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백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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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백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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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백작부인
2022.11.14.
자이드는 무사히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예전에 엘리제의 기억 찾기를 도와준 시에델에 늦었지만 감사 인사를 전한다며 황제는 자이드를 담담히 맞이했다.
물론 그녀는 이미 죽고 없지만.
의연한 황제의 모습에 황궁에 있는 이들은 확실히 황제가 이제 안정을 되찾은 것 같다며 다행이라고 수군거렸다. 흑마법의 위기와 엘리제의 죽음에 충격이 컸었지만 말이다.
이제 황후만 원래 상태로 돌아오면 될 터인데…….
“황국이 흑마법의 위기를 넘겨 천만다행입니다. 슬픈 소식에 힘드셨다고 들었습니다.”
타나의 공격으로 부서지고 무너진 곳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많이 정리되고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위로의 말 고맙소. 고인이 된 사람에게는 미안하나, 그동안 고생한 황후를 내 더욱 아끼고 사랑할 것이오.”
자이드 앞에서도 황제는 직접 그렇게 말하며 의중을 확고히 전했다.
“황후 폐하께서 심신이 지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모국의 차를 좀 가져왔습니다. 심신을 편안케 하는 효과가 있다 합니다.”
자이드가 손짓을 하자, 시종이 푸른색 작은 상자를 가져와 황후 앞에 내밀었다.
작고 아름다운 선물에도 미로니카의 황후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 대신 황제가 상자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고맙소, 왕태자. 황후가 지금 고단한 모양이니 백작부인이 대신 받아주게.”
“예, 폐하.”
황제의 명에 시녀장인 백작부인이 자이드가 가져온 선물을 챙겨 방에서 물러났다.
황제와 얼마간의 이야기를 더 나눈 후에 자이드는 미로니카에서 며칠만 더 머물고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실은 지난번 미로니카를 방문했을 때 번화가를 둘러보았는데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잠시만 머물다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자 황제가 웃으며 기꺼이 허락했다.
시에델 왕태자의 알현은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
***
대공가로 돌아온 자이드는 자신이 보고 온 것을 그대로 전했다.
“엘리제 님께서 부탁하신 상자는 백작부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백작부인이라면 황후 폐하를 직접 모시는 시녀장입니다.”
데몬은 엘리제에게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그래도 다른 이가 아닌 백작부인에게 전달되어 다행이었다. 궁의 예법에 능하고 황후를 아끼는 그녀이니, 이국의 선물을 황후에게 한 번이라도 권할 것이니까.
엘리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이드에게 물었다.
“직접 황후 폐하께 드리지 못한 이유가 있는 거죠?”
“…….”
자이드가 잠시 말을 고르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제는 그의 태도에 더욱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황후 폐하는…….”
잠시 후 자이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숨 쉬는 인형과 같은 상태셨습니다.”
“!”
엘리제가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곁에 있던 미카일 역시 침음을 삼켰고, 놀란 엘리제의 어깨를 데몬이 말없이 감쌌다.
모두의 마음이 마찬가지여서 같은 공간에 있던 하임과 마가렛, 다니엘 또한 순식간에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부디 황후 폐하께서 그 정령수를 드셔야 할 텐데요…….”
붉어진 눈시울로 마가렛이 기도하듯 읊조렸다.
엘리제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프시케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흑마법에 조종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엘리제는 정령수를 만들어 담았었다.
그 물을 프시케가 마시게 할 수만 있다면, 잠깐이라도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 텐데.
많이 마실수록 흑마법의 효과를 없앨 수 있을 것이나 성하의 감시와 보호 아래에 있으니 성공 여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시도해 봐야 했다.
데몬의 조언대로 찻잎과 함께 자이드를 통해 전달하기로 했다.
아쉽게도 프시케가 마시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황후 폐하를 전부터 모셨던 이들은 분명 그분이 예전과 달리 많이 이상하단 것을 느낄 텐데요…….”
안타까움에 엘리제가 토로했다.
“알아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을 겁니다.”
하임이 답했다.
그 역시 주군을 모시는 입장이라, 황후궁 시녀장과 하인들이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되었다.
그것이 모시는 자들의 삶이었다.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주인에 대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삶.
