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검은 연기, 검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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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검은 연기, 검은 물
2022.06.09.
엘리제는 상인에게 장식품이나 귀부인들의 화장품 등이 거래되는 양과 주기, 요즘 인기상품 등을 확인하였다. 두 가지 모두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 이용 가능한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그녀의 체력으로 정령수를 대량 생산해내는 것은 아직 역부족이다. 그러니 정령수를 섞은 화장품을 만들고 고급화 전략을 사용하여 소량의 물건만을 고가에 판매할 생각이었다.
‘차별화된 브랜드 가치만 가진다면 성공할 수 있겠어.’
명성을 쌓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마케팅 전략을 잘 세워서 광고할 생각이었다.
일단 첫 조사 결과는 희망적이었다. 화장품의 거래량이 생각보다 많았고, 엘리제가 준비한 스케치 중 일부를 본 상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큰 관심을 가졌다.
“무척 매력적인 무늬입니다! 시제품 몇 가지만 내놓아서 잘 팔리는지 며칠 지켜보면 이후 판매량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잘 알았어요.”
질문을 마친 엘리제가 몸을 돌려 나가려 하였다. 데몬과 마가렛이 그녀를 따랐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용건은 그게 다이십니까?”
주인이 무척 아쉬운 표정으로 엘리제를 붙잡았다. 그녀가 보여준 우아한 무늬는 귀족적이면서도 어딘가 독특해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장식품에 새겨서 내놓기만 해도 분명 큰 인기를 끌 것이었다.
‘잡아야 한다!’
“네, 그럼 이만…….”
“저, 혹시 제품의 생산과 판매를 저희와 함께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자체 공방이 있습니다.”
상점 주인이 웃으며 두 손을 모아 비볐다. 눈웃음이 무척이나 계산적으로 보였다.
“아직 물건을 생산할 방도를 결정하지 못했으니 이후 필요하면 다시 오겠어요.”
“잠, 잠시만요. 그렇다면 혹시 물건 이름이나 손님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옳거니, 걸려들었구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엘리제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마담 뒤보리.”
“마담 뒤 보리요?”
뒤를 볼 거라고? 상점 주인이 저도 모르게 다시 물었다.
“물건이 너무 좋아서 가다가 뒤돌아보게 될 거라는 뜻이에요.”
“오오! 그렇게 깊은 뜻이!”
크게 감탄하는 주인을 뒤로하고 엘리제 일행이 상점을 나왔다.
“꼭 다시 방문해주십시오.”
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엘리제가 물건을 만들면 가장 먼저 뚫고 싶은 거래처는 따로 있었다.
‘시에델 왕궁.’
마담 뒤보리가 야무진 생각을 하며 자신 있게 웃어 보였다.
***
미카일이 신성국으로 보냈던 전서구가 쉼 없이 날아서 다시 돌아와 준 덕에 바로 다음 날 답신이 도착했다.
“성하께서 내일 바로 출발해 주신다고 합니다!”
미카일의 한 마디에 프시케는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그에게 고마웠다.
“사제님, 정말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께는 성하께서 그저 좀 서둘러 와주시는 것으로 말씀드릴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로안을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예. 그게 좋겠습니다.”
황후의 명으로 미로니카 황국은 아침에 도착한 서신 한 통에 정신없이 손님맞이를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로안은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크게 들떴다.
“감사한 일이오. 성하의 내방은 황국의 크나큰 영광이니, 황후는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주시오.”
로안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흑마법으로부터 자신과 미로니카 황국을 지켜줄 구세주. 게다가 그 구세주께서 엘리제와 만날 날을 앞당겨 주실지도 몰랐다.
그러니 무척이나 흥분되고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사제님 말씀으로는 성하께서 오시는 길에 혹 빈민들을 만나시게 되면, 약간의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본래 예정되어 있던 20일 후보다는 빠를 것입니다.”
하루 이틀 더 시일이 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황국은 성하를 맞이하기 위한 대대적인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이제야 좀 살길이 보이는구나.’
프시케는 그야말로 어둠 속에서 광명을 찾은 기분이었다.
‘일단, 도착하시기 전까지 성하에 대해 기억나는 것을 정리해봐야겠다.’
오랜만에 밝은 표정으로 들떠 있는 로안의 곁에서 프시케가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
며칠간의 시장 조사를 통해 엘리제는 용기 제작을 맡길 적당한 공방과 계약을 진행하고 착수금을 지불하였다. 데몬에게 받은 투자금으로.
“첫 번째 투자자가 되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앞으로 그녀가 맞이할 모든 ‘처음’을 갖고 싶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에요.”
엘리제가 밝게 웃었다. 그 미소에 데몬은 쌓인 피로와 고민이 한순간에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화장품은 직접 제조하실 계획이십니까?”
“네, 만능 비서 마가렛과 함께요!”
엘리제가 외쳤다. 그녀의 유능한 마가렛은 심지어 어릴 적부터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 쓰고 있었다. 고가의 소모품이니 평민 여성들이나 하인, 형편이 여의치 않은 몇 귀족 부인들도 비슷한 사정이라 했다.
