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박정수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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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박정수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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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박정수의 최후
2022.09.29.
[다음 소식입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범죄 조직 단체를 배후로 둔 클럽이 멀쩡히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클럽을 드나드는 이들 중에는 각계각층 인사의 자녀들도 포함되어 있어 더 큰 혼란이 일 것으로 야기됩니다. 이에 경찰은 특별 수사팀을 꾸려 진상 파악에 나섰습니다. 이 소식을 최초로 제보받은 오민석 기자를 연결하여 자세한 내용을 들어보겠습니다.]
TV 화면 안은 부산스러웠다.
각 방송국에서 몰린 기자들, 연행되는 범죄 조직, 피의자를 입건하는 형사들로 아수라장이었다.
플래시가 팡팡 터지는 가운데 고개를 푹 숙이고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눈을 부라리며 취재진을 노려보며 가는 이도 있어 그야말로 정신없는 현장이었다.
한진근과 박금호가 손을 쓴 건지 한유라와 박정수의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자의 가족이라고 소개한 네티즌이 한 커뮤니티에 박정수가 운전기사와 팀원들에게 갑질하는 모습을 게시했다. 누가 봐도 박정수임이 확실한 영상과 사진이 올라갔던 게시글은 몇 분 뒤 삭제되었지만, 네티즌의 손에 의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시발점으로, 박정수의 갑질로 인해 퇴사한 직원이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서 논란이 더 크게 확산되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느꼈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때마다 이건 아니다 싶었거든요. 평소에도 평판이 안 좋았지만, 어쩌겠습니까. 먹고 살아야 하는데요.]
제보를 받은 기자가 피해자와 인터뷰하면서 논란은 가속화되었다.
기사를 본 사람들은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박정수 앞에 무릎 꿇은 모습을 보고 더 분노했다.
실시간 검색어에 박정수와 함께 박금호의 이름까지 오르내렸다.
이 사건의 여파로 회사 주식이 폭락했다.
결국, 박금호가 기자회견까지 열어 사과했지만, 여전히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에이 씨!”
박정수가 욕설을 내뱉으며 보고 있던 TV를 꺼버렸다.
강원도의 한 모텔.
운전기사였던 이명수가 퇴사할 때까지만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5월의 연회에서 끌려 나오기 무섭게 이명수로부터 고소장이 도착했다.
박금호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대노했고, 그날 박정수는 실컷 얻어맞았다.
그렇게 좀 지나가나 했더니 갑자기 클럽 하데스 기사가 터짐과 동시에 유라가 검찰에 송치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도망쳐 온 곳이 여기였다.
“이게 다 한유라 탓이야. 강무혁 탓이고, 신재희 탓이야.”
박정수는 눅눅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다.
TV에서 본 피의자가 곧 자기가 될 거란 불안감에 미칠 것 같았다.
이번엔 가볍게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었다. 박정수는 그야말로 인생의 끝을 보고 있는 공포에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쉼 없이 중얼거렸다.
“난 잘못 없어. 암. 그렇고말고. 일단 아버지에게 빌어보자.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데, 날 버리시겠어?”
이미 박금호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그래도 박정수는 조금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무리 사고를 쳐도 아들인데, 박금호가 어떻게 해서라도 방어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에 박정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쥐새끼처럼 구석에 숨어들었다.
잠시의 적막 뒤에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 비서입니다. 회장님의 지시로 왔습니다.”
신 비서라면 박금호의 수행비서였다.
박정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그렇지. 아버지가 날 버리실 리가 없어.’
겁에 질려 움츠렸던 박정수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이런 후진 모텔에서 내가 얼마나…….”
박정수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신 비서 뒤에 선 남자 두 명 때문이었다.
“서울 경찰청 이진득 형사입니다. 박정수 씨. 클럽 하데스 사건으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박정수가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는 사이, 형사들이 단번에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뭐, 뭐? 이것들이! 이거 안 놔?!”
뒤늦게 정신 차린 박정수가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형사들의 손에 끌려가면서 박정수가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야! 신 비서! 뭐라도 말해 봐! 너 아버지가 보냈다며! 나 데리러 온 거 아니냐고!”
