때문에 재희는 비명을 삼키고는 반사적으로 무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매달렸다. 무혁이 재희의 볼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속삭였다.


“타이, 매줘.”

무혁의 목소리에서 그의 욕망을 읽어낸 재희는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채로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타이, 제가 매줄게요.”

무혁과 함께하는 시간은 중독성이 강한 달콤함과도 같아서, 재희는 거부할 수 없었다.

재희가 어렵게 꺼낸 답에 무혁은 걸음을 성큼 옮겼다.

무혁과 재희가 나온 건, 출근 시간을 어긴 무혁이 걱정된 윤 비서가 전화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 * *

덜컹, 노을 서점 문이 열렸다.

처음 온 사람처럼 재희는 기대에 찬 얼굴로 노을 서점에 발을 디뎠다.

여전한 모습의 노을 서점에 발을 들이자 마치 오래된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조만간 이곳에 희수와 민석 등의 지인들을 초대하기로 마음먹은 재희가 청소하기 위해 팔을 걷어 붙였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무심결에 발신인을 확인한 재희의 얼굴이 굳었다.

이미 오래전에 번호를 지웠지만,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잊고 싶어도 잊힐 리가 없는 할머니의 번호였다.

떨리는 눈으로 한참이나 휴대전화 액정을 보며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재희는 이내 수신을 거부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할머니는 끈질기게 전화를 했다.


“대체 왜.”

곧바로 수신 거부 처리한 재희가 그대로 번호를 차단했다.

모처럼 기분 좋은 날을 망치고 싶지 않은 않아, 재희가 청소에 더욱 집중했다.

노을 서점은 넓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구석구석 청소하던 재희는 무혁 전용 벨 소리가 들리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네. 무혁 씨.”

-식사는?

청소하느라 점심도 깜박한 걸 깨달은 재희가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아직이요. 청소하다 보니 이 시간이 되었네요.”

-왜 굶는 거야.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무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때를 조금 놓친 것뿐인데, 무혁의 반응에 재희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소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랬어요. 곧 먹을 거예요.”

-때를 놓칠 정도로 청소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라면 전문 관리인한테 맡겨.

“알았어요. 혼자 하기 힘들면 그때 말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무혁 씨는요?”

-곧 미팅이 있어서 그때 먹을 예정이야.

“그럼 잘 다녀와요.”

-무슨 일 있어?

전보다 조금 더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인지, 무혁이 전보다 더 귀신같이 재희의 미묘한 음성에 반응했다.


“그게.”

재희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할머니가 제게 전화했었다는 것을 무혁에게 말해야 할까 하는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재희야.

짧지만 힘이 되는 무혁의 목소리에 재희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수신 거부했지만, 계속 전화가 와서 영 신경이 쓰이네요.”

-무슨 일 생겼을까 봐?

“네. 다시는 그곳에 안 가기로 했지만, 그렇게 칼같이 자를 수가 없는걸요.”

-오늘 좀 더 일찍 갈게.

“응. 기다릴게요.”

재희는 이제 무혁을 배려하느라 속마음을 감추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일까. 전보다 더 마음이 편해진 느낌이었다.

전화를 끊은 뒤 재희는 점심도 건너뛰고 마저 노을 서점 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으면 자꾸만 할머니가 생각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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