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어때요?2021.12.23.
화들짝 놀라서 하마터면 휴대 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까만 액정에 [무혁 씨] 이라고 이름이 찍힌 걸 확인한 재희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무혁 씨.”
-식사했습니까.
무혁은 항상 정해진 시간에 전화했고. 첫마디도 역시 정해져 있었다.
“네. 저는 먹었어요. 무혁 씨는요.”
-저는 곧 먹을 생각입니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쿵쾅거리는 소리도 들렸고 걸걸한 남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주변이 시끄러운데……. 혹시 일하는 중이에요?”
-현장입니다.
재희는 잠깐 무혁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늘 현장에 있는 걸까. 문득 무혁의 일하는 모습이 궁금해졌다.
-재희 씨?
갑자기 재희가 말이 없어지자 휴대 전화 너머로 무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재희가 퍼뜩 정신 차리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 하느라. 늘 현장에 계시나 봐요.”
-공사가 시작되면 대부분 그런 편입니다.
“그러시군요.”
재희가 짧게 대답하며 우물거렸지만, 무혁은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재희는 괜히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무혁 씨. 요즘 바쁘세요?”
-네.
단호한 무혁의 대답에 재희는 순간 볼이 화끈거렸다. 거절을 들은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졌다. 말문이 막혀 한참이나 허둥지둥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바, 바쁜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이만 끊을게요.”
재희가 서둘러 통화를 종료하려는데, 무혁이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별일 없어요.”
-할 말 있으면 하십시오.
딱 끊어지는 무혁의 물음에 재희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그게…… 이제 슬슬 웨딩드레스를 골라야 하는데…… 누구랑 갈지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네.
“그래서 혹시 괜찮으시면 무혁 씨 같이 가지 않으실래요.”
겨우 용기 내어 말했으나 휴대 전화 너머 무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변의 시끄러운 공사 소리만 쾅쾅 울렸다. 마른 침을 삼키며 무혁의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재희가 못 들은 거로 해 달라고 말하려던 찰나.
-웨딩드레스 말입니까.
무혁이 되물었다.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감정을 억누르듯 잠겨 있었다. 그걸 무혁이 불쾌하게 여긴 거로 생각한 재희가 허둥거렸다.
“네. 그런데 무혁 씨가 바쁜 것 같아서…… 괜한 말을 꺼냈어요. 괜찮아요. 이건 못 들은 거로…….”
-웨딩드레스 보러 가는 김에 결혼반지도 같이 보도록 합시다.
재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혁이 말을 끊었다.
“네?”
재희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신혼집은 구했는데 아직 결혼반지도 맞추지 못했잖습니까.
“네? 네. 그렇죠…….”
그러고 보니 상견례 이후 날짜 잡고 정신없이 지나가다 보니 결혼반지도 맞추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무혁은 무척이나 바빴고, 재희는 그런 그와 통화는 할망정 자주 만나지 못했다.
-가고 싶은 웨딩숍 골라두십시오. 어디든 상관없으니.
그렇게 무혁과 짧은 통화가 끝났다. 그동안 재희는 무혁이 바쁜 것 같아서 약속 잡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재희의 제안에 단번에 약속까지 잡아 버리자 믿기지 않았다.
“정말?”
재희는 얼떨떨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 * 무혁과 웨딩드레스와 결혼반지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 되었다. 집을 나서려던 재희는 할머니와 마주치자 설레는 마음을 안고 서렸던 웃음이 단숨에 사라졌다.
“어딜 자꾸 쏘다니는 게냐.”
할머니의 타박에 재희가 목소리가 작아졌다.
“……오늘 무혁 씨랑 웨딩드레스 보러 가기로 해서요.”
“대충 아무거나 입으면 될 것이지, 뭐 한다고 쓸데없이 돈만 써.”
“…….”
“사람이 주제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겉멋만 들어서는. 쯧쯧. 바깥일 하는 우리 사위 피곤하게 만들지 마라.”
