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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진눈깨비가 내리는 밤, 첫키스. (14/128)

#14화. 진눈깨비가 내리는 밤, 첫키스.2021.12.16.

재희는 할머니가 분명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의외로 할머니의 날 선 눈매가 스르륵 풀렸다. 하지만 김혜란에게 받은 모욕으로 목소리는 차가웠다.

16549504821269.jpg“사돈 말씀대로 이 아이가 많이 모자란 아이랍니다. 아둔하고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가르치실 때 호되게 혼내면 제 몫은 하는 아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집에서도 잘 가르쳐서 보낼 겁니다.”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재희는 얼굴을 붉힌 채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이대로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이 집에서 저의 위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아서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차마 고개를 들고 무혁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귀하게 자란 여자로 알고 있을 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 그가 실망한 눈으로 볼까 봐 무서웠다. 재희는 떨리는 속눈썹을 어쩌지 못하고 그만 시선을 내려 버렸다.

16549504821274.jpg“제가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한 여자입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벼려진 공기를 갈랐다. 장어조림이 제 앞으로 밀어지자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장어조림을 내밀어준 무혁이 수치로 잔뜩 붉어진 그녀의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무혁의 눈동자엔 실망도, 비웃음도 없었다. 그저 평소와 똑같이 재희만이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진중하고 뜨거운 시선으로 재희를 응시한다. 무혁이 그릇을 정리했다. 순식간에 한쪽으로 몰렸던 음식이 테이블에 골고루 보기 좋게 놓였다.

16549504821274.jpg“부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분에 넘치는 여자입니다”

16549504821282.jpg“무혁아!”

16549504821274.jpg“어머니. 상견례 자리입니다.”

16549504821282.jpg“……너!”

김혜란이 발끈했지만, 무혁은 고저 없는 얼굴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16549504821274.jpg“내 아내가 될 여자입니다. 재희 씨를 낮잡아 보는 건 저를 낮잡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무혁의 진중한 시선이 할머니에게로 향했다. 무혁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은 할머니는 태연한 척했지만.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16549504821274.jpg“그러니 여기서 그만하십시오.”

경고하듯 깊은 울림 있는 목소리였다. 김혜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기서 선을 더 넘는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와도 같았다. 서글서글한 강우진과는 다르게 무혁은 무뚝뚝하고 듬직한 첫째 아들이었다. 거기다 무혁은 절대 빈 소리를 하지 않는 진중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김혜란은 은근히 무혁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조용히 화를 내고 있었다.

16549504821282.jpg‘배 아파 낳은 자식이 나한테…… 고작 저런 애 때문에.’

김혜란은 속이 탄 듯 물을 마셨다.

16549504821282.jpg‘내 아들을 뒤에서 조종해 놓고 뻔뻔하게 앉아 있는 거 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가만히 앉아 있는 재희가 가증스러워 눈에 거슬렸다.

16549504849263.jpg“안사람이 결례를 범했습니다.”

미묘한 분위기는 강진 회장이 무례를 범했다며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가까스로 대화는 이어졌으나 형식적인 대화뿐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서린 불쾌한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식장이며 예물 등등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재희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을 감싸던 무혁의 말이 내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무래도 방 안의 온도가 너무 높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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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적당한 시간에 상견례 자리가 파했다. 재희는 급격하게 피로함을 느꼈다. 바닥까지 에너지를 모조리 써 버린 기분이었다. 얼른 저만의 공간인 그 작은 방 침대에 누워 이불을 둘둘 말고 자고 싶었다. 서로 헤어질 무렵 무혁이 말했다.

16549504821274.jpg“재희 씨와 좀 더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재희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어른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무혁에게 향했다.

16549504821269.jpg“어이구, 그럼요, 그럼요. 오붓한 시간을 가지도록 해요.”

할머니가 반색하며 선뜻 허락하자, 양가 부모도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가 어른들을 모두 배웅한 뒤 무혁이 곁에서 뻣뻣하게 선 재희를 돌아봤다.

16549504821274.jpg“배, 안 고픕니까?”

16549504849286.jpg“네?”

16549504821274.jpg“아까 제대로 못 먹었잖습니까.”

상견례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혁의 태도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게 고맙기도 하고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켜 부끄러운 기분에 재희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16549504849286.jpg“괜찮아요. 충분히 먹었어요.”

