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돌아온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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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돌아온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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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돌아온 황후
2022.11.07.
‘분명 내가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은데.’
꿈을 막 꾸고 일어났을 때는 솔직히 들은 내용이 가물가물했었다.
그런데 다른 이를 통해 상기되자, 신기하게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신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신의 ……을 알아야 한다.’
기억이 맞을까?
엘리제는 초조했다. 누군가 이것도 확인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을 소멸시키는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신 거죠?”
계속 말해달라는 듯 엘리제가 미카일을 바라보자, 안경 너머 갈색 눈이 어딘가 슬픈 빛을 띠었다. 눈을 조용히 감았다 뜬 미카일이 덧붙였다.
“제가 알기로는, 그 방법이 책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고대 신화겠지.”
데몬이 입을 열었다.
엘리제의 꿈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꿈에서 그녀는 그 책을 분명 찾았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신화에 대한 서적이라면 제국과 신성국 내의 거의 모든 서적이 대공가 서고에도 있을 것입니다.”
크레미언 대공가 역시 그 많은 신화 중 하나에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신화에 관한 서적은 사실상 대공가에 가장 많이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말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꿈속에서 보았던 곳이 대공가의 서고였구나!’
예전에 마가렛과 함께 들렀던 곳.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높은 천장까지 끝없이 책이 쌓여 있던 곳.
어쩌다 황후궁의 비밀창고라고 착각했나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꿈속의 장소를 어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로안과 프시케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 먼저였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황제 폐하의 영혼도 찾아야 합니다.”
데몬이 작게 덧붙였다.
“그러네요.”
모두가 생각에 잠겼다.
성하의 영혼이 로안의 몸을 차지한 지금, 로안의 영혼은 어디 있을까?
그대로 몸 안에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영혼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을 수도.
지금의 헬리오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들이었다.
엘리제는 남 일 같지 않은 상황이라 더욱 마음이 쓰였다. 만일 프시케가 안전하다 쳐도, 남편의 몸 안에 타인의 영혼이 들어왔는데 그녀는 괜찮을까 걱정도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황후 폐하를 먼저 빨리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어서 무사한 프시케를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듯했다. 마음에 담았던 걱정이 말이 되어 엘리제의 입 밖으로 나오자 데몬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마도 황후 폐하를 찾는 일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엘리제와 일행이 의아해하는 순간 제레미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각하, 제논으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제논은 황궁의 기사 중 하나로 그가 심어놓은 세작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친히 군을 이끌고 황후 폐하를 찾으러 가셨다고 합니다.”
제레미의 말에 엘리제는 커다랗게 열린 금안으로 고개를 돌려 데몬을 바라보았다.
***
황후를 찾기 위한 수색일진대 황제는 여유롭게 말을 타고 숲으로 들어갔다.
거칠 것 없이 앞으로 향하는 그를 수십의 기사가 따랐다. 황궁을 나서며 황제는 기사들을 여러 무리로 나누어 황궁 주변과 숲을 샅샅이 살피도록 지시하였다.
“아마도 황후는 나와의 추억이 그리웠을 것이다.”
이 한마디를 던진 후에 황제는 정해놓은 목적지가 있는 양 천천히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풍경과 꽃과 풀이 어우러진 곳이 나타났다. 납치된 황후를 찾기 위한 과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질적인 상황이었다.
고전할 것이라는 모든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산속의 작은 오두막을 쉽게 찾았다.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전에도 사람이 자주 들렀었는지 주변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내부도 안락하고 따스해 보였다.
오두막 안에서 작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무언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인영이 비쳤다.
“아아, 프시케.”
그 모습을 바라본 황제가 탄식을 뱉으며 말에서 내렸다.
“폐하! 함정일 수 있습니다!”
“위험할지 모르니 신들이 먼저 가겠습니다.”
말리는 이들을 돌아보며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침착한 몸짓으로 사양을 표하고 있었다.
“호위 둘이면 충분하다.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나머지는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라.”
황제의 명이었다.
기사와 군사들은 긴장을 놓지 않은 채 숨죽여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일면 그들은 앞다투어 진격해야 했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며 기사들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잠시 후 긴장을 깨고 호위 둘과 함께 로안이 밖으로 나왔다.
믿을 수 없게도 품에는 잠든 황후가 고이 안겨 있었다.
“황후 폐하!”
모두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탄성을 질렀다.
“짐이 그동안 황후를 외롭게 하여 이리 무모한 산책을 하게 했구나.”
수십의 기사와 병사 앞에서 황제가 반성하듯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도 이미 많은 이들이 놀랐지만, 더욱 놀라운 일이 그 뒤에 벌어졌다.
황제의 눈에서 눈물이 고여 빠르게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품에 안긴 황후에게 뜨거운 물이 방울방울 떨어지자 지켜보고 있던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제가 울고 있다. 그것도 미안한 낯빛으로.
“송구합니다, 폐하.”
황국의 주인이 눈물을 흘리는 상황에 모두가 죄인이 되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모두 과인이 부덕한 탓이다. 지금부터라도 황후를 아낌없이 사랑하고 보듬을 것이다.”
황제가 황후를 안고 말에 오른 후에야 모두가 몸을 들어 그 뒤를 따랐다.
***
“각하,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계시었어요?”
나는 놀란 얼굴로 데몬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않을까, 짐작만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바로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직접 찾아내겠죠?”
“성하의 입장에서도 아무래도 그편이 여러모로 일을 마무리하기 적당할 것입니다.”
