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보약2022.03.07.
재희는 할머니의 방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할머니가 노성을 지를 것 같아서 실수로라도 앞을 지나가지 않았던, 재희에게는 금지구역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할머니가 허락했다고는 하나 재희로서는 선뜻 발을 들이기 어려웠다.
“할머니. 저 왔어요.”
“들어오거라.”
최대한 조심하며 방에 들어서자 보료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재희는 혹시라도 할머니와 눈이 마주칠까 봐 시선을 내렸다. 선뜻 앉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할머니가 호통쳤다.
“와서 안 앉고 뭐 하는 거냐! 아무 곳에나 빨리 앉지 않고.”
“죄송합니다.”
“둔해 빠진 것.”
할머니가 혀를 찼다. 애써 그 소리를 흘려 넘기며 방을 둘러 봤지만, 어느 곳에도 앉을만한 방석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재희는 대충 할머니와 적당히 떨어진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결혼하더니 네가 아주 기고만장해 졌구나.”
“…….”
“약속? 중요한 약속? 네년에게 그딴 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 너는 내가 오라고 하면 군말 없이 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감히 나에게 반항을 해.”
재희는 허벅지에 올려둔 손을 꾹 말아쥐었다. 어차피 이 집에 올 때부터 할머니의 호통은 각오한 바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참고 넘기면 될 일이었다. 그러다 보면 호통이 끝나 있었고, 재희는 할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할머니의 막말이나 호통에 가슴이 아플까.
“이래서 내가 아범에게 딱 고등학교까지만 보내고 얼른 시집이나 보내자고 했건만. 주제에 좀 배웠다고 아주 못된 것만 배웠어.”
“할머니. 죄송하지만.”
이어지는 할머니의 막말을 견디던 재희는 결국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할머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 것도 동시였다.
“…… 저,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뭐라고 했느냐? 다시 한번 지껄여 보아라.”
당장이라도 서탁 위의 책을 집어 던질 것 같은 할머니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재희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재희는 후회했다. 눈물이 나오도록 가슴이 아파도 할머니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을걸.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이어서 도로 주워 담을 순 없었다.
“무, 무혁 씨가 곧 퇴근할 시간이에요. 늦지 않게 가서 저녁을 준비해야 해서요.”
아직 퇴근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할머니가 무혁에게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희는 본능적으로 무혁을 핑계로 삼았다. 예상대로 할머니의 기색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래. 큰일 하는 우리 손주사위 저녁을 굶게 할 수야 없지. 네가 간만에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는구나.”
흐뭇해하는 할머니의 말에 재희는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청소를 깨끗하게 해도, 할머니 마음에 들게끔 행동을 해도 칭찬 한마디 들은 기억이 없다. 오히려 티끌만 한 실수라도 하면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혼이 났었다. 그런데 무혁의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로 할머니에게서 칭찬을 듣게 될 줄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거 가져가거라.”
할머니가 숨겨뒀던 한약 두 상자를 꺼내 재희 앞으로 내밀었다. 각각 빨간색 천과 파란색 천이 묶인 한약이었다.
“손잡이에 빨간색 천이 묶인 건 네가 먹을 보약이다.”
“……!”
순간 재희는 제 귀를 의심했다. 평소 재희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 없던 할머니였다. 오히려 소고기 한 점을 먹어도 재혁이 것을 뺏어 먹는다며 호통치던 할머니였다. 그런데 보약이라니. 할머니가 나를 조금은 좋아해 주기로 하신 걸까. 아주 잠시 그런 희망이 퐁, 올라왔지만, 이어진 할머니의 말에 산산이 부서졌다.
“아들 낳게 하는 보약이다.”
“…….”
“내 수소문해서 유명한 곳에서 겨우 얻어온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6개월은 기다려야 하지만, 어렵게 구해온 것이니 오늘부터 빨간 천이 묶인 건 네가 먹고, 파란 천이 묶인 건 우리 손주사위 먹이거라.”
할머니는 그대로 굳어버린 재희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네가 결혼한 지 이제 두 달 정도 지났다. 그런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니. 내 사돈 볼 낯이 없고 동네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
“네게 분이 넘치는 집에 시집갔으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적어도 3명은 낳아야 내 면이 서지 않겠느냐. 더도 말고 아들 딱 셋만 낳거라.”
마치 그게 네 할 일의 전부라는 것처럼, 할머니는 명령했다.
* * * 할머니의 방에서 나오는 재희의 손엔 보약 상자가 들려 있었다. 거절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목에서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재희는 할머니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재희는 고개를 들어 널찍한 거실을 둘러보았다. 생각해 보니 이 집에서 한시도 편했던 적은 없었다. 저녁 식사 후에 거실에 가족들이 모여 과일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 재희의 자리는 없었다. 이 집에서 나고 자랐지만 늘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집이 처음 온 남의 집처럼 낯설었다.
