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웨딩드레스 보러 갈래요?2021.12.20.
으슥한 골목 어두운 지하 단칸방에 남자 여럿이 초록색 테이블 주위로 둘러앉아 있다. 박 부장은 초조하고 짜증스러운 얼굴로 제 앞에 놓인 카드를 집어 들었다. 지난번 카페에서 무혁에게 얻어맞은 뒤로 직장에서 잘리고 크게 한탕 치기 위해 발을 들인 불법 도박장. 처음엔 돈을 많이 따서 좋아했더니 가면 갈수록 잃는 돈이 많아졌다. 딱 본전만 뽑자, 뽑자 하면서 버틴 지 일주일 째. 사채까지 끌어다 쓴 돈을 이 판에 모두 걸었다. 손에 들린 카드를 확인한 박 부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패였다. 박 부장의 콧구멍이 흥분으로 벌름거렸다. 자신만만하게 카드를 내밀려는 순간 쾅, 굳게 걸어 잠근 문이 거칠게 열렸다. 곧바로 여러 남자가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면서 어두컴컴한 방 안은 고함과 물건이 엎어지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당신들 누구야!”
단숨에 제압당한 박 부장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박 부장을 제압한 형사가 수갑을 꺼내 박 부장의 손목에 채우며 무심한 목소리로 툭툭 내뱉는다.
“박선득. 당신을 불법 도박 혐의로 체포한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형사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누가 신고를 한 것인지 들이닥친 경찰은 모든 증거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박 부장이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박 부장은 그대로 경찰차에 실려졌다. * * * [다음 뉴스입니다. 지난 1일 주택가의 한 지하 방에서 불법 도박 일당이 검거되었습니다. 이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수시로 장소를 이동하며 불법 도박을 벌여왔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경찰은 아직 일당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KM 건축사 사무소 대표실. 긴 손가락이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눌렀다. TV 화면이 꺼지며 아나운서의 말도 끊어졌다. 장신의 남자가 기지개를 켜더니 낮은 테이블 위에 던져둔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
“……전 직장 공금 횡령, 폭행, 불법 도박…… 어, 중고 물품 사기 혐의는 또 뭐야. 와, 진짜 부지런한 인간쓰레기네.”
남자가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아 작게 감탄을 터뜨리며 설렁설렁 서류를 넘겼다. 반면 책상에 앉아 있는 무혁은 관심 없다는 듯 묵묵히 설계도면을 펼쳐 놓고 집중하고 있었다. 서류를 넘기던 남자 강우진은 툭, 자료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 쓰레기가 형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강우진은 형 무혁보다 작긴 하지만, 일반적인 남자들보다 키와 덩치 역시 커서 처음 대면할 땐 그 덩치에 기가 눌릴 정도였다. 다만, 성격이 좀 더 서글서글해서 다가가기 쉬웠다. 우진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했다.
“그렇잖아. 그냥 인부 중 한 명이었던 박선득의 뒤를 다 파헤친 것도 그렇고, 불법 도박장 위치를 경찰에 흘린 것까지. 이거 다 형이 한 짓이잖아. 무엇보다 박선득, 그 인간이 형 약혼녀에게 했던 짓은 쏙 빠져 있어. 이게 형 짓 아니면 누구겠어.”
박 부장은 카페 일 이후로 바로 일자리에서 해고되었다. 돈줄이 끊기자 박 부장은 초조해졌다. 술자리에서 시작된 시비와 폭행으로 인한 벌금에, 전 직장에서 건 소송 등으로 박 부장은 급기야 사채까지 끌어다 쓰며 불법 도박에 손을 댔다. 그리고 박 부장이 불법 도박장에 있을 때 누군가의 신고로 인해 체포된 것이다.
“형. 설마 예비 신부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무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우진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진은 단 한 번도 무혁이 먼저 손을 올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두 살밖에 차이 안 나지만 어릴 적 형제간 싸울 때도 무혁은 한 번도 우진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 형이 카페에서 주먹을 올리고 싸웠다는 민석의 말에 우진은 말도 안 된다며 웃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 보니 정말로 무혁은 누군가를 주먹으로 한 방 먹였고, 그 중심에 맞선을 봤던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었다. 무혁이 카페의 일은 조용히 마무리 지으라고 해서 기껏 덮어 놨더니, 갑자기 박 부장이 여러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야말로 아주 영혼까지 탈탈 털려서. 아마 몇 년간 박 부장은 사회에 나오지도 못할 것이다. 나온다고 하더라도 가시밭길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히려 박 부장은 교도소에 있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형이랑은 결코 척을 지고 싶지 않아.”
