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첫 출근2022.03.14.
무혁이 퇴근했을 땐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정을 잠시 미뤄둔 대가는 컸다. 피곤에 젖은 얼굴로 집에 들어선 무혁은 그대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 집에서 가져온 보약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냉장고나 식탁 등 살펴봤지만 보약은 없었다. 그러다 한약 팩이 버려진 쓰레기통이 무혁의 시선에 걸렸다.
“…….”
가위로 말끔하게 잘라 버린 한약 팩. 무혁의 시선이 재희가 자고 있을 안방으로 향했다. 무슨 약인지 재희에게 물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 집에서 항상 기가 눌려 살았던 재희가 말도 없이 약을 모조리 버릴 정도였다면, 분명 좋은 의도는 아니었을 터였다. 무혁은 굳이 재희가 그 집에서 당한 일을 스스로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혁은 한약 팩 하나만 챙긴 뒤 나머지는 재희 눈에 띄지 않도록 다른 쓰레기통에 버렸다. * * * 월요일. 일찍 일어난 재희는 임시이긴 하지만 라윤 갤러리로 첫 출근 하는 날인 만큼 튀지 않는 옷을 입었다. 재희가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앉아 있던 무혁이 의자를 빼주었다. 재희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아침 식사 때마다 무혁이 빼준 의자에 앉는 일은 이제 익숙해졌다.
“오늘부터 라윤 갤러리로 출근합니까.”
“네.”
“기분은 괜찮습니까.”
“조금 설레요. 긴장도 되고요.”
“다행입니다.”
무혁이 식전 샐러드를 밀어주었다. 재희가 샐러드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무혁이 갓 구운 식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 내밀어 주었다. 바삭, 재희가 토스트를 먹는 모습을 무혁은 마치 명화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아유. 사장님 눈에서 아주 꿀이 떨어지는구나, 떨어져.’
겉보기에는 무혁이 덤덤한 얼굴로 재희를 보는 것처럼 보였지만, 경자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경자가 알아서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재희 앞으로 커피를 내밀어 주며 무혁이 입을 열었다.
“비서실에서 근무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무래도 라윤 갤러리 5월의 연회와 50주년 특별 전시회가 중요하다 보니, 전담부서가 있긴 하지만 비서실에서도 관여를 많이 한다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처음엔 혜란의 제안이 부담스럽고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저를 싫어하는 혜란이 가족이라고 말해주어서 기뻤고, 혜란에게 잘 보여서 서먹한 이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임시이긴 하지만, 줄곧 동경하던 5월의 연회 준비에 참여한다고 하니 설레었고 의욕도 샘솟았다. 전 회사 팀장인 지혜에게 외주 건을 줄이는 이유를 말하자, 지혜는 잘 됐다면서 기뻐했다. 지혜는 재희의 일러스트 실력도 인정했지만, 그보다 재희가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두고 전공을 살리지 못한 걸 더 안타까워했다. 조금 발갛게 상기된 재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무혁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앞으로 출근할 때 제가 데려다주겠습니다.”
“네?”
전날 밤까지도 아무 말 없던 무혁이었다. 무혁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재희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괜찮아요. 무혁 씨. 지금도 출근 시간 늦췄는데, 저까지 신경 쓰면 시간이 더 없잖아요.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퇴근 때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출근 때는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이 실장님이 계시니까 괜찮아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재희는 부담스러운 얼굴로 무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도 물러서지 않을 무혁의 단단한 고집이 피부로 와닿자 재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그의 제안이 반갑기도 했다.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알겠어요. 그렇지만 무리하면 안 돼요.”
“재희 씨야말로 무리하지 마십시오.”
마치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은 아버지처럼 말하는 무혁을 보며 재희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 * * 식사를 마치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드레스룸 문이 닫히기 무섭게 무혁이 재희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그대로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무혁은 타이를 매주기 전과 후, 이런 식으로 몇 날 며칠은 굶주린 짐승처럼 정신없이 재희를 탐했다. 푹신한 쿠션에 기댄 채 무혁을 끌어안고 다소 힘겹게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던 재희가 먼저 밀어냈다. 아쉬운 기색이 가득한 몸짓으로 무혁이 살짝 떨어지자, 재희가 서로의 입술이 살짝 닿은 상태에서 말했다.
