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심장에 나쁜 남자2021.12.02.
“각하? 어디 가십니까?”
하임이 갑자기 집무실을 나서려는 데몬을 보고 물었다. 골치 아픈 매점매석 이야기를 할 때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주군이 뜬금없이 키스의 맛과 향기를 묻더니 이번엔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설마 엘리제 님께 가시는 건 아니겠지?’
불안했던 하임이 혹시나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무장. 지금 당장 확인해 볼 것이 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지금요? 매점매석보다 중요한 일인가요?
“하지만 각하, 조금 전 영지와 관련해 보고드리던 중대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데몬은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게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하임이 조용히 집무실을 나서는 데몬의 뒤를 따랐다. 크레미언 대공가의 연무장은 무척 넓었다. 곳곳에 각종 훈련을 위한 장소가 있었고, 사병의 수가 황국에서 가장 많았으므로 훈련장 역시 그 규모가 컸다. 데몬과 하임이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훈련과 대련 중이었던 수많은 자들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각하!”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게. 구석만 잠깐 쓰겠네.”
데몬은 넓은 연무장을 한참 걸어 대공가의 커다란 성벽과 맞닿은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은 특별히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벽 아래로, 아주 오래전 마물을 상대할 때 사용했다던 강력한 광석을 쌓아 한 겹의 벽을 더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마물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졌지만 대공가에서는 그 돌들을 다른 목적을 위해 남겨놓았다. 대대로 대공가의 가주가 마력을 시험하거나 연마하기 위해.
‘혹시 모르니 일부만 개방해야 한다.’
자신이 느끼는 바가 맞다면 조심해야 했다. 훈련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데몬은 일부러 가장 먼 곳 구석을 골랐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 내려놓고 소매를 걷어올렸다. 단단하고 건강한 굵은 팔이 드러났다. 데몬은 모두를 등지고 광석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벽을 향해 섰다. *** 엘리제는 아직도 귀빈실에서 달아오르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였다.
‘가능한 오래, 횟수는 자주일수록 좋습니다.’
데몬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돌았다.
‘당신은 그게 괜찮은가요?’
묻고 싶었다. 그런 제안을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진지한 얼굴로 했던 그의 속마음이 궁금했다. 어쩌면 그는 주술만 풀 수 있다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데 입맞춤을 반복하는 것에 아무런 동요가 없을 수 있을까?
‘데몬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원작에서도 그는 일밖에 모르는 철저한 성격이었으며 프시케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소설 속 설정은 그러하지만, 어쩐지 자신이 직접 본 데몬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겉보기와는 다른 예상외의 다정한 면모가 있었으니. 혼자만의 착각이려나?
“하, 모르겠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입맞춤을 허락해달라던 그의 말에 뭐라 답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자꾸만 그가 한 제안과 어제 일이 떠올라 아무래도 바깥바람을 좀 쐬며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았다.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불렀다. 곧 공손한 모습의 집사 제레미가 나타났다.
“저, 산책을 좀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제레미의 허락을 받고 엘리제는 레이나와 함께 방을 나섰다. *** 바람이 불고 햇살이 드는 곳으로 가고 싶어 엘리제는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어제의 분수가 떠올랐다. 고통이 남은 듯이 몸이 절로 오그라들고 떨려왔다. 재빠르게 발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조금 더 걷자 어디선가 둔탁한 마찰음과, 기합 소리,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가 연무장인가 보다!’
책 속에서 설명으로만 읽었던 내용을 직접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대가 되어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 같이 가, 엘리제.”
곁을 따르던 레이나도 서둘러 쫓아왔다. 긴 통로를 따라 달리니 빛이 들어오는 출입구와 테라스 형태의 널따란 난간이 눈에 들어왔다. 훈련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 끝에 다다른 엘리제의 눈에 드넓은 연무장과 수많은 사병들, 그리고 저 멀리 검은 머리의 크레미언 대공이 들어왔다.
‘와! 데몬도 있잖아?’
잠깐 사이에 다시 본 것인데 왜 이리 반갑지? 제법 먼 거리임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크고 다부진 그의 실루엣이 단연 돋보였다. 검은 머릿결이 보기 좋게 흩날렸고 소매를 걷은 검은 셔츠 차림의 모습이 새로웠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난간에 상체를 기대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번쩍! 쿵! 콰광. 저 멀리 광석으로 이루어진 한쪽 벽이 그대로 무너지며 땅이 흔들렸다.
“꺅!”