섣불리 생각하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그것도 가장 강력한 주인인 나라의 황제와 황후다.
게다가 겉모습으로는 황제가 분명했으며, 황후도 분명했다.
그러니 말과 행동을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하임의 말이 맞습니다. 그리고 감히 황제 몸에 다른 이의 영혼이 깃들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입니다.”
흑마법사이자 성하의 영혼이라고는 더더욱.
데몬의 말을 듣고 다니엘이 거들었다.
“황후 폐하의 식사부터 모든 것을 황제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국의 왕태자가 가져온 심신에 좋다는 차를 황제가 그녀에게 먹일 리는 없을 것 같았다.
“황후 폐하를 원래 상태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어요.”
엘리제가 한탄하자, 자이드가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듯 말했다.
“황궁에 있다는 그 세작을 백작부인에게 보내 언질을 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세작의 정체를 들키거나 되레 의심만 받게 될 수 있습니다.”
“아아. 그럼 어찌하지요?”
엘리제는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인가!
미카일이 성호를 그으며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엘리제를 달래기라도 하듯 부드러운 저음이 들렸다.
“조금만 방식을 달리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데몬이었다.
“방식을 달리해요?”
솔깃한 금색 눈이 달가워하며 물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잘생긴 눈이 붉게 반짝였다.
***
백작부인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황후도 돌아왔고, 황제도 이런 적이 없을 만큼 황후에게 지극정성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황후가 마치 넋이 나간 것 같아서?
황제의 황후를 향한 마음이 사랑이 아닌 집착과 광기 같아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황제와 황후가 낯설고 무서울 지경이어서?
하나만 답을 고를 수 없을 정도였다.
기실 그 모든 것이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불안을 넘어 두려웠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어.’
말이 없는 황후만 보아도 그렇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그녀의 눈빛만 보아도 그러했다.
황제가 모자란 난봉꾼의 면모가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차갑고 서늘한 느낌은 아니었다.
무엇이 황제를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게 하는 것일까.
이토록 지극정성으로 황후를 아끼고 옆에서 보살피는데. 정말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곁에서.
‘너무 완벽하게 바라던 모습이시어 오히려 비현실적이라고나 할까.’
황제는 그렇다 치자.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가 모시는 분이었다.
‘적어도 이분은 내가 아는 황후 폐하가 아니다.’
이상함은 황후가 돌아온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다.
백작부인뿐만 아니라 함께 황후를 모시던 이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저…… 백작부인, 아무래도 황후 폐하께 의원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자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보필하고 계시는데 불충이 될만한 말은 꺼내지도 말게.”
그들에게 불똥이 떨어질까 봐 걱정되어 입조심을 시켰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의원을 부르고 싶은 이가 백작부인이었다. 하지만 황후를 되찾아온 첫날부터 황제는 그녀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했다.
지금 황후에게 필요한 것은 의원이 아니라, 자신의 보살핌과 사랑이라며.
황제가 갑자기 황후를 옭아매는 사랑꾼이 된 것 외에도 안타깝고 의아한 일은 또 있었다.
‘성하께서도 말씀 없이 가버리셨으니…….’
성하라도 궁에 있었다면 당장에 황후의 상태를 보여 도와달라고 청했을 것이다.
황후와 성하는 황국의 어려운 일을 함께 의논하여 도움을 받는 사이였고, 성하가 황후의 상태를 보았다면 기꺼이 신성력을 사용하여 그녀의 생기 있는 모습을 되찾아 주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신성국의 왕은 인사도 없이 궁을 떠났다.
본국에 중한 일이 생겨 모두가 잠든 사이 급히 신성국으로 돌아갔다고 황제가 직접 말했으나, 백작부인에게는 그 자체가 정말 이상한 말이었다.
‘그토록 귀한 분께서 가시는데 황제께서 홀로 배웅하셨다니…….’
황제가 그동안 성하를 얼마나 귀히 여기고 존경하였는지 황궁의 모든 이가 아는데.
그녀 말고도 이 일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귀족이 분명 여럿일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아주 간혹 그런 경우가 정말 있으니까.
