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뒤보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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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뒤보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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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뒤보리 부인
2022.06.06.
토리와 로떼의 두 볼이 빵빵했다.
냠냠, 오물오물.
토끼와 다람쥐가 맛있게 주는 대로 정말 잘 받아먹자, 엘리제와 마가렛은 신이 나서 더 많은 견과류와 당근을 쏟아주었다.
“토리, 로떼 정말 잘 먹는구나!”
“아응~. 너희 정말 너무 귀엽다.”
마가렛의 눈에서도 꿀이 떨어지는 행복한 빛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귀여운데 영특하기까지 해서 두 동물은 엘리제와 마가렛이 이름을 부르면 빛의 속도로 고개를 들었다.
“토리!”
멀찍이 떨어져서 불러도, 번쩍!
“로떼!”
카우치 뒤에 숨어서 불러도, 두리번두리번.
귀신같이 각자의 이름을 알아듣고 엘리제에게로 쪼르르 와주었다.
“아아! 정말 기특하다.”
부비부비. 엘리제가 두 마리를 품에 안고 볼을 비볐다.
“어디서 요렇게 예쁜 아이들이 온 걸까요?”
“그러게 말야. 얘네 없이 우리 그동안 어떻게 살았지?”
마가렛과 둘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토리와 로떼가 함께 있자 방 안이 더욱 활기차고 훈훈했다.
“그런데 엘리제 님,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마가렛의 물음에 엘리제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세상에!”
마가렛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공주의 어리석음은 마가렛의 상상도 초월하는 것이었다.
“별일이 없었으니 다행이지만 루시아 공주님은 위험한 분이네요!”
소름이 돋는지 마가렛이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응. 그래서 어떻게 혼내줄까 고민 중이야.”
“말씀대로라면 이번 일은 증거가 없으니 당장 따지긴 어렵겠어요.”
“맞아. 그래서 일단은 기회를 지켜보려고.”
“그게 좋겠어요.”
엘리제와 마가렛은 서로를 바라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준비해온 것을 조금씩 시작할까 해.”
‘원작 엘리제’의 기억은 충분히 얻었다. 미로니카로 돌아가서 로안에게 당당히 자유를 요구할 만큼. 그러니 이제 엘리제는 프시케와 약속했던 조건을 달성하고 싶었다.
“경제적 독립을 위해 사업가로 변신할 차례야.”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내일 같이 시장 조사 가 줄 수 있어?”
데몬과 셋이서.
“물론이죠! 엘리제 님과 외출이라니, 설레요!”
“나도!”
“뀨!”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신나 하자, 곁에서 토리와 로떼도 두 발을 들어 그 모습을 따라 했다.
***
“하아아…….”
데몬은 방에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이토록 긴 숨을 뱉어본 적이 있었던가.
몇 달 전 주술에 걸린 엘리제와 만난 이후로 데몬은, 그녀로 인해 처음 경험하는 것들투성이였다.
입맞춤도, 설렘도, 질투도.
그녀를 향한 강렬한 욕망과,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걱정,
그녀를 잃을까 느끼는 죽음보다 강력한 두려움,
미칠 듯한 사랑스러움까지.
그녀는 이제 하나의 말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그의 ‘모든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삶의 목표도, 삶의 의미도 그녀로 인해 새로 생겼다.
그녀를 알기 전에는 자신이 이렇게 질투가 많은 남자인지,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인지 미처 몰랐었다.
‘조금 전도 정말 위험했지…….’
그녀와의 입맞춤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완전히 이성을 잃고 온통 그녀를 탐미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어버릴 뻔했다.
그의 몸과 마음을 포함하여 시간과 재산, 지위와 권력 그 모든 것.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제 그녀만큼 가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으니.
“다행이었어…….”
정령의 힘이 데몬을 도왔다.
소중한 만큼 그녀를 더욱 아껴주고 싶었다. 계획하고 있는 것을 모두 준비한 후에 그녀를 맞이한다 해도 부족하게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하마터면 조급하게 행동할 뻔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목을 조이고 있는 크라바트와 단추를 풀고 카우치에 몸을 기댔다.