박정수가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절박하게 소리쳤지만, 신 비서는 냉정하게 그 동아줄을 끊어버렸다.
“회장님께서 부자간의 연은 여기서 끝이라고 하셨습니다.”
“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박정수를 보며 신 비서는 말을 이었다.
“가서 정당한 죗값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리가!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는 게 말이 돼? 이거 안 놔?! 내가 너희들 모조리 다 죽여 버릴거야아악!”
신 비서는 끌려가는 박정수를 바라보다, 곧 문을 닫아버렸다.
모텔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신 비서의 손에는 회사 측에서 박정수에게 보낼 예정인 각종 소송장이 들려 있었다.
* * *
한진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뉴스에는 한유라의 실명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한유라와 박정수의 기사로 세상이 한창 떠들썩했지만, 노을 서점은 다른 세상처럼 조용했다.
“우와. 오랜만에 온다. 어쩜 이렇게 하나도 안 변했냐.”
재희의 초대로 노을 서점에 놀러 온 희수가 감탄을 터뜨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학창 시절 종종 오곤 했던 노을 서점이 다시 문을 열자 희수는 감격에 젖었다. 한참을 구경하던 희수가 소파에 앉으며 미리 타두었던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니까 네 남편이 여길 생일선물로 주었다고?”
“응.”
“대단하다. 세상 어느 남편이 아내에게 이런 걸 선물이라고 사줘?”
“그런가.”
재희가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이어진 희수의 말에 멈칫했다.
“역시 그날 내가 잘못 본 거였어.”
“응?”
재희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희수가 아차 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말이야. 뭘 봤단 거야?”
“아무것도 아니래도. 내가 실언했어.”
“희수야. 듣고 싶어.”
끄응, 희수는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재희의 생일선물을 사러 갔을 때 목격했던 장면을 어렵게 끄집어냈다.
희수가 중간중간 눈치를 봤지만, 생각 외로 재희는 담담했다.
희수가 말을 끝맺자 재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가 그날 이상하게 굴었구나.”
“내가 함부로 말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입 다물었고.”
“응. 고마워. 그때 들었다면 나도 좀 충격받았을 것 같아.”
생각보다 재희가 편안한 반응을 보이자 희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화 안 나?”
“응. 어차피 무혁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아마 한유라의 계략이었을 터였다.
희수가 그 광경을 목격한 건 당연히 계산에 넣지 않았겠지만, 유라는 아마 그때 무혁과 친밀감을 쌓으려고 했던 것 같았다.
“아아, 너무 편하다.”
재희의 반응에 안심한 희수가 털썩, 소파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만족한 얼굴로 소파에다 얼굴을 문지르던 희수가 생각났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나저나 요즘 클럽 하데스랑 갑질 사건으로 온 뉴스가 난리야. 박정수야 터질 게 터진 느낌이라 속 시원한데, 의외인 건 대한 백화점의 딸이야. 거기 딸 되게 평판 좋았잖아. 그런데 그 딸이 그렇게 크게 사고 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것도 해외에서 가족들 눈 피해서 말이야.”
“그러게.”
재희가 무심하게 대꾸했지만, 희수는 할 말이 많은 모양인지 쉴새 없이 떠들어댔다.
“대한 백화점의 한진근 회장이 고개 숙여 사과까지 했잖아. 대한 백화점 주식도 뚝뚝 떨어지고 우리 회사도 아주 난리였지. 우리 대표님이 한진근 회장 하면 아주 진절머리를 냈었는데. 비위 맞춰주기 힘들다고.”
희수 역시 맺힌 게 많은 모양인지 목소리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기사는 막았는지 처음에 다들 몰랐지. 누군지 추측하는 와중에 그 실체를 알린 게 박정수라며. 나 진짜 놀랐다니까. 박정수가 거기서 왜 나와?”
처음엔 한진근이 한유라의 이름이 새어나가지 않게 기사를 막았지만, 끝까지 박정수는 박정수였다.