미리 웨딩드레스 보러 간다고 언질까지 해 둔 터였다. 역시나 할머니는 재희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할머니는 무혁에게 약하다는 점이었다. 무혁과 무언가를 하기로 했다고 말을 하면 타박은 할지언정 붙잡지는 않았다. 한번 희수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일부러 약속을 펑크 나게 한 것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재희는 들고 있던 가방을 꼭 쥐며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할머니의 못마땅한 시선을 애써 흘려넘기며 재희는 도망치듯 나왔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검정 세단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남자가 내렸다. 광택이 나는 검은색 코트를 걸친 커다란 남자를 보자 재희는 머플러 속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좋은 날인데 축 처진 입꼬리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큰마음 먹고 산 머플러가 이럴 땐 참 고마웠다. 남자, 무혁이 성큼 재희 앞으로 다가왔다.
“너무 얇게 입은 거 아닙니까.”
평소와 다르게 깔끔하게 입은 무혁이 대뜸 미간을 좁히며 못마땅한 듯 말한다. 무혁의 화법에 아주 조금 익숙해진 재희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무혁 씨 덕분에 바깥을 얼마 돌아다니지 않을 것 같아서요.”
예쁜 재희의 말에 좁혀졌던 무혁의 미간이 조금은 펴졌다. 무혁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손으로 모서리를 막아 주었다. 배려에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미리 히터로 데워 놓은 차 내부는 따뜻했다. 무혁의 배려에 가슴이 몽글몽글해진 재희가 머플러를 풀었다. 축 내려가 있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가보고 싶은 웨딩숍이 sposa라고 했는데 맞습니까.”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동안 재희는 몰래 웨딩드레스 숍을 검색하고 사진을 모았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숍이 sposa였는데, 연예인은 물론이고 신부들 사이에서 가장 웨딩드레스를 맞추고 싶은 숍으로 뽑혔다. 실제로도 국내에서 보기 힘든 디자인의 드레스가 많았고 예약은 항상 풀로 차 있었다. 약속 잡기 전 무혁이 어느 숍에 가고 싶은지 물었었다. 재희는 한참 망설이다가 무혁에게 sposa에 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무혁은 그 어렵다는 예약을 쉽게 잡아 주었다. 재희가 어떻게 예약 잡았냐며 물었지만, 무혁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네. 청담동에 있는데 잡지에도 나왔었어요. 한 번쯤 구경하고 싶었어요.”
“알겠습니다.”
재희는 sposa에서 웨딩드레스를 맞출 생각은 없었다. 분명 드레스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대여비조차 재희가 가진 돈으론 감당이 안 될 터였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가만 안 계실 테니.’
그래도, 그래도 한 번 입어 보는 것쯤은……. 일평생 딱 한 번이니까……. 피팅 비도 만만치 않겠지만 그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본식에서 입을 웨딩드레스는 적당한 웨딩숍에서 맞추겠지만, 입어 보는 것 정도의 욕심은 내 보고 싶었다.
‘욕심쟁이야, 신재희.’
참 이상했다. 왠지 무혁과 함께 있으면 욕심부려도 될 것 같아서 전보다 과감해지는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sposa는 생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맨 먼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외관과 커다란 샹들리에가 인상적인 화려한 내부 인테리어에 시선을 빼앗겼다. 웨딩 액세서리와 마네킹에 진열해 놓은 웨딩드레스조차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잔잔한 클래식이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는 대기실에 자리 잡고 앉았다. 곧 숍 매니저가 팸플릿을 가지고 와 어느 브랜드를 선호하는지 물었다. 생각해둔 브랜드가 있지만 진열해 놓은 드레스가 너무 아름다워서 막상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재희는 묵묵히 기다리는 무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혹시 무혁 씨는 따로 좋아하는 게…….”
“없습니다.”
단번에 나온 그의 대답에 재희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끄덕였다. 긴 시간 그를 알아 온 것은 아니지만, 무혁은 빈말은 하지 않는 성격인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결국, 생각해 둔 브랜드 외에도 숍 매니저의 추천도 함께 받아 입어 볼 드레스를 결정했다.