프시케 걱정은 우선 뒤로 미뤄도 되겠구나. 성하가 많은 이들 앞에서 부인을 구하는 연기를 펼치는 거라면 그녀를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 어쨌든 당장 위험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황후 폐하께도 이미 흑마법의 주술이 사용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데몬의 말을 들은 미카일이 의견을 첨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프시케는 안전하게 황궁으로 돌아오긴 하겠지만 성하의 꼭두각시가 된 상태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곁에서 지켜보던 자이드까지 답답하여 애가 탄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날 시에델로 데려가고 싶어서 온 거였지?’
시에델을 벗어나 타국에 오래 있을수록 자이드는 힘들어질 텐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제법 진지한 표정이어서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정령의 힘이 있다고는 하나, 자이드의 입장에서는 생명을 조금씩 갉아먹는 여정이다. 여기까지 와서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마음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그가 빨리 돌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실은 제가 얼마 전 꾼 꿈에서요.”
내가 입을 열자 모두가 주목했다.
“저희가 이곳 서고에서 책을 찾고 있었어요.”
“책이라고요? 저희가 같이요?”
미카일이 반색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 표정이었다.
“네. 아마도 미카일 사제님께서 말씀하신 책일지도 모르겠어요. 황후 폐하를 당장 찾지 않아도 된다면 저는 함께 그 책을 확인하고 싶어요!”
“그 말씀이 옳습니다. 당장은 성하를 상대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찾아야 할 것입니다.”
데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임을 바라보자 그가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대공가의 비밀 서고까지 모시겠습니다.”
“비밀 서고요?”
“대공가의 서고에는 안쪽에 따로 역대 대공가의 주인들만 출입이 가능한 방이 있습니다.”
데몬이 설명을 덧붙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크고 따스한 손 위로 내 손을 올렸다.
가주들만이 들어가는 공간으로의 초대라니.
“영광이에요.”
나와 데몬을 선두로 모두가 하임의 안내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
황제가 황후를 되찾아 환궁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황국 전체로 퍼졌다.
황후가 여러 연유로 힘이 들어 혼자만의 산책을 나갔다가, 밤이 깊어 황궁으로 돌아올 수 없었고 그사이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황후 폐하께서 오죽했으면 그러셨을까.”
“그런데 측근에게조차 언질을 안 하고 가셨다니 좀 의아하지 않은가?”
“내 말이 그 말일세.”
“어쩌면 잠시 현실을 외면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르지.”
“황제 폐하께서 편치 않으셨던 와중에?”
황후의 성정을 아는 이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모두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깨어난 황후조차 그 말이 사실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현실을…… 잠시 도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전 폐하와 찾았던 오두막에 오랜만에 들러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고 황후가 말하며 모두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고 심심한 사과를 전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어딘가 기운이 없어 보이는 황후를 모두가 큰일들을 겪은 후유증으로 여겼다. 평소와는 그녀의 분위기가 퍽 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눈빛이.
그리고 그런 황후를 바라보며 드디어 황제가 정신을 차렸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직접 황후 폐하를 산장에서 모시고 나오시며 눈물을 흘리셨다지 뭔가!”
“어쩌면 이를 바라고 황후 폐하께서 무리한 강수를 두신 것이 아니겠나?”
“맞아. 아무리 철의 여인이라 하여도 그동안 상처도 외로움도 깊으셨을 것일세.”
“어쨌든 황제 폐하께서 저리 마음을 다잡으셨으니 정말 다행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결단력이야 어떤 사건을 계기로 생길 수 있다고 쳐도, 사람의 성격이 돌변하고 지혜가 어찌
한순간에 생길 수 있겠는가.
황제가 그동안 얼간이 행세를 일부러 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
정교하게 세공된 나무 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히자 커다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대공가의 서고는 무척 아름답고 아늑했다. 책의 향기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연회장처럼 높이 솟은 천장 덕분에 공간에 들어서면 가슴이 뻥 뚫리는 신기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책이 아니라 나무들이 반기는 듯한 기이한 기분이었다.
“이쪽입니다.”
넓은 서고 안에 책들로 만들어진 미로를 통과하여 어느 높은 책장 앞에 다다르자, 영화 속에서나 보던 장면이 이어졌다.
데몬이 선반 위 책 하나를 끄집어내자, 책장이 통째로 옆으로 열리며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와.”
내 입에서 작게 탄성이 흘렀다.
빽빽하게 올려진 탑처럼 높은 곳까지 꽂힌 책들 사이로, 얼핏 보아도 귀한 물건들이 드문드문 함께 놓여 있어서 마치 숨겨진 유적지나 박물관 안으로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안의 공간이 생각보다 멋졌던 것도 있었지만, 사실 내가 감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곳이야! 꿈속의 서고.’
찾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 어딘가에 있는 책 속에 답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비밀 서고라 사서가 따로 없었다. 직접 찾을 수밖에.
이곳이 맞는 것 같다는 내 말에 모두가 서고 곳곳의 책장에 붙어서 신화나 신성국의 역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찾았다.
“고대, 신화……. 신화, 신…….”
중얼거리며 나는 빠르게 책들을 눈으로 훑었다.
서고에는 높은 곳에 꽂힌 책들도 쉽게 꺼내기 위해 좌우로 슬라이딩이 가능한 긴 책장 사다리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책 제목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적극적으로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이곳 어딘가에…….’
“이쪽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장소를 옮기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는데.
하얀 손이 불쑥 머리 뒤쪽에서 나타났다. 동시에 꿈속에 들었던 그 건조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찾으시는 게 이 책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