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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그의 이름 (107/126)


107. 그의 이름
2022.11.10.


엘리제가 중얼거리며 자리를 옮기려는 순간, 등 뒤에서 모르는 손이 쑥 나타나 엘리제 앞에 꽂힌 책을 끄집어내었다.


“찾으시는 게 이 책 아닙니까?”

‘누구지?’

고개를 돌린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꿈에서 보았던 대로 갈색 눈의 미소년이 투명한 안경 너머로 엘리제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리제보다 나이는 어려 보여도 키가 더 커서 그녀가 올려 보아야 하는.


‘이 사람! 지난번 꿈에!’

밝은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

어딘가 뾰로통하지만 잘생기고 지적인 얼굴.

그녀의 얼굴에 닿는 안경 너머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


“당, 당신은!”

엘리제가 입을 열려는 찰나에 옆에 있던 미카일과 데몬이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엘리제는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세 명의 키 큰 미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였다.


“다니엘! 네가 어떻게 여길!”

엘리제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현실에서도 기쁨과 놀라움이 섞인 얼굴로 미카일이 외쳤다.


“내가 불렀어.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더군. 벌써 예전부터 영입하기 위해 대공가에서 연락을 취했었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비밀리에?”

친동생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데몬이 스카우트해갔다는 사실에 미카일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꿈에서처럼 그가 어벙한 표정을 짓자 모두가 웃었다.


“시에델에 가기 전에 이미 하임에게 시켜서 준비하던 일이야. 그 일에 꼭 필요한 인재고.”

꿈에서 보고 들었던 내용이 그대로 현실로 되는 것이 엘리제는 마냥 신기하였다.


“엘리제 님…….”

데몬이 미소년을 소개해 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이번엔 꿈과는 다르게 데몬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그를 정중히 소개하였다.


“앞으로 저를 도와 일해줄 다니엘입니다.”

이 미소년이 앞으로 데몬과 함께 일한다고?

그가 맡을 일에는 아마도 엘리제를 가르치고 혼내는 일도 있겠지.


“처음 뵙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엘리제예요. 저는 구면이에요.”

그 말에 다니엘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녀가 엄청난 미인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모두 넋을 놓을 정도라는 것도.

자신의 형인 미카일과, 다니엘이 유일하게 믿고 따르는 데몬 역시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는데?’

“혹 아카데미를 방문하신 적이 있으신 겁니까?”

황제의 첩이었다고 했으니 황제와 함께 몰래 아카데미라도 다녀갔던 것일까?

늘 수석이라 다니엘은 좋든 싫든 공식적인 석상에서 항상 얼굴을 드러내야 했다. 그러니 서로 만난 것은 아니어도 어쩌면 그녀가 자신을 보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뇨.”

그러나 보기 좋게 다니엘의 예상이 빗나간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곳에서 뵈었어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엘리제는 천사처럼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서고의 큰 창을 통해 그녀에게로 쏟아지는 햇살과 눈부신 은발이 만나자 마치 보석처럼 빛이 부서지며 그녀가 이 세상 존재가 아닌 듯 보이게 만들었다.


‘소문대로 정말 아름답긴 하군. 그렇다 해도 주군의 배필로는 아직…….’

엘리제의 허리에 감겨 있는 데몬의 손을 바라보며 다니엘은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곧 자신과 비슷한 눈빛과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이를 발견하였다.

서고 한쪽 끝에서 일행 쪽을 바라보는 눈부신 미남자.


‘저 사람이 시에델의 왕태자인가?’

한눈에 보기에도 우아한 표정이나 자태에서 이국 왕족의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보내는 눈빛이 어떤 감정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렇군.’

자이드를 바라보는 다니엘의 눈이 반짝였다.

아무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

프시케는 그녀의 방에 멍하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온 그녀는 다소 야위었고, 가끔은 불안해 보였으나 대부분은 편안한 상태였다.


“황후, 뭐라도 들어야 합니다.”

로안이 다정히 다가와 프시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황후가 평소 즐겨 먹던 음식들로 준비해다오.”

황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시종장에게 명하자 그가 몸을 돌려 나가며 대답했다.


“예, 폐하.”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황후를 무척이나 살뜰히 챙기는 황제의 모습에 가까이 모시는 이들부터 탄복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입이 닳도록 말을 옮겼다.

황제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한시도 황후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

그러나 누구보다 그 사실을 반가워할 황후는 정작 말이 없었다.

황제에 이어 이제는 황후의 마음에 병이 든 것일까.

그래도 이토록 정성스레 황제가 살피는데, 곧 지혜로운 황후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다.

잠시 후.


“두 분 폐하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시종장의 고함에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후를 이끌었다.


“자, 함께 식사하러 갑시다.”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가 사뿐사뿐 천천히 황제의 손을 잡고 걸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제가 황후를 에스코트하는 장면을 얼마 만에 보는 거냐며 황후궁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시녀장을 맡은 백작부인은 어쩐지 붉어진 눈시울로 두 사람의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토록 황제 폐하의 애정을 바라셨을 황후 폐하께서 이상하리만큼 기운이 없으니 더욱 가슴이 아리고 아팠다.


 

***

무척이나 지적이고 잘생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눈빛이라 엘리제는 다니엘이 좀 조심스러웠다.


“이 책 맞아요.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꿈에서 본 상황이니 맞을 것이다.

그녀는 다니엘의 손에 들려 있는 서적의 제목을 확인하며 인사하였다.

책의 내용을 함께 확인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모두가 모여들었다.


“신들의 탄생과 신화…….”

소리 내어 차례를 빠르게 훑어내렸다.