겨울의 건조함을 머금은 찬 바람이 불어왔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건조한 바람이라 재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16549504821274.jpg“가까운 카페라도 가겠습니까.”

16549504849286.jpg“그보다 조금 걷고 싶어요.”

상견례 자리에서의 불편한 마음이 여태 가시지 않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춥지만 걷고 싶었다. 다행히 무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의 어깨에 커다란 코트가 올려졌다. 재희가 깜짝 놀라며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덤덤한 얼굴로 재희를 감싼 자신의 코트를 다듬어 주던 무혁이 시선을 마주쳤다. 추위 때문인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재희는 시선을 다시 내렸다. 무혁의 코트를 쥔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고택을 개조한 한정식집 주위로 적당히 산책하기 좋은 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관광객이 빠진 겨울의 한옥 거리는 조용했고, 겨울 냄새가 물씬 풍겼다. 저벅저벅, 곁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인기척. 한옥 특유의 흙과 돌의 냄새가 섞인 고즈넉한 겨울밤. 시끌벅적한 소리가 뚝 끊긴 거리는 적막하다. 문득 상견례에서 오고 간 대화가 잔잔한 소용돌이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재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들어찬 찬바람을 내보내며 함께 복잡한 생각을 날려 버렸다. 무혁은 말이 없는 편이었고, 재희 역시 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둘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침묵이 불편해질 무렵 무혁이 입을 열었다.

16549504821274.jpg“재희 씨. 그 남자.”

단도직입적인 무혁의 말에 멈칫, 재희의 걸음이 멈췄다. 누군지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혁은 박 부장을 말하고 있었다. 재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16549504849286.jpg“네.”

16549504821274.jpg“처벌을 원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재희의 시선이 발끝으로 향했다.

16549504849286.jpg“제가 처벌 원한다면요……?”

16549504821274.jpg“제가 직접 재희 씨 변호해 드릴 겁니다. 그 작자에게 법적인 책임 역시 모두 물을 겁니다.”

16549504849286.jpg“그럼 저한테 연락도 오겠죠.”

16549504821274.jpg“연락 가지 않을 겁니다. 변호사로서 모두 제가 책임을 집니다.”

무혁이 변호해 주는 것도 사실 재희는 원치 않았다. 무혁이 변호를 하는 순간 박 부장이 재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무혁 또한 알게 되리라. 잊고 싶은 과거를 다른 누구도 아닌 곧 결혼할 남자가 알게 되는 건 원치 않았다. 재희는 쓰게 웃었다.

16549504849286.jpg“무혁 씨. 전 괜찮아요.”

16549504821274.jpg“…….”

16549504849286.jpg“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무혁은 딱히 재희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재희의 의중을 물어봤을 뿐. 박 부장에 대한 복수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곧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거기에 재희가 원한다면 성추행 죄목이 하나 더 얹어질 뿐이었다.

16549504821274.jpg“원하신다면.”

짧게 대답한 무혁이 성큼 걸음을 옮긴다. 재희 역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시 대화가 사라졌다. 자박자박 언 길을 걷는 크고 작은 발소리만 둘 사이를 채웠다. 귓가에 차게 스치는 겨울바람과, 시린 공기, 허공에 맺히는 뽀얀 입김, 적막하고 쓸쓸한 겨울의 밤. 겨울의 침묵을 다시 한번 깬 것은 무혁이었다.

16549504821274.jpg“죄송합니다.”

16549504849286.jpg“네?”

16549504821274.jpg“오늘일 말입니다. 어머니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16549504849286.jpg“……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무혁의 걸음이 뚝 멈췄다. 무혁이 돌아보자, 재희가 그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16549504849286.jpg“제가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요.”

무혁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그의 손은 새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이 쥐어졌다.

16549504821274.jpg“……화, 나지 않습니까.”

16549504849286.jpg“잊었어요.”

16549504821274.jpg“……잊었단 말입니까.”

16549504849286.jpg“네. 전부다.”

