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가능한 오래, 횟수는 자주2021.11.29.
대공가에서 엘리제가 눈을 떴다. 그녀의 옆에 당연하다는 듯 데몬이 있었다. 자신의 손이 데몬에게 꽉 잡힌 상태였다.
“제, 제가…….”
살아 있네요……? 윽, 엘리제는 입과 목 안으로 느껴지는 생경한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입술도 입안도 모두 쓰라리고 아팠다.
“주술을 끊어내기 위해 그것을 빨아들이는 과정에서 마력이 강해 입술과 입안이 부어오르셨습니다.”
‘님께서 제게 너무 격렬하게 키스하신 게 아니고요?’
자신과의 열렬했던 키스를 너무나 담담하게 설명하는 데몬 앞에서 엘리제는 더욱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그 순간이 떠오르자, 뜨거웠던 열기와 촉감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마치 다시 재연되듯 야릇한 느낌에 휩싸였다. 주술로 인해 고통 속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조차, 그와의 입맞춤이 너무나 강렬해서 주술의 고통을 밀어내고 온통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점령했었다. 키스는 둘이 함께 했는데,
‘부끄러움은 왜 나 혼자만의 것이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반면에 데몬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표정에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왜인지 모르게 억울했다.
“용서하십시오. 엘리제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허락이 있기 전에 제가…….”
“괜, 괜찮아요.”
뒷말은 민망하여 듣기 힘들었다. 데몬의 입으로 직접 ‘당신에게 입을 맞췄다’라고 들으면 엘리제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가슴이 진정되지 않고 마구 뛰었다. 갓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데몬의 음성을 듣고, 입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몸이 달아올랐다.
‘이런. 나 취향이 바뀌었나 봐.’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다정하게 챙겨주는 그의 말과 행동이 엘리제를 더 떨리게 했다.
‘아, 그래! 생전 처음 맛본 빨간 맛 때문일 거야.’
자신은 현실의 나이로 보나, 엘리제의 몸으로 보나 이미 훨씬 전에 성인이었지만 이토록 강렬하고 깊은 키스는 처음이었으니 그래서 그런 거라 애써 생각을 돌렸다.
‘몸에 나쁜 맛이 역시 정신에도 나쁘구나!’
쓰라린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입술을 아프게 한 나쁜 맛을 생각했다. 계속해서 키스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자 그녀가 도리질을 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데몬이 걱정스레 말을 걸었다.
“아, 아녜요. 그런데…….”
이 손은 계속 잡고 있어야 하나요? 엘리제가 꼭 잡힌 그녀의 손에 힘을 주어 들어 올리려고 했다.
“안 그래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엘리제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어딜 가든 꼬옥 붙어서 손잡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죠?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지금 잠깐 이렇게 붙어서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려서 나 쓰러질 것 같다고요!’
“안 한 것보다는 낫겠지만 사실 손만 잡는 것으로는 효과가 거의 없습니다. 엘리제님이 걸린 주술은 단순 마력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더 강한 힘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네? 더 강한 힘이라면…….”
“흑마법입니다.”
“흑, 마법?”
이 소설에 흑마법도 있었나? 그녀가 열심히 기억을 더듬으려 할 때 데몬이 친절하게도 설명을 덧붙였다.
“흑마법은 보통 마력보다 더 구현이 어렵습니다. 조건도 까다롭고 훨씬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제국에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엘리제에게 그 어려운 흑마법의 주술을 걸어 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너무 강해서 손만 잡아서는 주술을 풀기는커녕 발동조차 막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설마 흑마법까지 이용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제 엘리제님께 그런 일이 생기게 된 것은 제 불찰입니다.”
데몬이 엘리제 앞에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한 진심이 느껴졌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역시 속이 다정한 스타일이 맞다 싶었다.
“보통의 주술로는 물속으로 불러들여 피주술자를 이동시킬 수 없습니다. 어제 엘리제님이 아마 분수 속으로 들어가셨다면 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을 겁니다.”
“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자신은 어제 물에 빠지게 될 것이 두려워 목소리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런데 빠지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을 것이라고? 또다시 소설 속 인물이 된 것이 뼈저리게 실감 났다. 종종 마법 포털을 이용하여 공간을 뛰어넘는 설정이 있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소설 <황후 프시케> 속에서도 흑마법을 통해 공간 이동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손만 잡는 것으로는 엘리제님을 안전하게 지켜드리기 어렵습니다. 주술의 주인이 다음에는 더 적극적인 공격과 방어를 취할 것입니다.”
