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한유라2022.03.10.
“저, 무혁 씨. 우리 아이 낳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재희의 말에 무혁이 동작을 멈췄다. 재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무혁의 넓은 등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아침 식사 자리에서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지금이 아니면 할 기회가 좀처럼 없을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뱉은 말인데 재희는 금세 후회했다. 무혁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그건 왜 묻습니까.”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남편의 시선을 받으며 재희가 잠시 망설였다. 재희는 들어가서 얘기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이렇게 말문을 틔었을 때 이야기하는 게 나을지 갈등했다. 이윽고 재희는 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분명 또 말을 꺼내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무혁은 망설이는 재희가 입을 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마음을 정한 재희가 말했다.
“결혼도 했으니까 아이 계획도 조금씩 세워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아이라.”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무혁은 곧 입을 열었다.
“재희 씨 생각은 어떻습니까.”
“네?”
“아이 낳는 거. 재희 씨 생각 말입니다.”
“저는…….”
몽마르트르에서 자신과 무혁, 그리고 아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잠시 그려보기도 했었다. 얼마 안 가 무혁이 원치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을 접었지만. 그 후로 아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그럼 됐습니다. 아이 같은 거 낳을 필요 없습니다.”
찌릿. 단번에 자르는 그 말이 왜 가슴을 찌르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의미지.’
아직 이르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자신과 무혁 사이의 아이가 필요 없다는 건지, 아니면 아이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무혁의 짧은 대답은 여러 생각이 들게 했다.
“만약, 만약 제가 원하면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이가 없어도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무혁의 말에 재희는 쓴웃음을 삼켰다.
‘무혁 씨는 아이를 원치 않는구나.’
“재희 씨는 어떻습니까. 이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습니까.”
무혁이 묻자 재희는 실망한 감정을 감추며 말했다.
“만족스러워요. 편하고 즐겁고요.”
“혹시 아이를 가지고 싶은 겁니까.”
“아뇨.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결혼하니까 어른들이 기대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거짓말이다. 아버지는 손주에 대한 기대조차 나타내지 않았고, 할머니는 거의 강제적으로 아들만을 낳아야 한다며 보약까지 지은 위인이었다. 어쩌면 아주 잠시라도 ‘아이’에 대한 기대를 했던 이는 재희, 자신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남편인 무혁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재희 역시 그런 생각을 얌전히 접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내 아이는 외롭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무혁은 재희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차에서 내린 뒤 문을 열어주었다. 뒷좌석에 실린 보약 두 상자도 모두 꺼내든 무혁은 재희와 함께 신혼집으로 올라갔다. 재희가 현관에 들어서며 말했다.
“무혁 씨가 일찍 올 줄 몰라서 아직 저녁 준비를 못 했어요. 얼른 준비할게요.”
보약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무혁이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시 회사에 가 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까 퇴근했다고…….”
“잠시 집에 들른 것뿐입니다.”
무혁의 상황을 알려주듯 때마침 윤 비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혁이 짧게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
“한 시간 이내로 가겠습니다. 미팅 시간에 맞춰서 도착 가능합니다. 해외 입찰 진행 상황도 정리해 두고. 그리고 일전에 주민들과 마찰이 생겼었던데, 협의 진행되고 있는 상황도 정리해 두십시오. 내일 오전에 직접 현장에 가볼 테니. 그 시간대 일정은 모두 미루십시오.”
5분 남짓. 무혁이 통화한 시간은 단 5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무혁은 많은 지시를 내렸고 저녁 일정과 다음날 일정까지 순식간에 정했다. 재희는 무혁이 얼마나 바쁜 남자인지 새삼 느꼈다. 더불어 그 집까지 온 것도 없는 시간을 쪼개서 온 것임을 깨달았다. 퇴근은 핑계일 뿐이었다. 이런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남자에게서 아이 문제를 꺼낸 것 자체가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만요.”
무혁이 전화를 끊자, 재희가 서둘러 부엌으로 가 미리 씻어둔 야채와 과일 몇 개를 넣고 믹서기에 갈았다. 재희가 야채 주스를 담은 컵을 내밀자, 무혁은 가만히 컵을 응시했다.
“이거 마시고 가요. 피로 해소에 좋은 거로만 골라서 넣었어요.”