“난 억울하다고! 이게 다 한유라 때문이야! 한유라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한유라, 한유라, 한유라! 다 한유라 때문이라고!”
박정수가 경찰서로 들어서면서, 모두 한유라 때문이고 자기는 억울하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그대로 실시간 영상으로 송출되었다.
덕분에 한진근 회장이 기자회견까지 열어 고개 숙여 사과했었다.
그래도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클럽 하데스 사건뿐만 아니라, 한유라가 그간 저질렀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 후폭풍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튼 그 지긋지긋한 놈. 드디어 눈앞에서 치워버렸네. 듣기로는 자기 아버지한테도 외면당한 모양이더라. 생각보다 더 더럽게 놀았더라고.”
“그러게.”
희수는 생각보다 담담해 보이는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네.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내가 관련되어 있었거든.”
재희의 말에 희수가 크게 놀란 듯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잊은 사람처럼 얼어있던 희수가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재희가 커피를 내밀자 희수가 마치 물처럼 벌컥 마시며 다급하게 물었다.
“나 네가 우리 집에 갑자기 왔을 때 궁금했어도 못 물어봤는데, 대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그게 사실은.”
재희는 그간의 일을 적당히 간추려 말해주었다.
항상 자신을 걱정해 주는 희수에게 감추고 싶지도 않았다.
재희의 말을 듣는 내내 희수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놀랐다가도 분노하고, 슬퍼하다가, 종내에는 기가 막힌 듯 한숨을 내뱉었다.
“아주 쌍으로 X랄이구나.”
희수다운 반응에 재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 늦게 말해서. 그런데 말하기 어려웠어.”
당장이라도 한유라와 박정수를 죽일 것처럼 얼음을 씹다가, 재희의 말에 한숨을 내뱉었다.
“난 괜찮아. 그래도 다음부턴 혼자 안고 있지 말고 언제든지 말해. 내가 들어주는 건 잘해.”
“응. 알았어.”
“그래도 잘됐네. 시부모님도 너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하고, 그것들은 사이좋게 검찰에 송치되고.”
노을 서점 내부를 둘러보며 중얼거리던 희수가 재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할머니는? 그때 이후로 아무런 연락 없어?”
“응. 재혁이가 뭘 어떻게 했는지 아무런 연락이 없어.”
“다행이다. 이대로 앞으로도 계속 연락 없길 바라야지.”
그러게. 작게 중얼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왜인지 커피의 끝 맛이 썼다.
* * *
그날 저녁.
재희는 샤워실을 나오다 득달같이 자신의 허리를 휘감으며 입 맞춰 오는 무혁 때문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툭, 바닥에 뭔가가 떨어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무혁 씨!”
탁.
순식간에 안방으로 끌려 들어간 재희는 자잘한 입맞춤을 흩뿌리는 무혁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제야 행동을 멈춘 무혁이 재희를 바라보았다. 늘 보는 진중한 눈동자에 서린 욕심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막 들어왔는지 그에게선 밤공기 냄새와 옅은 향수가 섞여 듬뿍 묻어나왔다.
5월의 연회 이후로 무혁의 퇴근은 빨라졌다.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밤 11시 전에는 집에 들어왔다.
그래서일까.
마치 한이라도 풀어버리려는 사람처럼 무력은 스킨십을 해왔고, 무혁보다 체력이 약한 재희는 점차 버거워졌다.
“오늘 늦을 거라고 했잖아요.”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
“저녁은요?”
“괜찮아.”
재희는 다시 잔 키스를 뿌리는 무혁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럼 먼저 씻고 와요.”
“나중에.”
“전 지금 막 씻었단 말이에요. 안 씻으면 쫓아낼 거예요.”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무혁이 재희를 놓아주었다.
“돌아오면 마저 하자.”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둔 채 무혁이 욕실로 들어가자, 재희는 뜨거워진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저런 남자가 아니었는데.”
영 싫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에 갈피를 못 잡던 재희의 눈에 태블릿PC가 보였다.
“이게 뭐지?”
아까 무혁이 떨어뜨렸나 싶어 태블릿PC를 주워들던 재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