“그럼, 어떡하죠?”
“입맞춤을 허락해주십시오.”
“네? 지금이요?”
“……가능하면 오래, 횟수는 자주일수록 좋습니다.”
맙소사! 그 자극적인 걸 더 자주, 더 오래 해야 한다고? 엘리제는 그만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 밤새 대공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이 로안에게 보고되었다. 로안은 엘리제를 대공가로 보내며 레이나에게 특별 임무를 내리고, 엘리제를 보호할 사람들도 물론 함께 보냈었다. 그중 두 명을 시켜 자신에게 모든 일을 수시로 보고하게 했다. 혹시나 대공가에 매수당할 것을 우려하여 일부러 두 명에게 각각 임무를 내렸다. 이른 아침부터 두 명의 수하에게 같은 내용을 전달받은 로안은 손안의 종이를 구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두 쪽지 모두 주요 내용은 같았다. 하나, 엘리제에게 어제 하루 동안 총 두 번의 주술이 발동되었다. 둘, 두 번째 주술의 힘으로 엘리제는 스스로 분수로 걸어 들어가려 했다. 셋, 그런 그녀를 막기 위해 결국 대공이 입맞춤으로 주술을 끊어냈다는 내용이었다.
“보내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참을 수 없이 화가 났고, 불안했다. 품에 가두고 자신만 알게 하고 싶은 엘리제가, 그토록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제 엘리제가, 자신의 품을 떠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서 두 번이나 주술의 고통을 경험하고 다른 남자의 품에서 입맞춤까지 했다. 심지어 그녀 스스로 걸어서 분수에 들어가려고 했다니! 주술을 건 이를 하루빨리 찾아내어 부숴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레이나는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애꿎은 레이나를 탓했다. 그녀에게 대공가로 출발하기 전 긴히 따로 명한 것이 있었다. 대공이 엘리제에게 행하는 스킨십이 가능하면 가벼운 것이 되도록 엘리제를 종용하고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황제인 자신이 명한대로 대공이 엘리제의 허락을 받은 후에 접촉을 하려 할 테니, 엘리제가 진한 스킨십을 원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레이나에게 두 사람이 입맞춤까지 가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 명하였는데, 하루도 안 되어서 레이나의 임무가 실패했다.
“하……. 역시 보내지 말았어야…….”
로안은 말을 다 맺지 못했다. 사실 알고 있다. 엘리제가 그나마 대공가에 있었기에 데몬이 그녀의 주술을 끊을 수라도 있었던 것이다. 만약, 어젯밤 황궁에서 엘리제의 주술이 발동되었더라면? 황궁의 거대한 분수로 걸어들어가 그 속으로 잠기는 그녀를 상상한 것만으로도 로안의 신경이 곤두섰다. 온몸이 미칠 듯한 절망과 공포로 차오르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녀를 잃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시간이 없어.”
더 서둘러야 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엘리제가 황궁으로 돌아오더라도 안전할 수 있도록, 그녀가 주술을 풀고 오기 전까지 자신이 해결해야 할 두 가지 문제를 떠올렸다. 먼저 주술을 건 이가 누구인지, 그것을 도운 첩자가 누구인지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엘리제의 주술이 처음 발동되던 그날, 황후와 대공이 늦은 시각까지 함께 있었던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다. 하필이면 왜 그날 두 사람은 함께 있었던 것일까. 주술이 발동된 바로 그날, 유일하게 그 주술을 풀 수 있는 대공이 그 근처에 있었던 것이, 과연 우연일까? 누군가 치밀한 계산으로 대공이 황궁에 온 날 엘리제의 주술을 발동시켰고, 엘리제를 대공가로 보낼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라면? 질문의 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까지만 버텨다오, 엘리제.’
똑똑, 황궁의 시종장이 도르르 말린 종이를 들고 로안의 방으로 들어왔다.
“크레미언 대공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당장 가져와라!”
데몬의 편지에는 로안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보고받은 내용보다 훨씬 자세하고 구체적이었다.
“개인적인 감정 없이 임무를 수행 중이다, 이건가?”
마치 데몬이 황제 로안의 명을 잘 받들고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느껴졌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것이겠지. 쓸데없는 짓 말고.’
데몬은 마치 로안이 대공가를 감시 중이라는 것조차 미리 다 알고 있다는 듯, 자신보다 한 치 앞을 더 내다보는 행동을 했다. 그것이 더 모욕감을 느끼게 했다. 데몬이 차라리 자신의 명을 무시하거나 따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대공가를 처벌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늘, 데몬은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젠장!”