“안 물어봐요?”
“뭘 말입니까.”
“……그 집에서 가져온 보약 어떻게 했는지.”
순간의 반항심에 보약을 모조리 버렸지만, 재희는 무혁이 언제 말을 꺼낼까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무혁은 보약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분명 할머니가 무혁에게 꼬박꼬박 챙겨 먹으라는 당부까지 했는데도. 깜박했다고 말할까, 아니면 달라고 말할까. 이런저런 대답을 예상하며 재희는 가만히 시선을 올려 무혁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모두 가리고도 남는 이 커다란 남자의 짙은 시선을 마주하며. 그러나 무혁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재희의 예상을 빗나갔다.
“재희 씨가 알아서 잘했을 겁니다.”
“네?”
“그러니 묻지 않을 겁니다. 재희 씨도 무언가를 생각했을 테니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진 않아요?”
“네.”
“…….”
“분명 옳은 판단일 거니까.”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무혁을 보며 재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보약…… 아들을 낳게 하는 보약이래요. 할머니가 수소문해서 비싸게 구해온 귀한 보약.”
재희의 말에도 무혁은 별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그저 키스를 퍼부을 때와 같은 짙은 시선으로 응시할 뿐.
“그래서 버렸어요. 무혁 씨도 저도 아이는 아직 원치 않으니까.”
“그렇습니까.”
무혁은 평소와 같았다. 실망도, 화도 없이 덤덤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짙은 시선. 다른 감정은 읽히지 않았다.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버렸는데 화 안 나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런 약이라면 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모순된 마음이겠지만, 자신에게 가감 없는 믿음을 드러내는 무혁이 왜 상의도 없이 버렸냐며 반박하길 내심 바랐다. 가끔 무혁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을 때도 있지만, 자신이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행동해도 실망은커녕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희수는 그런 남자가 흔한 줄 아느냐고 말했지만, 재희의 생각은 달랐다. 무혁과 깊은 대화가 되지 않았다. 재희는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하고 싶은 반면에, 무혁은 제 생각을 쉽사리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무혁이 감정을 내비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그가 한 번씩 감정을 내비칠 땐 재희가 숨 막힐 정도로 폭발적으로 굴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저도 재희는 무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지만 재희는 무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가끔 이 남자가 멀게만 느껴졌다.
“그저 말해주고 싶었어요. 무혁 씨도 먹었어야 할 보약인데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재희가 가볍게 밀어내자 무혁이 순순히 떨어졌다.
“그보다.”
‘무혁 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채근하듯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에 재희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무혁이 휴대전화를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대화는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 * * 라윤 갤러리 앞.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조심해서 출근해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무혁은 라윤 갤러리를 훑듯이 보고는 당부, 또 당부했다. 이러다가 무혁이 늦을까 봐 겨우 돌려보낸 재희는 비서실로 올라갔다. 굳게 닫힌 비서실 유리문 앞에 선 재희는 섣불리 들어가지 못했다. 보안 인증을 할 수 있는 사원증이 없어 출입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혹시 작은 사모님이십니까.”
뒤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재희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커피 8잔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있는 40대 남자였다. 재희는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허둥대다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신재희라고 합니다.”
한 비서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잠시 저기 휴게실로 가시겠습니까.”
재희가 휴게실로 들어가자 한 비서가 문을 닫았다. 한 비서가 정중하게 자리를 권한 뒤 말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작은 사모님. 한근목이라고 합니다. 관장님의 비서실장으로 비서실 총괄업무와 관장님 보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 비서가 재희에게 커피를 주며 말을 이었다.
“관장님에게 미리 말씀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비서실 식구들에겐 사모님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사모님에 대해 아는 건 저뿐입니다.”
“……네.”
결혼식 때, 혜란은 재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갤러리 직원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 비서만이 대표로 참석했을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갤러리 식구들이 재희에 대해 잘 몰랐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저는 여느 직원들과 똑같이 작은 사모님을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리 양해 말씀드립니다.”
정중한 한 비서의 말에 재희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히려 그게 저도 편해요.”