“나가.”
무혁의 짧고 단호한 말에 우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표실에서 나갔다. 우진이 나가자 무혁은 설계도면을 접고 커피잔을 든 채 창문으로 다가갔다. 윤 비서가 낮에 가져다 놓은 뜨거운 커피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창가로 다가가자 도로를 가운데 두고 길게 늘어선 빌딩 숲이 보였다. 문득 무혁은 제품에 폭, 들어왔던 가녀리고 작은 여자를 떠올렸다. 작지만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던, 노을을 닮은 여자. 그 체온과 감촉, 제 팔을 붙잡던 여자의 가느다란 떨림……. 제 숨에 먹혀들어 가던 여자의 숨결과 입술이 생생하다. 여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거칠어지자 무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곧, 함께하게 될 날이.
* * * 상견례가 끝나고 예식 날짜가 정해지자 결혼 준비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신혼집은 서울 시내 전경과 한강 뷰가 멋진 펜트하우스로 정해졌다. 결혼 준비로 정신없는 금요일 아침. 무혁의 본가인 평창동 단독주택. 넓은 식탁에 강진과 김혜란, 그리고 무혁 세 사람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무혁은 독립해 따로 살고 있지만, 김혜란이 가끔은 집에서 식사 정도는 하라며 타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본가에 온 참이었다.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들리는 싸늘한 식사 자리. 우진은 일찌감치 약속을 핑계로 외출한 상태였다.
“그래. 결혼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느냐.”
“네.”
적막을 깬 강진 회장의 물음에 무혁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신혼집을 한남동으로 잡았던데, 네 회사랑 더 가까운 데 잡지 그랬니. 아무리 운전기사가 따로 있다지만 거리는 무시 못 해. 너 새벽까지 일하는데 피곤하게.”
김혜란의 못마땅한 목소리에 무혁은 별다른 대답하지 않았다.
“걔는 너 바쁜 거 모른다니? 한남동으로 잡으니까 좋다고 동의했어? 원래 우리 집과 맞지 않지만 네가 원해서 결혼시키는 건데, 걔는 뭐 하나도 양보하지 않는구나.”
“제가 먼저 말을 꺼냈고 제가 원해서 거기로 신혼집을 잡은 겁니다.”
“얘, 무혁아. 너 그러면 안 된다? 벌써 아내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너 원래 그런 애 아니었잖니. 걔도 그래. 얌전히 내조나 할 생각을 해야지, 벌써 자기 고집대로…….”
“어머니.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무혁이 묵직하게 말을 자르자 김혜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다 네가 걱정이 돼서 하는 말……!”
“언제 거기 정리할 거냐.”
김혜란이 뭐라 하려던 찰나 강진 회장이 말을 잘랐다. 무혁의 시선이 강진 회장에게 향했다. 강진 회장은 물을 마신 뒤 컵을 내려놓으며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약속은 지키거라. 사실 지금도 늦었다. 이제 슬슬 회사로 들어와서 물려받을 생각을 해야지. 언제까지 그 조그마한 사무실을 운영할 거냐.”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결혼도 허락해 줬다. 예정되어 있던 대한 그룹 장녀와의 맞선도 고사했단 말이다. 대한 그룹과 사돈을 맺는다면 KJ 그룹에도 분명 호재로 작용했을 거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면서까지 네 고집을 들어줬다. 그러니 너도 약속대로 빠른 시일 내로 정리하고 회사로 들어와.”
“알겠습니다.”
강진 회장이 무혁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김혜란을 힐끗 보며 덧붙였다.
“예비 며느리 직업이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했던가. 혹여라도 자기 일한다고 집안 제대로 돌보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지금 그거 저 들으라고 한 말이에요? 애초에 당신도…… 여보!”
김혜란이 발끈하자, 강진은 대꾸 없이 나가 버렸다. 고질병인 두통이 시작된 듯 김혜란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김혜란을 보며 무혁이 조용히 약을 챙겨오며 물을 내밀었다. 김혜란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없이 약을 삼켰다. 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머리를 꾹꾹 누르던 김혜란이 힐끗 보며 말했다.