‘당연한가.’
재희는 쓰게 웃으며 서둘러 이 집에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얼른 ‘내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가는 거냐.”
항상 퇴근이 늦었던 신채근이 오늘은 웬일로 편한 옷을 입고 안방에서 나왔다. 재희는 아버지 신채근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재희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네.”
“그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재희도, 신채근도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재희가 주춤, 발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저, 그만 가볼게요.”
“잠시 들어오렴. 할 말이 있다.”
의외의 말에 재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릴 때부터 신채근이 재희에게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고 가며 인사를 하고 짤막한 몇 마디만 나눌 뿐, 남보다 못한 서먹한 부녀 사이였다. 그런 신채근이 먼저 재희에게 할 말이 있다며 말을 건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신채근이 2층으로 올라가자 영산댁이 다가와서 보약을 들어주고는 얼른 가보라며 눈짓했다. 주춤하던 재희가 신채근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신채근이 들어간 곳은 재희가 결혼하기 전까지 지냈던 방이었다. 분명 창고로 전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방은 재희가 지냈을 적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앉거라.”
신채근이 의자에 앉으며 재희에게 침대에 앉을 것을 권했다. 마치 이 방 주인은 아직도 재희, 너라는 걸 알려주듯이. 껄끄럽고 반갑지 않은 권함이었다. 재희가 침대 끝에 걸터앉자 신채근이 말했다.
“결혼 생활은 할 만하냐.”
무뚝뚝한, 사무적인 목소리. 재희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신채근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이번엔 재희가 먼저 물었다.
“하실 말씀이란 게…….”
신채근과 단둘이 있는 이 자리가 너무나도 숨 막히고 어색했다. 얼른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강 서방은 잘해주냐.”
강 서방. 아버지의 입에서 들으니 새삼 그 말도 낯설었다.
“……네.”
“강 서방 요즘 바쁘다고 들었는데 네가 외롭고 힘들겠구나.”
“괜찮아요. 되도록 저랑 대화하려고 하고 같이 있어 주려고 노력해 줘요.”
“그래. 바쁜 강 서방 따라간다고 너까지 무리하지 말거라.”
재희는 의아한 눈으로 신채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혁의 근황을 묻는 듯했지만, 꼭 재희를 염려하는 것 같이 들렸다. 잠시 시선을 재희에게, 창밖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나뭇잎이 풍성하게 난 나뭇가지에, 다시 재희에게 옮기며 생각에 잠기던 신채근이 말했다.
“이 방은 네 엄마가 좋아하던 방이었다.”
신채근의 말에 재희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다른 좋은 방은 다 두고 여기서 보는 풍경이 가장 예쁘다며 좋아했었지.”
“…….”
“특히 눈 오는 날에 이 방에서 정원을 보는 걸 가장 좋아했다.”
“왜 그 말씀을 저한테 하시는 거예요?”
재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친모에 대해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적이 수없이 많지만, 신채근은 재희에게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친모는 마치 이 집안에서 금기어 같은지라 재희는 감히 물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채근이 먼저 친모를 입에 올린 것은 뜻밖이었다.
“그저 네가 지냈던 이 방이 네 엄마가 좋아하던 방이었다는 걸 너도 알았으면 했다. 그뿐이다.”
재희는 그 말이 더없이 무거운 족쇄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이 집을 벗어나서 좋았는데, 신채근은 이 집을 잊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너의 뿌리는 여기라는 듯이. 명치가 답답해졌다. 얼른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올해 네 엄마 기일에 넌 올 필요 없다.”
“…….”
“앞으로도 올 필요 없다. 할머니에게는 내가 잘 말해 둘 테니.”
친모는 고아였기에 기일을 챙겨줄 가족이 없었다. 때문에 매년 친모와 친동생의 기일이 다가오면 간단한 추도식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재희는 숨이 막혔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묵묵히 그 시간을 견뎠다. 홍연화는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묵묵히 따랐다. 어차피 이 집안의 모든 건 재혁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니, 하루쯤은 참아준다는 표정이었다.
“왜…… 요?”
항상 재희에게 무심했던 아버지였다. 미술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선뜻 허락했으나, 어디까지나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재희가 입시 미술로 바쁠 때 신채근은 단 한 번도 재희에게 힘내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인사드릴 때도 짤막하게 몇 마디만 주고받았을 뿐, 신채근은 잘 다녀왔냐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애정은커녕 무관심에 가까운 아버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올 필요가 없어요? 제 어머니 기일인데…….”