“덕분에 시제품이 며칠 안으로 나올 것 같아요!”
정령수를 비롯한 주재료들이 이미 준비되었다. 정령의 힘 덕분에 그녀가 만든 화장품에서 고유의 장미 향이 났다.
“토리와 로떼도 도와주고 있어요.”
작은 다람쥐와 토끼가 한쪽에서 열심히 주걱을 들고 대접에 담긴 크림을 휘젓는 중이었다.
엘리제의 방에 행복하고 씩씩한 기운이 가득한 그림 같은 풍경이 연출되었다.
“예감이 좋습니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데몬이 미소 지었다.
“그럼요! 어느 분의 투자를 받았는데요.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엘리제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
같은 시각 시에델의 공주궁.
루시아는 며칠간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그녀의 방에 홀로 있었다.
똑똑똑. 시종 하나가 공주의 방문을 두드렸다.
“공주마마, 식사는 하셔야 합니다.”
“……그 앞에 놓고 가면 잠시 후에 들겠다.”
“마마…….”
사냥 대회와 축제 이후 루시아의 마음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어두운 감옥과 같은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엘리제의 것을 빼앗고 싶어.”
그녀의 미모, 정령의 힘, 그리고 데몬을.
온통 어두운 방 안으로 스미는 빛이라고는 방문 틈으로 들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틈으로 식사를 전해준 시종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때.
쉬이익.
‘저, 저게 뭐지?’
루시아는 눈을 뜨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문틈 사이로 빛 말고 다른 것이 함께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여, 여봐라…….”
밖에 있는 누군가를 부르려는 찰나. 검은 연기가 뭉쳐 여인의 형상을 이루더니 목소리가 들렸다.
“쉿! 소원을 들어주러 왔어.”
“!”
소름 끼치는 여인의 목소리.
루시아는 공포에 질려 더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너, 누군가를 저주하고 있었지 않아?”
덜덜덜. 공주의 온몸이 떨려왔다.
“너, 너는…….”
“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고. 여긴 정령의 힘이 강해서 연기로밖엔 올 수가 없더라고. 번거롭지만 이렇게라도 거래를 제안하고 싶은데.”
나른한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주로 질투를 받는 모양이군, 엘리제는.”
지난번엔 친구가 저주하더니, 이번엔 공주인 걸 보니.
“뭐, 나야 상관없지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검은 연기가 공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엘리제의 죽음이야?”
“!”
루시아가 애써 부정하던 소원을 정확하게 짚어 낸 목소리에 공주는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다.
“아니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공주의 눈이 크게 열렸다.
“그, 그럴 수 있다고?”
그렇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고 행복할까.
엘리제를 치워버리고 그 자리를 자신이 대신할 수만 있다면.
모후께 인정받고, 데몬에게 사랑받는 루시아로.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자, 이리 가까이.”
질투에 눈이 먼 공주가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달콤한 말에 이끌려 검은 형상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
미카일이 예고한 바와 같이 하루가 더 걸려 신성국의 일행이 미로니카 황국에 도착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어려운 사람은 있는 법이었다.
오는 길에 신성국의 왕 일행은 정말로 빈민들을 만났고, 모두의 예상대로 그들의 어려움을 성하께서 모른 척하지 않았다.
말과 마차를 포함하여, 그들이 가진 모든 걸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나서야 신성국의 일행은 다시 미로니카의 황궁으로 향했다.
가진 것 없는 하얀 옷에 흰 후드를 쓴 소박한 그 일행이 황국의 수도에 다다르자, 로안과 프시케가 한달음에 멀리까지 마중을 나왔다.
“빛의 후계자, 신성국의 성하를 뵈옵니다.”
대대로 강력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신성국의 왕은, 그 전대의 왕이 다음 대 왕의 미래를 보고 그에게 이름과 호칭을 내렸다.
헬리오 역시 선대 왕이 미리 지어놓은 이름을 하사받았다. 헬리오타나토스. 긴 이름을 줄여서 헬리오로 불리며 살아왔으나 왕의 자리에 오른 후로는 이름이 아니라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호칭, 빛의 후계자.
지금 그를 ‘헬리오타나토스’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는 이 세계에 없었다.
로안과 프시케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하고 신성국 일행을 맞이했다.
어느새 다가온 미카일도 함께 자신의 주군을 반겼다.
“먼 곳까지 귀한 행차를 해주시니 황국 역사의 큰 영광입니다.”
로안은 감동으로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헬리오가 안타깝고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미로니카의 황제께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셨던 것이 분명하군요. 미카일 사제를 통해 대강의 내용을 전해 들었습니다.”
예상보다 젊고 따뜻한 음색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헬리오는 본래 마음이 따뜻하고 타인에게 쉽게 공감하는 사람이었다. 로안의 힘든 얼굴을 보자, 저도 마음이 울컥하여 로안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하!”