그때 톡톡톡 창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서구?’
데몬은 조용히 창문을 열고 비둘기가 달고 있는 서신을 풀었다.
미카일에게서 온 것이었다.
「황궁에 다시 흑마법사의 움직임이 있었어. 황제의 요리사가 당했다. 폐하를 노리는 것으로 보여.」
서신을 읽는 데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흑마법사가 노리는 것이 과연 로안의 목숨일까?
“내가 없는 틈을 타 힘을 회복하고 슬슬 움직이는 것인가…….”
자신이 엘리제의 몸에서 그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흑마법사는 분명 타격을 입었었다. 그리고 회복했을 만큼의 충분한 시일이 흘렀다.
“그래도 이건…… 마치 겁만 주기 위한 행동들처럼 보이는데.”
그러나 실력이 비슷한 상대와의 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하기 위해 기선제압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미로니카에는 강력한 마력을 가진 데몬이 있으니까.
‘상대의 사기를 먼저 꺾고 공격하기 위함인가?’
로안이 겁에 질린다면 어쨌든 손쉽게 공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의아했으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흑마법사가 미로니카 황제를 노리고 있다는 것뿐.
‘원하는 것은 황위인가?’
아니면 황국에 있는 ‘그 무엇’인가.
데몬은 로안의 소유인 것들에 주목하였다.
***
다음 날 아침, 그레이스와의 수업 시간.
“훌륭합니다. 이 정도면 모든 부분에서 평균 이상의 자질과 기품을 갖게 되실 것 같은데요.”
그레이스가 칭찬했다. 왕후는 진심으로 뿌듯했다. 지난 수업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엘리제는 정말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학생이었다.
그녀는 첫 배움이 느린 편이나 겸손하였고 모르는 부분에 있어서는 솔직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성실하게 잘 따라왔으며, 어렵고 힘든 부분에서는 오기와 인내로 버텼다.
‘솔직히 이 정도로 잘 소화할 줄은 몰랐는데…….’
그레이스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긴 수업 시간,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는데 엘리제는 지치지 않고 수업에 집중했다.
그레이스가 보아온 많은 왕족이나 귀족 영애들은 귀하게 자란 탓인지 힘들고 모진 상황에서 쉽게 포기하거나 현실과 타협했다. 때로는 머리를 굴려 핑계를 만들어내며 고난을 회피해서 성장이 더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엘리제는 정말 다르구나.’
자신의 딸인 루시아와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엘리제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이기 때문일까?
“게다가 습득하시는 속도가 웬만한 귀족 영애들보다 훨씬 빠르십니다. 시에델의 역사나 예법은 앞으로 더 가르쳐 드릴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모두 왕후 마마의 가르침 덕분인걸요. 감사드려요.”
그래, 공부만 하며 보냈던 현실에서의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을 이렇게 보상받는가 보다!
‘우리나라에서 초중고 도합 12년 동안 수십 개의 과목 이수, 대학 학과 공부와 취직을 위해 10개 이상의 자격증 또 공부, 뒤이어 공무원 시험 준비까지 했던 나다!’
공부에는 이골이 났지만, 또 그만큼 배우는 것에 자신이 있기도 했다.
‘고생한 것에 비해 너무 해본 것도 없이 일찍 죽은 것 같아 억울했었는데…….’
어쩐지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재능을 소설 속에서 인정받고 있다니 조금은 우습고 슬펐지만 그래도 여기에서라도 쓰임이 있다니 그게 어딘가.
“다음 수업까지 복습해 오시면 그동안의 내용을 확인하는 시험을 한 번 보겠습니다.”
그레이스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엘리제가 지금껏 얼마만큼 소화했는지 확인하고, 더 많은 내용을 알려주겠다 예고하고 있었다.
“오후에 혹시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본후와 차 한 잔 함께 해주시겠어요?”
난처하게도 그레이스가 부탁을 해왔다. 어쩐지 대회 이후 엘리제에게 더욱 애정을 갖는 듯 느껴졌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외출을 할까 해요.”