“벌써 가려는 거니.”
“사무실에 가봐야 합니다.”
“그래. 그리고 네 아버지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다. 너도 그 사무실 정리하고 얼른 회사에 들어와서 일을 배워. 네가 이 집안의 장남인데 언제까지 회사 일을 모른 척할 셈이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얘, 무혁아!”
김혜란의 외침을 뒤로하고 무혁은 평창동 저택에서 벗어났다. 선으로 만나 2번 만나고 결혼한 부모님은 항상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말이 선이지, 정략결혼이나 다름없었다. 보수적인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조를 바랐고, 어머니는 일 욕심이 컸다. 두 사람의 견해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다툼이 잦았다. 그러다 사이가 벌어진 부모님은 쇼윈도 부부가 된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외부로 돌았고, 자존심 강한 어머니는 외로운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 외로움을 물질적인 것으로 달랬다. 그리고 무혁은 그 모든 걸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왔다. 무혁이 맞선이니, 결혼이니 회의적인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사무실로 향하던 무혁은 차를 세우고 휴대 전화를 열었다. 메시지 함을 열자 재희와 결혼 준비로 나눈 대화가 보였다. 대부분 재희가 이렇게 하면 어떻겠냐는 말에 무혁은 짧게 동의한 내용이었다. 가만히 대화 메시지를 읽어 내리던 무혁은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단순한 메시지일 뿐인데 삭막한 평창동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고 생각하며 무혁은 방향을 틀어 현장으로 향했다. 오후에 둘러보기로 한 현장에 좀 더 일찍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재희는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하며.
* * *
“결혼?”
외주 때문에 만난 전 회사의 팀장인 지혜와 미팅이 끝날 때쯤 재희가 결혼 소식을 먼저 전했다. 지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재희가 회사에 다닐 때 그녀를 특별히 예뻐하던 지혜였다. 재희가 퇴사할 때 특히나 아쉬워하던 지혜는 종종 이렇게 미팅을 하며 얼굴을 보곤 했다.
“세상에. 재희 씨. 너무 축하해. 언제부터 연애했던 거야? 전혀 그런 티 안 냈었잖아.”
“선을 봤거든요. 그렇게 됐어요.”
지혜는 선이라는 소리에 더욱더 놀라워했다. 낯을 가리는 재희가 선봐서 결혼한다니. 지혜는 혹시 만우절 농담인가 싶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하지만 재희의 얼굴에서 농담의 농자도 찾아내지 못한 지혜가 웃었다.
“축하해. 재희 씨. 좀 놀랍긴 한데 좋은 사람일 거라 믿어.”
재희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웨딩드레스는? 누구랑 보러 가? 당연히 예비 신랑이랑 가겠지?”
“거기까진 아직…….”
안 그래도 고민하던 차였다. 날짜도 잡혔고 식장도 예약이 된 데다 슬슬 웨딩드레스도 보러 가야 했다. 그러나 마땅히 같이 갈 사람이 없었다. 희수는 다시 시작된 프로젝트에 한창 바빴고, 홍연화와 할머니는 재희의 드레스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쪽 집안에 뒤처지면 안 된다며 재희의 취향을 싹 무시하고 혼수를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재희는 홍연화와 할머니에게 끌려다니며 거의 강제적으로 취향과 거리가 먼 혼수를 다 맞췄을 때쯤에야 웨딩드레스 생각이 났다.
“이왕이면 예비 신랑이랑 다녀와. 가장 예쁜 모습을 처음 보여 주는 상대가 예비 신랑이면 좋잖아. 지금은 남의 편이지만, 내 남편도 나 웨딩드레스 입은 거 보고 다시 반했다고 했었거든.”
호탕하게 웃는 지혜를 보며 재희는 그럴까요? 하고 자그맣게 대답했다. 엄마 같은 잔소리를 퍼붓던 지혜와 헤어진 뒤 재희는 한동안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과연 무혁이 웨딩드레스 고를 때 같이 가 줄지 궁금했다. 웨딩드레스 숍에 그 남자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입에 걸려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딘가로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전 남자친구가 귀찮아하던 것이 떠오른 탓이었다. 무혁이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혹시라도 거절하면 어쩌지. 걱정부터 들었다. 재희가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무혁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할 때 갑자기 지잉- 진동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