로안과 프시케는 그의 인품과 모습에 순식간에 성스러운 교화를 경험했다. 행동과 말투, 눈빛과 심지어 걸음걸이조차 그는 겸손하고 고결하였으며 동시에 무해하였다.
후드를 벗고 황국으로 들어서는 헬리오의 얼굴에 프시케는 다소 놀랐다. 분명 이번 대 신성국의 왕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바로 뒤를 따르는 미카일만큼이나 젊고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강력한 신성력에는 젊음을 유지하는 힘도 있다더니, 사실인가 보구나.’
프시케는 외모마저도 선함의 결정체를 보여주고 있는 하얀 긴 머리의 젊은 성하께 경외감과 동시에 호감을 느꼈다.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와서 따뜻한 음색과 말로 로안을 위로해 주는 신성국의 왕이 고맙지 않을 리가.
게다가 일국의 왕으로서 자리를 비우고 오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계시는 동안 부디 편히 계셔주십시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프시케가 성하를 선두로 한 신성국의 일행을 정성껏 안내하였다. 마차마저 빈민들에게 주고 와서 그들은 걸어서 황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황국에서 준비한 화려한 마차를 헬리오는 조심스럽게 거절하였다. 넓은 황궁의 입구에서 현관까지는 거리가 상당했다.
“제 두 다리로 걷는 것이 더 좋습니다.”
소박하고 거추장스러움 없는 발걸음으로 헬리오가 나아가자, 로안과 프시케도 그 옆을 따르며 걸었다. 미카일은 말없이 헬리오의 뒤를 따랐다.
하얀 옷의 신성국 일행들과, 로안, 프시케,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들이 모두 걸어서 입구를 지나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궁의 현관으로 향하였다.
크고 화려한 정원과 숲이, 청빈하고 소박한 성하의 일행과 극명하게 대조되어 프시케는 처음으로 화려한 황궁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빈민을 돌보지도 않고 이토록 화려하고 큰 황궁을 가진 황가로 보이겠구나.’
심지어 빈민에게 모든 걸 나누어주고 걸어서 황궁으로 들어가고 있는 성하가 어떤 생각을 할지 예상되었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당장에 황국의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고 황궁의 살림도 더욱 청빈하게 꾸려야겠다고 생각하는 프시케였다.
“이쪽입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서둘러서 일행을 모시고자 정원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화려한 정원의 정점을 보여주는 화려한 분수가 눈부신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지는 보석처럼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분수에서 쏟아지던 물이 갑자기 검은색으로 변하며 치솟아 올랐다.
촤아악!
“꺄악!”
“폐하!”
“성하!”
끓어오르듯이 부글거리며 형체를 띠더니 검은 물이 앞을 지나던 헬리오와 로안, 프시케를 덮쳤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모두가 혼비백산한 상황에서 황후는 호위들에게 보호받고, 로안은 바로 곁에 있던 헬리오에 의해 옆으로 밀쳐졌다. 위험한 순간에 헬리오가 자신의 몸을 던져 로안에게 쏟아진 검은 물을 막아낸 것이었다.
“끄으으으……….”
한쪽 팔이 덮쳐져 헬리오는 끔찍한 고통 속에 있었다. 마치 닿은 모든 것을 태우고 녹이는 용암과 같이, 검은 물에 닿은 헬리오의 왼쪽 팔이 거품과 함께 검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성하!!”
하얗게 질린 신성국의 사제들이 모두 달려와 그를 둘러쌌다. 곧바로 다섯의 사제들과 그들의 왕인 헬리오가 온몸에서 하얀빛을 뿜어내며 신성력을 사용하였다.
여섯 명이 동시에 막강한 신성력을 사용하자, 황궁이 눈을 뜰 수조차 없는 밝은 빛에 휩싸였다.
“아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눈부신 빛 사이로 헬리오의 녹아내리던 팔이 치유되고 있었다. 더불어 그들을 공격하고 헬리오의 팔을 잡아챘던 검은 분수의 물도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흑마법의 힘을 강력한 빛과 함께 몰아낸 신성국의 왕이, 평온해진 얼굴로 쓰러진 로안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황제 폐하?”
다쳤던 사람은 그인데, 도리어 손을 내밀어 로안을 붙잡고 일으켜주고 있었다.
로안과 프시케는 그만 경외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온몸이 떨려왔다.
그들 앞에 서 있는 헬리오가 보여주는 신성은 인간의 것이라 보기 힘들었다. 그의 말과 행동, 그리고 신성력은 마치 그를 자신들보다 한 단계 위의 존재로 느껴지게 했다.
신.
‘신이시여!’
로안은 속으로 외쳤다.
자신들을 흑마법의 지옥으로부터 완벽히 구원해줄 메시아.
헬리오가 로안을 구하느라 희생하여 검게 얼룩이 진 왼쪽 팔을 들어,
그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며 그를 일으켰다.
“아!”
로안과 프시케는 너무나 거대한 신성 앞에 기적을 목도한 이가 되어 헬리오에게 무릎을 꿇었다.
신성국의 왕께서 방금,
미로니카 황국 황제의 목숨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