그리고 청렴하고 욕심 없는 성하가 호의가 부담스러워 정말 말도 없이 떠났을 수도 있으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황후를 향한 걱정으로 마음은 더욱 아프고 무거웠다.
“백작부인, 시에델 왕태자께서 주신 이 차는 어찌할까요?”
머리를 짚고 있는 백작부인에게 옆에 있던 하녀가 조심히 물었다.
‘시에델은 약재의 효과가 탁월하다 들었는데 저것이라도 황후 폐하께 드려보면 안 될까?’
의원을 보일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차를 올려보면 어떨까.
그러나 지금은 황제의 명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숲속 산장에서 돌아온 이후, 황제는 황후가 먹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관리했기 때문이었다.
“이리 다오. 내가 황제 폐하께 여쭈어보고 오마.”
그러나 허락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푸른색 상자를 쥔 백작부인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데몬의 명을 받은 하임은 서둘러 심부름을 다녀왔다.
“잘 전달하고 왔나?”
“예, 각하. 제가 직접 전해드렸습니다.”
“수고했다.”
이제 데몬이 계획한 대로 그들이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오늘 내로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벌써 날이 지고 있었다.
“이미 명하신 대로 완료해 놓은 상태입니다.”
언제든 데몬의 명이 떨어지면 대공가의 모든 병력이 움직일 수 있게 대기 중이었다.
대공가의 집무실에 불이 밝혀진 채로 날이 밝았다.
***
“부인, 백작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본가에서?”
다음 날, 백작부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황후의 시녀장 역할을 하느라 본가에 소홀한지 오래였다. 한때는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그녀였지만, 남편과 사별한 후엔 장성한 아들에게 백작가를 맡기고 오직 황후만 보필하며 살아왔다.
오랜만에 가족에게서 연락이 왔다니,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오랜 벗인 집사가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부인께서 이리 무탈하셔서 다행입니다. 황궁에 근심이 겹쳐 가주께서도 심려가 크셨습니다. 이제 한시름 놓으실 수 있게 안부 잘 전하겠습니다.”
아들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말에 그녀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고맙네. 모두 건강히 잘 있다는 소식은 근근이 듣고 있네만 어쩐 일로 왔는가.”
갑자기 집안사람이 찾아와 반갑기도 했지만 혹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가주께서 어제 귀한 선물을 받으셨는데 부인께 가져다드리라 명하시어 달려왔습니다.”
“귀한 선물을 어찌 나를 주는 겐가?”
“안에 가주께서 보내신 편지가 있습니다. 전달만 드리고 바로 돌아오라 하셨으니 저는 이만 백작가로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시게.”
집사를 보내고 부인은 잠시 쉬겠다 이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본가에서 다른 이도 아닌 집사를 직접 보냈다. 귀한 물건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오랜만에 보낸 서신을 읽으며 기운을 내고 싶어 그녀는 조용히 앉아 선물을 풀었다.
상자 위에 반가운 필체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
아들의 서신을 읽는 부인의 표정이 환해졌다.
애정과 염려가 듬뿍 담긴 인사로 서신은 시작되어 본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귀한 손님께 어제 선물을 받았는데 정말 효과가 탁월하여 항상 무릎이 편치 않으셨던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저보다는 어머니께 보내드리면 좋을 듯하여 직접 집사를 보냅니다.』
그 뒤로도 자상한 아들은 그 귀한 선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복용하면 좋은지를 자세히 적어 보냈다. 황궁의 혼란 속에 계신 것이 늘 걱정이니 언제든 돌아와 주셔도 좋겠다는 말도 함께.
황후를 보필하는 일은 보람되고 명예로운 일이었다. 황후가 존경스럽고 따스한 사람이라 더욱 부인은 자부심이 컸었다. 역경이 있어도 힘들다는 생각 없이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래서 흑마법사가 나타나 목숨이 위험했던 때보다, 오히려 황후가 변한 지금이 더 불안하고 두려웠다. 아들의 따뜻한 말이 한없이 고맙고 더욱 기운이 났다.
저도 모르는 사이 흐른 눈물을 훔쳐내며 부인은 상자를 속히 열었다.
반가워 열었던 상자 속 선물을 보고 부인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