한 비서가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가시죠. 모두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 비서가 먼저 비서실로 들어갔다. 뒤이어 재희가 들어가자 비서실에 출근해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오랜만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의 긴장감을 느끼던 재희는 한 직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재희가 어색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자 직원이 시선을 피해 버렸다.
“자자. 모두 일찍 출근했군요. 오늘부터 새로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될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름은 신재희 씨. 임시이긴 하지만 5월의 연회와 50주년 특별 전시회가 열릴 때까지 같이 일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모르는 게 많을 테니 미경 씨가 앞으로 많이 알려주세요.”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재희는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로 향했다. 비서실 자리 중에서도 가장 뒤편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재희는 자신의 사수가 된 미경에게 인사했다.
“네.”
그러나 미경은 단답형으로 대답하곤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차가운 미경의 태도에 재희는 머쓱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0시가 다 되어 갈 때쯤 혜란이 출근하자 비서실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혜란은 대충 인사를 받아주며 관장실로 가다 걸음을 멈췄다. 항상 곧장 관장실로 들어가 버리는 혜란이었기에 비서실 직원들이 조금 긴장했다.
“새로 온 신입과는 인사 나누었죠? 내가 특별히 데리고 온 사람이니 잘 가르쳐주도록 해요. 앞으로 5월의 연회나 50주년 특별 전시회를 준비할 때 도움이 될 테니까요.”
말을 끝낸 혜란이 관장실로 들어가 버리자, 직원들의 시선이 다시금 재희에게 향했다. 직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재희는 직감적으로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못마땅함. 할머니가 자신을 볼 때와 똑같은 시선이었다.
“자자. 일합시다.”
한 비서가 가볍게 손바닥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시작하자 옆자리의 미경이 의자를 끌고 오며 물었다.
“혹시 어느 대학교 나왔어요?”
“S 대학교 나왔어요.”
“과는?”
“순수 미술 전공했어요.”
“유학은 다녀왔어요?”
“아뇨. 사정상…….”
미경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 전부 다 유학파예요.”
“…….”
“각자 전공은 다르지만 관장님께서 직접 면접 보고 뽑은 엘리트들이거든요. 순수 미술 전공이시면 더 잘 아시겠네요. 여기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많다는 거.”
“……네.”
“그냥 그렇다구요.”
그렇게 말을 마친 미경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재희는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앞으로 험난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바쁜 오전이 지나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재희는 휴게실에서 커피를 내렸다. 조용히 휴식을 즐기기 좋게끔 칸막이가 쳐진 소파에 앉아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비서실 사람 몇몇이 들어왔다. 직원들의 수다 소리가 들리자 꼭 엿듣는 것 같아서 민망해진 재희가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이어진 대화에 멈칫 몸이 굳었다.
“근데 새로 온 신재희 씨는 정체가 뭘까.”
“모르지. 관장님 특별 채용이라니. 뭔가 쩌는 스펙 있는 거 아냐?”
“미경 씨. 자기가 사수잖아. 뭐 들은 거 없어?”
지이잉, 커피 메이커에서 원두 갈리는 소리가 그치자 미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S 대학교 순수 미술 전공했다고 하더라.”
“S 대학교? 거기 미대 입학하기 힘들기로 유명한데.”
“그러면 뭐해. 유학도 안 다녀왔다는데.”
“정말?”
“그렇대. 사정상이라곤 하는데. 우리 갤러리 채용 조건에서 유학은 필수였는데, 아무리 관장님 낙하산이래도 마음에 안 들어.”
“사실은 대단한 집안의 사모님이라거나 그런 게 아닐까.”
한 직원의 말에 몇몇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미경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관장님이 쉽게 입사를 허락해 주실 리가 없잖아. 여기를 얼마나 목숨같이 여기시는데.”
“미경 씨. 정말 마음에 안 드나 보네.”
“당연하지. 내가 여기 입사하려고 얼마나 피 터지게 공부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5월의 연회랑 50주년 특별 전시회 준비 기간 동안 같이 일한다는데 마음에 들면 이상한 거지. 두고 볼 거야. 얼마나 잘하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들이 나가자 재희는 미지근해진 커피를 보며 쓰게 웃었다. 출근한 첫날. 재희는 자신이 이곳에서 철저하게 외부인이란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