갑작스러운 진동과 큰 소리에 엘리제와 레이나가 소리를 질렀다. 데몬이 있던 자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깜짝 놀란 엘리제의 눈이 크게 열렸다.
‘안 돼! 설마!’
눈앞이 하얘지고 정신이 없었다. 심장이 멈춘 기분이었다. 그가 다치기라도 한 것이면 어쩌나 불안하고 초조하던 그때, 연기가 걷히고 멀쩡한 모습의 데몬이 손을 뻗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아…….”
저도 모르게 엘리제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내쉬어졌다. 조금 전 엘리제와 레이나의 비명 덕에 훈련장에 있던 몇몇 사병들은 그녀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 눈에 들어온 엘리제의 모습은 갑자기 터진 폭발음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천상의 사람처럼 아름다웠다. 엘리제를 처음 보는 이들은 더욱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련하던 중에 순간 엘리제에게 넋을 놓은 자도 있었다.
“어이! 어딜 보는 거야?”
그의 맞은편 상대가 평소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으핫!”
“헉!”
챙.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검날이 순식간에 핑그르르 공중을 돌며 날았다.
“큰, 큰일이다!”
포물선을 그린 검이 정확히 엘리제와 레이나가 있는 곳을 향했다.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무언가가 회전을 하며 날아오고 있었으나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엘리제는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위험해!”
촤악.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바람이 불며 엘리제와 레이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엘리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단단한 품에 갇혔다.
“괜찮으십니까?”
데몬이었다. 자상한 저음의 목소리에 몸이 울리고 심장이 널을 뛰었다. 그가 저 먼 곳에서 날듯이 와서 엘리제를 감싸고 그녀를 향해 떨어지던 검을 마력으로 부숴버린 것이다. 흩날리는 쇳가루를 보며 엘리제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의 마력은 벽을 부수고 검을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 만큼 강력했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리서 가슴 철렁하게 걱정시켰던 그가, 단숨에 그녀에게로 와서 목숨을 구해주었다.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는 기분이었다. 빠르게 뛰다 못해 터질 것처럼 아팠다. 바로 눈앞에 그의 검은 머리가 바람에 날려 반짝이고,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은 더욱 진한 붉은빛을 내고 있었다. 안겨 있는 단단한 팔과 다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포근하고 따듯했다. 엘리제는 마치 온몸이 옭아매진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엘리제가 겨우 정신을 차려 인사를 하며 일어났다. 하지만 곧바로 휘청거렸다.
“엘리제!”
레이나가 외쳤다. 엘리제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데몬이 다시 한번 엘리제를 품에 안았다. 엘리제의 하얀 얼굴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어지러우십니까?”
“아, 이제 괜찮아요.”
다리가 풀려서지만, 어지럽기도 했다. 그가 너무 눈부셔서. 목숨이 위험했는데, 심장이 철렁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신이 난 듯 마구 뛰었다.
‘이 남자 나쁘네. 내 심장에.’
입맞춤도 나쁜 맛이더니 이제 그의 존재 자체가 자극이었다. 레이나와 제레미가 얼른 엘리제를 부축했다. 그때, 대련 중에 검을 놓쳤던 이와 그의 파트너가 달려와 대공과 엘리제에게 엎드려 사죄하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면목이 없습니다.”
두 병사를 놔두고 엘리제와 일행을 먼저 방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데몬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놀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곳은 훈련하는 곳이라 위험할 수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서 쉬고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병사에게는 화가 났지만, 자신이 갑작스레 마력을 개방한 탓일 수 있기에 엄하게 주의를 주고 훈련을 배로 늘리라 명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데몬의 눈빛을 보고 두 병사는 이미 수명이 반으로 줄어든 기분이었다. 저 멀리서 하임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각, 각하. 어떻게 그렇게 빠, 빠르…… 헉, 헉.”
연무장 끝 데몬의 근처에 있다가 순식간에 엘리제 근처로 날듯이 달려간 데몬을 쫓느라 하임은 그 넓은 연무장을 가로지르며 상당한 거리를 달려야 했다.
“모두 다 무사하셔서, 헉, 다행입니다.”
달려오는 길에 엘리제와 일행을 구해내는 놀라운 모습도 물론 보았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은 아무래도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헉. 어찌 된, 일이십니까. 마력량 조절에 실패하시다니요. 설마, 그 시기가…….”
조금 전 굉음을 내며 데몬이 광석으로 된 벽을 부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라, 되레 강해졌다.”
“네? 뭐가요. 설마…….”