컵을 받아든 무혁이 야채 주스를 단숨에 마셨다. 괜찮다는 데도 기어이 컵까지 설거지하는 무혁을 보며 재희는 미안해졌다. 일 분 일 초가 바쁜 남자인데 건강을 생각해 만들어 준 야채 주스 때문에 또 그의 시간을 버리게 만든 것 같았다.
“오늘도 늦을 거니까 먼저 자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 무혁은 재희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나가버렸다. 재희는 굳게 닫힌 현관을 보며 무혁의 입술이 닿은 이마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재희가 이내 결심한 듯 할머니가 지어준 보약을 모조리 꺼냈다. 그러곤 하나씩 가위로 잘라 싱크대 하수구에 버렸다. 지금 앞에 놓인 일만으로도 바쁜 남자에게 할머니의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보약 따위, 먹이고 싶지 않았다. 보약을 모조리 버린 재희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빨간 천과 파란 천을 복잡한 눈으로 응시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머니에게 핑계를 댈 것인지 생각하며.
* * * 종로구에 위치한 고급 한정식집. 정·재계 인사들이 은밀한 대화나 거래를 할 때 주로 이용하는 고급 한정식집으로, 하루에 5팀만 예약을 받기로 유명한 집이었다. 여러 방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수국방. 은밀한 거래가 오가기 최적화된 프라이빗 룸에 앉아 이번 프로젝트 거래처인 대한 백화점 인테리어 팀의 서 팀장을 기다리던 무혁은 재희가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재희가 친정집에 갔다는 말을 이 실장에게 전해 들었다. 무혁은 혹시라도 그 집에서 재희가 상처를 받을까 싶어 모든 일정을 미루고 그 길로 직접 데리러 갔었다. 다행히 재희는 멀쩡한 얼굴이었지만, 무혁은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신혼집으로 향하는 내내 무혁은 재희의 기색을 살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재희는 무혁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아이라.’
신혼집에 도착하자 갑자기 재희가 아이에 대해 말을 꺼내어 무혁은 내심 당황했다. 재희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두근거렸다. 무혁 역시 바라는 일이었지만,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바로 재희였다. 무혁 역시 아이를 바랐지만, 그 아이를 낳는 사람은 재희였다. 출산의 고통을 감히 가늠할 순 없지만, 정말 아프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든 일임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무혁은 그런 고통을 재희에게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무혁에게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보단 재희가 먼저였다. 그리고 물어보지 못했지만, 재희가 그 집에서 받아온 보약 역시 걸렸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실 리는 없고.’
상견례 자리에서도 재희를 낮잡아 보던 할머니였다. 그 증거로 무거운 한약 상자를 가녀린 재희에게 들려주려고 하기까지 않았던가. 그런 할머니가 새삼 재희와 저를 생각해서 지어줄 리가 없었다.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터였다.
‘나중에 집에 가면 한번 살펴봐야겠군.’
이런저런 생각하는 가운데 룸 밖에서 직원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객님. 일행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스르륵, 기름칠 된 미닫이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상념에서 깨어난 무혁이 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KJ 건설의 강무혁 상무님이시죠? 안녕하세요. 대한 백화점 인테리어 팀의 대리 한유라입니다.”
까만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늘어뜨리고 은근히 몸매를 강조하는 블라우스와 하이스커트를 입은 유라가 쌍꺼풀진 커다란 눈을 부드럽게 휘어뜨리며 웃었다. 발색이 진한 붉은 립스틱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무혁은 마치 돌을 본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무혁입니다. 앉으십시오.”
명함을 주고받으며 서로 인사를 나눈 뒤 미리 주문한 식사가 코스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한 백화점 내부 리모델링에 대한 미팅은 원래 서 팀장님이 오시기로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전 언급 없이 미팅 담당자가 바뀌자 무혁은 가감 없이 불쾌한 티를 냈다. KM 건축사 사무소 미팅과 전반적인 영업 쪽을 민석이 전담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딱딱하고 직설적이며 원칙주의자인 무혁은 미팅에 어울리지 않았다.
“원래는 그랬죠.”
한유라는 싱긋 웃으며 따뜻한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미팅 상대가 강무혁 상무님이라고 하시니, 제가 아버지 힘을 살짝 빌렸어요.”
“…….”
“오랜만이야. 무혁 오빠. 나 기억해?”
무혁의 묵직한 시선이 한유라에게 닿았다. 세상에 거칠 것 없어 보이는, 자신만만한 미소. 쉽게 잊을 수 없는 화려한 외모의 미인이었다.그러나 무혁의 기억 속엔 한유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유라 대리님.”