로안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평생에 걸쳐 느껴온 열등감에 절로 욕지거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대공의 편지의 마지막에 적힌 대공의 부탁을 보자 로안의 푸른 눈이 마구 흔들렸다. 「주술의 주인이 흑마법사인 것으로 보입니다. 황궁 내의 첩자를 속히 찾아주십시오.」 엘리제가 정말로 위험했다. 흑마법은 단순히 피주술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끝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정신을 모두 삼켜 자신의 꼭두각시가 되도록 영혼을 파괴시키는 힘이었다.
*** 데몬은 하임과 집무실에 있었다. 엘리제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혼자 있고 싶다고 데몬을 귀빈실에서 내보냈기 때문이었다. 일터로 돌아온 대공을 반기며 하임이 기다렸다는 듯 업무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직 크레미언 영지의 매점매석이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데몬이 아까부터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의 보고를 듣는 내내 마치 매점매석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한 표정이었다.
‘왜 저러시지? 이미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가?’
평소 대공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일에 한 눈 팔거나 딴 생각에 빠져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그게 대공가의 일이 아닌 경우라면, 어떤 일이든 전혀 관심이 없어 오히려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성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던 데몬이다. 자신이 어떻게 각하를 결혼시키고 대공가의 대를 잇게 할지 고민을 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지금 자신의 주군이 무슨 생각으로 저리 멍한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데몬이 조용히 그의 보좌관을 불렀다.
“하임.”
“예, 각하.”
“부인과 연애 후에 결혼하였다고 했었지?”
뜬금없는 질문에 하임의 머리가 멍해졌다. 왜 갑자기 제 연애담이 궁금하세요?
“예. 물론 그러했습니다만…….”
그게 영지의 매점매석과 무슨 상관인가요?
“그렇다면 혹시.”
혹시 드디어 누군가를 만나볼 생각이 드신 걸까? 지금 상황에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하임은 반가운 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와 처음 입맞춤을 하였을 때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하는가?”
“네??”
‘어디서 했냐, 얼마나 좋았냐도 아니고 맛이요?’
생전 처음 듣는 질문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첫 키스에 대한 질문을 하더라도 키스한 장소가 어디냐, 분위기가 어땠냐를 묻지 않나? 어떻게 맛이 어땠냐고 물을 수가 있지??
“각하, 진지하게 키스의 맛을 물으시는 거라면…….”
모시는 주군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대공의 보좌관으로서 모든 일에 사실과 진실을 알려드릴 의무가 있다.
“특정한 맛이 아니라 무얼 드시고 입맞춤을 하셨느냐에 따라…… 저기…….”
설명하면서도 당황스러워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맛은 그렇다면, 향기는 어땠지?”
“네에??”
향기까지 묻는다고?
‘아차, 설마…… 우리 각하께서 어제 엘리제 님과의 입맞춤에서 혹시 맛과 향을 느끼신 건가?!’
당황하는 하임과는 다르게 데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분명 체취나 음식의 맛 같은 그런 게 아니었다.
“달콤하고, 장미 향이 나더군.”
맙소사. 하임의 입이 벌어졌다. 전혀 순진하지 않으신 자신의 대공 각하께서 놀랍게도 사랑에 빠지신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그분은 안 되는데? 황제의 애첩이잖아!’
“각하. 외람되오나 사람에 따라서는 체취가 있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엘리제 님은 안 됩니다. 그러니 단념시켜드려야 했다. 물론 주술을 끊기 위해서였지만 하필 대공님의 첫 키스 상대가 그토록 아름다운 분이었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어쨌든, 보통 키스에는 일정한 맛과 향기가 없다는 것이지?”
사실 데몬은 확인차 하임에게 질문을 했다. 혹시나 싶어 물었지만 그 역시 입맞춤이라는 행위에 특별한 맛과 향이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제와 키스를 할 때 그는 분명히 달콤하고 장미 향이 나는 그 무엇인가가 자신의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그의 가문에만 비밀리에 내려오는 기밀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이것은 분명 중대한 일이었다. 엘리제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했으니. 그런데 정작 엘리제 본인을 포함하여, 황제와 황궁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자신이 착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다.’
자신의 판단을 뒷받침할 증거가 필요했다. 다시 한번 엘리제와 입맞춤을 해본다면 더욱 확실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데몬이 두 눈에 붉은빛을 내며 집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