“그래.”
데몬이 조금 전 엘리제의 일행이 들어간 입구를 바라보며 가늘게 눈을 떴다. 본래 마력은 사용하면 그 양이 줄어든다. 자신은 이틀 전 황궁에서부터 엘리제의 손을 잡고 미미한 양이지만 마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제는 주술을 끊어내기 위해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며 상당한 양의 마력을 사용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가진 마력은 처음 황궁으로 출발했을 때보다 당연히 줄어들었어야 맞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 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의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 폭발은 그것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약간의 마력만 개방하였으나 그 결과는 평소와 달랐다. 데몬이 하임에게만 조용히 일렀다.
“어제의 입맞춤으로 마력이 더 강해졌다.”
“힉!”
하임은 소리 없이 탄성을 삼켰다. 맙소사.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엘리제는 반드시 자신의 주군 곁에 있어야만 했다. 다름 아닌 그녀가 크레미언 대공가의 운명을 쥔 존재였으므로. *** 엘리제는 방으로 돌아와 여전히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레이나가 따듯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이제 좀 심장이 제 속도를 찾은 것 같았다. 너무 쿵쿵대서 아까는 곧 터지는 줄만 알았다. 그토록 정신없고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도, 자신을 품에 안고 목숨을 구해주었던 데몬의 얼굴만이 가득했다. 바라보면 주변이 멈춘 듯 고요히 느껴졌던 그 붉은 눈빛도.
‘이 정도면 나 중증이구나. 아님, 당연한 건가?’
목숨을 구해준 이에게 두근대는 것이.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그에게 계속 신세를 지게 되는 것 같았다.
“뭐라도 보답을 해야겠어.”
결심하고 있는 엘리제 곁에 레이나가 다가와 물었다.
“엘리제 괜찮아? 아까는 정말 너무 놀랐어.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
걱정해주는 친구가 무척 고마웠다. 곁에서 이렇게 든든하게 말해주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혹시 배고프지는 않아? 긴장이 풀려서 몸이 더 지칠 텐데 닭고기 요리를 준비할까 하고.”
“닭 요리?”
따듯한 음식을 생각하자 절로 몸이 노곤하게 풀리고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레이나, 나도 주방을 좀 사용해도 될까?”
“엘리제 네가?”
로안의 첩이 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요리를 하지 않았던 엘리제였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레이나가 놀란 듯 물었다.
“여쭤보면 흔쾌히 허락해주실 것 같아. 그런데 갑자기 주방은 왜?”
“생명의 은인께 작은 보답 하나 할까 하고.”
벌써 기분이 좋아진 엘리제가 빙긋이 웃었다. *** 확인을 마친 데몬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씻고 나왔다. 연무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썼으니 그 상태로 엘리제에게 갈 수는 없었다. 함께 대공가 내에 있지만 언제 또 주술이 발동할지 알 수가 없으므로 그는 최대한 많은 시간 그녀의 곁에 있을 생각이었다. 하임 역시 데몬의 방에 함께 있었다. 조금 전 데몬이 확인한 사실은 가문의 무척이나 중요한 비밀과 관련된 내용이었고, 다른 이에게 발설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데몬의 방에서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가려는 참이었다. 똑똑똑. 누군가 데몬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하임이 데몬을 대신해서 물었다.
“저, 엘리제예요.”
엘리제라고? 그녀가 직접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데몬이 토끼 눈이 되어 방문을 열어주었다. 문 앞에는 은색 트레이를 든 엘리제와 그 옆에 제레미가 서 있었다.
“제가 곧 가려고 했습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이제 막 씻고 나온 그에게서 물기 어린 향기가 확 느껴졌다. 윽, 심장을 부여잡고 싶은 것을 꾹 참았더니 엘리제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덕분에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인데 좀 만들어봤어요.”
그녀의 등장과 동시에 이미 훌륭한 음식의 냄새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요리는, 설마.’
데몬의 표정이 어딘가 난처해진 것 같아서 엘리제는 당황스러웠다.
“혹시, 죽 못 드세요?”
‘죽이라고?’
“아닙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음식과는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데몬은 트레이를 받아들었다.
“아까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제대로 감사 말씀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놀라시게 해서 오히려 죄송했습니다.”
접시를 덮은 하얀 천을 걷어올리자,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 나타났다. 데몬의 붉은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 맞았다. 그리운 그 스프.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어릴 적 자신이 아플 때마다 정성스럽게 만들어주셨던 그 닭고기 스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