“와아.”
첫 번째 드레스를 입은 재희는 화사함에 할 말을 잃었다. 비즈가 드레스 가득 박혀 있어서 과연 이게 예쁠까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조명 아래에 서니 드레스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는 게 너무 아름다웠다. 숍 매니저가 너무 잘 어울린다며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칭찬했다.
“무혁 씨…… 어때요?”
무혁은 과연 어떤 말을 해 줄까. 피팅룸에서 나오며 재희가 조금은 기대를 품고 수줍은 목소리로 물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무혁이 시선을 들었다. 이어 그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아…… 별로예요?”
굳은 무혁의 표정을 보자 조금 자신감이 하락한 재희가 어렵게 물었다. 그러나 무혁의 입에선 전혀 생각과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마음에 듭니까?”
“네?”
“마음에 드냐고 물었습니다.”
물은 건 재희인데, 무혁은 되묻는다. 자신의 질문을 무시하는 건지, 아닌 건지 헷갈렸다.
“아, 비즈가 너무 많아서 너무 화려하단 기분이 들긴 하…….”
“다른 거로.”
재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혁이 단호하게 말한다. 당황한 재희가 입을 꾹 다물자, 숍 매니저가 다른 걸 입어서 신랑님을 놀라게 해 드리자며 능숙하게 분위기를 풀었다. 이번엔 라인이 아름다운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무혁의 얼굴이 아까보다 한층 더 굳었다.
“이것도 별로…… 예요?”
재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혁은 무뚝뚝한 얼굴로 한참 재희를 응시했다. 재희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치를 살폈다.
“마음에 듭니까?”
“네? 아, 드레스 밑단이 시폰 소재라…….”
“다른 거로.”
역시나 재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혁이 말을 잘랐다. 몇 번이나 드레스를 갈아입어도 그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제가 보기엔 다 예쁜데, 무혁의 눈엔 그렇지 않은 걸까. 아니면 예쁜 드레스인데 내가 입어서 안 어울리는 걸까. 갖가지 생각이 들면서 재희는 조금씩 자신감을 잃고 지쳐 갔다.
“신부님. 이거 한번 입어 보시겠어요? 저희 숍에서 가장 비싼 드레스인데 이걸 소화하는 신부님은 잘 안 계세요. 그렇지만 신부님은 잘 소화하실 것 같아요.”
무혁의 덤덤한 반응에 오기가 생긴 숍 매니저가 깊숙하게 넣어 둔 유명 디자이너의 웨딩드레스를 꺼내 왔다. 숍 매니저가 꺼내 온 드레스를 보자마자 재희는 감탄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입어본 드레스가 기억 속에서 단번에 사라질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벨라인 드레스였다.
“정말 이거 제가 입어 봐도 될까요?”
“그럼요. 다른 드레스 피팅 비용보다 좀 더 가격이 나가긴 하지만, 입어 보시면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차마 욕심을 낼 수도, 그리고 내어선 안 될 것들은 마음에 담지 않았던 재희였다. 마음에 담아 봐야 돌아오는 건 실망이었고, 할머니의 모진 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앞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드레스를 입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재희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재빨리 드레스 입는 걸 도와준 숍 매니저가 감탄을 터뜨렸다.
“제 생각대로 정말 잘 어울리고 아름다우세요, 신부님.”
드레스는 마치 재희를 위해 맞춘 것처럼 착 맞아떨어졌다. 재희의 흰 피부와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드레스와 어우러져 화려하지만 우아했다. 마치 화보를 찍는 모델이 된 듯한 기분에 재희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신랑님도 보시자마자 감탄하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재희가 괜히 기대를 담아 물었다. 숍 매니저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훑어보며 쓰게 웃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드레스지만, 재희가 본식에 이 드레스를 입을 일은 없을 터였다. 한 번 입어 본 거로 만족하기로 했다. 문이 열리자 줄곧 피팅룸에 시선을 고정하던 무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급격하게 자신감을 잃은 재희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이것도 별로예요?”
무혁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