“여기 있어요! 신의 소멸.”

“무어라 적혀 있습니까?”

미카일이 엘리제에게 초조하게 물었다.

표정을 보니 심정이 여러 가지로 복잡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누구보다 성하를 믿고 따랐었지?’

자신이 모시던 성하의 올바른 모습을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기꺼이 사람들을 구제하고 봉사하며 성하가 지었던 그 무구한 미소가 선명하게 떠오르겠지.

미카일은 사실,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고 신앙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져 마치 커다란 절망의 선고를 앞둔 기분이었다.

그가 성하를 지켜 보아온 세월 동안, 은발의 성인이 진심인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아니 그가 보여준 모습 중 아주 찰나라도 사실인 적이, 진실인 적이 있지 않을까.

이것은 미카일이 인간에게 가진 최소한의 믿음이었다.

그것마저 포기한다면, 자기 자신이 흔들릴 것만 같아 미카일은 두려웠다. 긴장과 답답함으로 심장이 목구멍을 통해 넘어올 것처럼 세게 조여왔다.

붉어진 미카일의 눈시울을 보며 그의 마음을 헤아린 엘리제가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며 드디어 답을 말했다.


“……반드시 진명(眞名)을 외며 성검을 사용해야 한……다?”

진명?

그나마 성검은 그들에게 있어 다행이었다. 검은 데몬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진짜 이름’이라니.

인간이 신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신의 이름까지 알아내야 한다니 엘리제는 기가 막혔다.


‘애초에 성하는 살아 있는 인간인데 신이라 치부하여 대항하는 것이 맞는 판단일까?’

혼란스러웠다. 엘리제의 마음을 읽은 데몬이 미카일에게 물었다.


“미카일. 자네, 혹 성하의 진명을 아는가?”

흰 사제복을 입은 그의 오랜 친구 역시 안타깝게도 사색이 되어 있었다.

미로니카 황궁에 성하와 처음 방문하던 날, 여정에 참여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이는 없다. 내 이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어.”

 
분명 그런 말을 성하로부터 들었더랬다.

지금 이 세상에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이는 없다고.

그 말은 누구도 성하의 진명을 모른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



“아는 사람이 혹 없을까요?”

“이름은커녕, 그분이 언제부터 살아왔는지조차 아무도 모릅니다.”

“네?”

나는 미카일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이 정도면 여러모로 사람이 아니다 싶다.

육체를 가지고만 있을 뿐, 정말 인간보다는 신에 더 가깝지 않은가.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살아왔다니.


‘잠깐,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이가 작품 속에 또 있잖아!’

로안과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회귀하여 과거로 돌아오는 여주인공.

갑자기 생각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라 뇌리를 때렸다.


‘설마!’

성하는 프시케가 특별하다는 걸 아는 걸까?

그 모든 질문의 답이 한 사람에게 있었다.


“황후 폐하를 만나 뵈러 가야겠어요.”

절로 비장한 말투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지금 당장 만나 뵙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데몬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소식에 의하면 황제가 황후 폐하의 곁을 한 시도 떠나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결국 정말로 성하가 황후 폐하를 황궁으로 되찾아왔군요!”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 돼. 자기가 갈 생각이 분명해.

성하는 분명 데몬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로안의 모습이 된 지금, 그는 데몬을 얼마든지 위험에 빠트릴 수 있었다.


“예. 역시 위험한 자입니다.”

데몬의 말이 맞았다. 그러니 더욱 데몬을 황궁으로 혼자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하는 아마도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스레 로안의 몸을 차지하고, 프시케를 되찾아 오는 연출을 통해 신하들의 마음도 홀리려는 것이겠지.

그가 계획한 대로, 황국에는 이미 변화한 황제의 바람직한 군주의 모습을 반기는 여론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하긴 그 정도는 있어야 데몬을 상대할 수 있겠네요.”

미카일도 동조했다.

사람들은 그동안 흑마법사에 대항하며 미로니카를 지켜낸 데몬에게 강력한 신뢰와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크레미언 대공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더라도, 황제를 따르도록 하려면 그 정도의 동기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조종하는 흑마법을 마음대로 사용하면서 왜 그렇게 어려운 방법을 선택했을까요? 더 쉬운 방법도 있을 텐데요.”

나도 그 점이 궁금했는데 자이드가 마침 대신 물어주었다.


“애초에 모든 이를 흑마법으로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니엘이 간단하게 답을 정리했다.


“그래서 대공 각하께 맞서기 위해 그자는 존경받을 만한 훌륭한 군주의 모습을 연기하기로 정한 듯하고요.”

‘성하는 데몬을 공격할 생각이야!’

순식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옆에서 자이드 왕태자가 반가운 소리를 해주었다.


“제가 대신 다녀오면 어떨까 합니다. 황제 폐하가 성하와 다름없다고 하여도 이웃 나라에서 온 왕태자는 귀빈이니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황후 폐하의 상태를 살피고 가능하면 용건도 전하고 오겠습니다.”

이렇게 자이드가 고마울 데가.

진정 눈물이 고일 지경이었다.

루시아가 나한테 잘못한 것도, 내 남자 욕심낸 것도 다 용서해줄게!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정말 좋겠지만요.”

이렇게까지 돕는 이유는 내가 시에델로 돌아가서 성녀가 되어주길 바라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의 계산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 마음만 생각하기로 했다.

바라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의 말과 행동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니까.


“왕태자님 감사해요.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내 말에 자이드가 환한 낯으로 빛나게 웃었다.


“그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더 무겁잖아.

반드시 보답해 달라는 말보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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