무혁이 철저하게 선을 그으며 이름을 부르자, 유라의 잘 다듬어진 고운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번 리모델링 관련 설계와 진행 현황표입니다.”
한치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눈빛과 무뚝뚝한 어조. 무혁은 서류 봉투를 유라 앞으로 밀어주었다.
“서 팀장님에게 들으셨겠지만, 대한 백화점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곳은 5층 여성복 매장입니다. 직접 가보니 보수해야 할 곳이 여럿 보여서 그 부분을 중점으로 체크했습니다. 열어보십시오.”
한유라는 서류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곧 웃으며 옆으로 밀어두었다.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급히 오느라 전달사항을 제대로 못 받아서요.”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보다 우리 다른 얘기 좀 할까요?”
유라가 싱긋 웃으며 사적인 얘기를 꺼내려던 찰나 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미팅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합시다.”
“뭐?”
코트를 들고 나가려던 무혁이 걸음을 멈췄다. 당황한 얼굴로 앉아 있는 유라를 보며 무혁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엔 서 팀장님과 실무진이 직접 오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
“갑자기 미팅 상대가 바뀐 것에 대해 한마디 언질도 없었던 점, 어떻게 된 일인지 정식으로 듣겠습니다.”
그의 무거운 시선에 유라가 본능적으로 조금 움츠렸지만, 끝까지 고개를 도도하게 치켜들었다.
“누가 오면 어때서? 어차피 오빠 고집대로 밀고 나갈 거잖아? 내가 오케이하면 서 팀장님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오빠나 아버지도 허락하실 거라고.”
승기를 잡은 것처럼 유라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맺혔다. 유라는 무혁이 다시 자리에 앉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강무혁이라면 이 자리를 그냥 박차고 나갈 정도로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어 나온 무혁의 대답에 그녀의 예상은 제대로 빗나갔다.
“동생의 말 한마디에 대한 백화점 한유석 사장님이 직접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좌지우지된다면 이쪽에서 거절하겠습니다.”
“뭐?”
“저는 아마추어와 일하지 않습니다.”
무혁이 코트를 입으며 말했다.
“다음에 미팅할 준비가 되면 그때 연락하십시오. 그때 상황을 봐서 조율하도록 일러둘 테니.”
말을 마친 무혁이 냉정하게 나가버리자, 유라가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무혁의 말대로였다. 한유라의 큰 오빠이자 대한 그룹의 후계자인 한유석이 직접 KJ 건설과 손을 잡고 추진하는 프로젝트였다. 한유라가 아무리 졸라도 한유석은 물론 그녀의 아버지인 한진근 회장은 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검토조차 하지 않고 진행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미끼를 던지면 보통 업체였다면 좋다고 오케이했을 텐데, 무혁은 끝까지 원칙을 지켰다. 알면서도 던진 말이었지만, 무혁은 미련 없이 나가버렸다.
“그 무관심한 태도.”
무혁을 처음 본 건 유라가 고등학생일 때였다. 뽐내길 좋아하는 김혜란은 사교모임이 생길 때마다 항상 무혁과 우진을 끼고 다녔다. 쟁쟁한 가문의 특출난 자제들이 모이는 사교모임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무혁은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끌었다. 과묵하고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남자였지만, 정·재계 사모님들이 무혁을 내심 사위로 점찍어 두었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돌아다녔다. 욕심이 났다. 돌부처 같은 저 남자를 손에 넣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아 갖고 싶은 건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유라였다. 유라의 집 역시 KJ 그룹에 꿇리지 않았고, 혜란 역시 저를 마음에 들어 했으니 이제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줌마가 삽질만 안 했어도.”
혜란의 강요로 선 자리에 나간 무혁이 난데없이 처음 본 이상한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식을 올려 버렸다. 새치기를 당했다는 생각에 그날 유라는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올라서 아끼는 그랜드 피아노에 마구잡이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결국 억 소리 나는 가격의 그랜드 피아노는 망가져서 버려졌다. 그러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유라에겐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두고 보라지. 곧 이혼하게 될 거니까. 김혜란, 그 아줌마는 내 편이라고.”
그럼 내가 차지하고 강무혁, 너를 미련 없이 버려줄 거야. 유라는 속으로 칼을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