무혁의 입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스산함을 머금은 찬 바람이 불어왔다. 무혁이 커다란 몸을 조금 틀어 등으로 재희에게 불어닥치는 찬 바람을 막았다. 재희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16549504849286.jpg“그러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어느 상황이라도 상견례 자리처럼, 그리고 또 지금처럼 무혁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 같은 믿음이 있다. 그러니 김혜란의 가시 돋친 말 같은 건, 아프지만…… 사실 지금도 아프지만 참을 수 있었다. 곧 잊힐 아픔. 수년간 재희는 겪어왔기에, 이번에도 얼마 안 가 잊힐 게 분명했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번졌다. 그와 마주한 재희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16549504849286.jpg“무혁 씨야말로…… 괜찮은가요?”

재희는 얕은 숨을 흘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안개처럼 번진다. 재희는 새빨갛게 언 손끝을 보며 한숨을 흘리듯, 숨결을 내뱉듯 물었다.

16549504849286.jpg“결혼 상대가 저인데 정말로 괜찮은가요?”

만약 자신이 좀 더 사랑받고 자란 좋은 집안의 여자였다면 예비 시부모의 눈에 찼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오늘 상견례 자리 분위기도 좋았을지도 몰랐다. 불안했다. 그의 입으로 다시 한번만 더 상관없다고.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누구도 아닌, 무혁의 입으로 확인을 받고 싶었다.

16549504849286.jpg“…….”

무혁이 손을 뻗어 재희의 발갛게 언 작은 손을 감쌌다. 따뜻한 체온에 깜짝 놀란 재희의 눈이 무혁을 응시했다. 무혁은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재희의 손에 끼워 주며 말을 이었다.

16549504821274.jpg“재희 씨는 나에게 분에 넘치는 사람입니다.”

겨울바람 때문인지, 그의 말 때문인지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나머지 손에도 제 장갑을 끼워 준 무혁이 커다란 손으로 재희의 차가운 뺨을 녹이듯 감쌌다. 그가 손을 조금 올리자, 재희의 고개가 따라 올라갔다.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말끔한 이마 위에 흐트러졌다. 진중하고 깊은 남자의 시선에 재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16549504821274.jpg“신재희 씨.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로도 괜찮습니까.”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재희의 턱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재희의 시야에 대답을 기다리는 무혁의 덤덤한 얼굴이 가득 메워졌다. 재희의 얼굴이 울 듯 말 듯 찡그려졌다. 겨울바람 때문에 코끝이 시큰해져서인지, 그의 말에 속에서 울컥 치솟는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무혁의 대답에 재희가 할 말은 정해져 있다.

16549504849286.jpg“……무혁 씨니까 괜찮아요.”

걱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몇 번 만나지 않은 남자와 보내는 결혼 생활이 어떨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잘해 낼 수 있을까. 결혼해서도 일러스트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애써 누르고 있던 여러 걱정이 우후죽순처럼 삐죽삐죽 올라온다. 말을 잇지 못하는 코랄 색 립스틱이 발린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안개처럼 허공에 번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뚝 선 거대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16549504821274.jpg“……니다.”

16549504849286.jpg“네?”

한 가족 무리가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지나간다. 그 웃음소리를 뚫고 무혁이 재희의 귀에 명확하게 들릴 정도로 단호하게 고백했다.

16549504821274.jpg“사랑합니다.”

순간 여자의 입술이 남자의 입술에 먹혔다. 입술을 덮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재희가 흠칫 놀라며 남자의 굵은 팔뚝을 붙잡았다. 가로등 불빛에 맞붙은 남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여자의 한숨도, 숨도 모두 거칠게 삼켜대던 남자의 입술이 떨어졌다. 약간 거친 키스에 숨이 차올라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올려다보는 재희의 눈동자가 흐리게 탁해졌다. 무혁의 옷자락을 잡은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혁의 얼굴이 다시금 다가왔다. 재희는 무혁의 목에 팔을 감았다. 무혁의 두꺼운 팔이 세상의 거침에서 보호하듯 재희를 품에 가두었다. 여자의 몸을 완전히 삼킨 남자의 커다란 등 위로 눈송이 하나가 톡 떨어졌다. 밤을 하얗게 물들이며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이윽고 진눈깨비는 소나기처럼 얼마 안 가 그쳤다. 오래도록 키스를 나누던 남자와 여자가 떨어진 것도 동시였다. 남자는 여자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지금 제 품 안에 있는 여자가 꿈인 것처럼, 남자는 오랫동안 여자를 놓지 않았다. 눈과 비 냄새가 섞인, 어느 날의 겨울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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