“결혼했으니 네 가정에 좀 더 신경 쓰는 게 맞는 거다. 그뿐이다.”
“…….”
“그만 일어나자. 데려다주마.”
더는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는지 신채근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차 가지고 왔어요.”
“밤 운전은 위험해.”
“무혁 씨가 운전기사를 따로 구해줬어요.”
“……그러냐.”
신채근의 얼굴에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처음 보는 신채근의 미소에 재희는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항상 무뚝뚝하고 제게 무관심하던 아버지의 미소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방문을 노크한 후 들어온 영산댁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장님. 아래층에 사위분이 오셨어요.”
“무혁 씨가요?”
재희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현관에 버선발로 뛰어나온 할머니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서 있는 무혁의 모습이 보였다.
“어이구. 바쁜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누? 얼굴이 다 상했네, 우리 손주사위. 얼른 들어와요. 들어와서 따뜻한 밥이나 한 술 좀 들고 가요.”
“괜찮습니다.”
사근사근한 할머니의 권유를 무혁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윽고 무혁이 2층에서 내려오는 신채근을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자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재희 씨를 데리러 왔습니다.”
무혁의 시선이 재희에게 닿았다. 무혁이 손을 내밀자 차마 그들 사이에 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던 재희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이 주는 온기에 답답했던 명치가 풀리는 것 같았다. 재희는 그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오늘 일찍 퇴근했는데 집에 와보니 재희 씨가 없어서 찾았습니다. 그만 돌아갑시다.”
“그럼 이 실장님은요?”
“먼저 돌려보냈습니다.”
무혁이 손수 신발장에서 재희의 신발을 꺼내주었다. 인자한 미소가 서렸던 할머니의 얼굴이 그의 행동에 마치 천지가 개벽한 것을 본 사람처럼 굳었다. 재희는 할머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신발을 신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영산댁이 서둘러 보약 두 상자를 들고 왔다. 무혁이 보약에 시선을 두자, 얼른 정신을 차린 할머니가 말했다.
“요즘 고생하는 것 같아서 내 특별히 보약을 지어왔어요. 가서 꼬박꼬박 챙겨 먹어요.”
할머니가 당연하다는 듯 재희 손에 보약 두 상자를 쥐여주려 했다. 그러나 무혁이 더 행동이 빨랐다. 무혁이 보약 두 상자를 들자 할머니가 기겁했다.
“귀한 손에 어떻게 이런 무거운 걸 드누! 재희야. 뭐 하는 거냐. 얼른 네가 들지 않고!”
할머니가 정색했다. 재희가 반사적으로 보약 상자를 들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무혁이 할머니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그럼 할머님께서 들어주시겠습니까.”
“뭐…….”
이번엔 할머니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할머님 말씀대로 귀한 손이라 저도, 재희 씨도 이걸 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네 지금 어머니에게 무슨 무례인가!”
신채근이 야단치자 무혁의 묵직한 시선이 굳어 있는 할머니와 신채근을 차례로 훑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녁은 다음에 먹겠습니다.”
무혁이 비어 있는 손으로 재희의 어깨를 감쌌다. 현관을 나와 정원을 반쯤 걸었을 때, 재희가 힐끗 돌아보려 하자 무혁이 마치 보지 말라는 듯이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커다란 품에 가려져 그 집은 보이지 않았다.
* * * 차에 올라타자마자 재희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혁이 재희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며 힐끗 보자, 재희가 잔웃음을 흘렸다.
“고마워요.”
“뭐가 말입니까.”
“그냥 다요.”
무혁이 할머니에게 했던 행동에 줄곧 갑갑했던 명치가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았다. 무혁이 시동을 걸자 차가 매끄럽게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차가 도로에 진입하자마자 재희가 물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무혁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집에 왔더니 재희 씨가 없어서 여사님에게 물어서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재희는 운전에 집중하는 무혁을 보다가 곧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이른 저녁의 서울 거리는 복잡했고, 수많은 차가 오가고 있었다. 신혼집으로 가는 내내 재희의 신경은 차 뒤쪽에 실린 보약 두 상자에 쏠려 있었다.
‘아이라.’
재희는 아이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한 이상 언젠가 가질 아이였다. 문제는 무혁도 아이를 원할지 미지수였다. 몽마르트르에서 무혁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여러 생각이 오가는 와중에 어느덧 차는 신혼집에 도착했다. 무혁이 안전벨트를 풀어주기 위해 상체를 기울이자, 재희가 용기를 내 물었다.
“저, 무혁 씨. 우리 아이 낳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