“죄송은요. 제가 먼저 엘리제 님의 일정을 확인하지 않은 탓이지요. 다른 날이라도 꼭 차 한잔 나누어 주세요.”
그러더니 그레이스가 외출에 필요한 그 무엇이든 요구하라며 시종을 시켜 엘리제에게 자금을 주려 했다.
“미로니카에서 가져온 것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사양했더니 아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잘해주셔서 미안할 지경이네.’
그레이스가 워낙 마음을 써주니 루시아를 좀 봐줘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데몬과 방으로 돌아온 나는 마가렛을 불러서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특별히 하고 싶으신 일이 있으십니까?”
나는 데몬에게 시간을 내어달라 부탁만 했을 뿐 무엇을 할 생각인지는 아직 말을 안 했었다.
“그럼요. 사업은 처음이니 많이 도와주세요.”
시에델에서 상품화할 수 있는 것들을 알아보고 가능하다면 판매처도 뚫고 싶다 설명했다.
“시장 조사군요.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원하신다면 대공가를 바로 이용하셔도 됩니다.”
“미로니카 황국에서는 그렇게 할게요. 일단 시에델에서는 한 번 맨몸으로 부딪혀보고 싶어요.”
가명도 벌써 만들어 놨는걸요!
“오늘 하루는 뒤보리 부인이라 불러 주세요.”
마담 뒤보리.
“예,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데몬 옆에서 마가렛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성함 어딘가 낯이 익은데요? 뒤바리라고 들어본 거 같아요.”
“뀨?”
마가렛의 가방 속에서 토리와 로떼도 고개를 쏙 내밀었다.
너희도 그렇다고? 앗 그런데, 잠깐!
“마가렛, 설마 뒤바리 부인도 아는 거야?”
마담 뒤바리.
그녀는 현실 속 실존 인물로 프랑스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였다. 즉, 첩이다. 그럼에도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과 실권을 행사했다. 그 이름이 후세에 알려질 만큼.
사실 ‘뒤보리’는 뒤바리 부인이 떠올라 만든 가명이었다.
‘어딘가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지.’
나도 황제 로안의 첩이고, 어쩌다 보니 유명해졌으니까.
“저도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왠지 모르게 익숙해서요.”
마가렛이 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으니 더 신기하다!
작명 빼고는 못 하는 게 없는데, 모르는 것도 없는 거 같아.
저기 마가렛, 진짜 정체가 뭐야?
***
이른 오후, 시에델의 중심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식사 준비를 위해 장을 보는 여인들, 물건들을 수레로 옮기는 남성들,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이들로 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중 한 상점으로 검은색 긴 후드를 쓴 여인과 남성 하나, 하녀 하나가 들어갔다. 주로 귀족이 이용하는 물품이나 장식품을 취급하는 곳으로 상점 중 규모가 큰 편이었다.
딸랑.
손님이 들어오자 문에 달아놓은 방울이 울렸다. 주인이 문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 히익!”
상점 안으로 들어선 여인이 후드를 벗자 은빛과 함께 쏟아지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상점 주인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뱉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찾, 찾으시는 것이…… 흐익!”
이번에는 여인의 옆에 있는 남성이 후드를 벗었다. 붉은빛을 내는 두 눈과 잘생긴 얼굴에서 오는 위압감에 주인은 저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었다. 저절로 숨이 멈춰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인 미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찾고 있는 물건이 있네만, 여기 계시는 부인께 몇 가지 알려드릴 수 있는가?”
빼어난 외모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와 옷가지의 재질이 분명 예사롭지 않았다.
장사를 평생 해 온 주인은 벌써 두 사람이 높은 귀족이거나 왕족일 수 있겠다 생각했다.
두 사람 뒤로 시종으로 보이는 여인까지 있으니 틀림이 없다.
‘이건 분명 대어(大魚)다!’
설마 눈앞의 두 사람이 시에델을 뜨겁게 달군 엘리제와 크레미언 대공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대신 상인의 촉이, 두 사람이 자신에게 큰 수익을 내줄 것이라 알려주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상인의 말을 듣고 엘리제가 곱고 아름다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