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녀를 닮은 꽃2021.12.06.
데몬은 손에 들린 그릇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런 감정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 때가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그것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고 파급력이 컸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뛰어난 전술과 비교불가의 기량으로 살아오며 기습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러나 조금 전 엘리제가 전해준 요리를 받고 그는 새로운 경험을 한 기분이었다. 음식의 향기를 맡은 순간, 가슴이 철렁하더니 이내 기대감에 마구 떨렸다. 맛있게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몸이 따스해지고 가볍게 전율이 일었다.
‘맛이 같다.’
그동안 대공가의 주방장들에게 어머니의 스프와 같은 느낌이 나도록 주문하고 부탁해왔었지만 그 누구도 식감과 맛을 흉내 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엘리제에게 받은 음식이 어머니의 스프와 무척 비슷했다. 그녀가 어머니의 닭고기 스프를 먹어본 것도 아닐 텐데.
‘신기한 일이군.’
고마운 마음과 함께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가슴 어딘가가 따뜻해지고 동시에 저리는 듯 아리는 느낌. 무언가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
‘어머니를 떠올려서인가…….’
자신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무척이나 깊고 복잡했다.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내면에 휘몰아치는 것이 오랜만에 어머니 생각이 나서일 거라 여겼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한가하게 옛 추억에 젖을 때가 아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정적으로 변하려 할 때면 그는 습관처럼 현실을 더욱 직시했다. 지금처럼. 사실 데몬은 방금 전 연무장에서 중대한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바로 체내 마력량이 상승한 것이었다. 아마도 엘리제와의 접촉을 통해 마력이 강해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마력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대대로 크레미언 대공가의 가주는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힘이지만 불행히도 마력량이 일정 이상을 넘게 되면 폭주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대공가의 큰 약점이나 마찬가지여서 소수만 아는 기밀(機密)로 내려오고 있었다. 데몬이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게 된 것도 그의 첫 폭주를 막지 못해서였다. 폭주는 그의 유일한 약점이자, 아픈 상처였다. 커가면서 마력이 점점 강해졌고, 그로 인해 주기적으로 폭주가 일어났다. 주변에 소중한 이를 둘 수가 없었다. 늘 자신의 마력량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폭주 때마다 그 빌어먹을 ‘약속’ 때문에 비겁한 황가의 사람들의 발아래 선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위험한 마력을 정화하고 조절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정령의 힘뿐이다. 그래서 크레미언 가문에서는 수십 년째 정령의 힘을 가진 물건을 찾고 있었고, 지난번 가문의 회의에서도 그 중대한 일을 한 가신 가문에 맡긴 참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정령의 힘이 있다니 그런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데몬은 자신의 방 한쪽에서 업무 중인 보좌관을 불렀다.
“하임. 아직 테일러 백작에게는 연락이 없는가?”
“예. 아직입니다. 역시 엘리제 님께 그 힘이 있는 것입니까?”
“아직 단언할 수는 없지만, 백작이 임무에 성공한다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테일러 백작께 진행 상황이 어떤지 연통을 넣어보겠습니다.”
하임의 말을 듣고 데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중요한 생각에 잠겼다. 붉은 두 눈이 진지해졌다.
‘이상하군.’
주술사의 움직임이 아직 없었다. 분명,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들켰으니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엘리제를 이용하여 목적을 이루려 할 것인데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 일도 없다.
‘하지만 곧 다시 발동할 것으로 봐야겠지.’
며칠 내로 그녀의 몸이 또다시 주술의 힘 아래 놓이게 될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녀 곁에 더 머물며 주술을 흡수하는 것이 필요했다.
‘어서 가봐야겠군.’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디선가 향기가 불어오는 기분이었다. 달콤한 장미 향기가.
‘아까 연무장에서도…….’
그녀를 구하기 위해 품에 안았을 때 역시, 그녀에게서 달콤하고 시원한 장미 향기가 느껴졌었다. 빛나는 은색 머리를 날리며 자신의 품에서 놀란 토끼 눈이 되었던 그녀를 떠올리자 가슴 언저리 어딘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안전한지 어서 확인하고 싶었다.
“엘리제 님께 가보겠다.”
하임에게 말을 남기며 그녀 곁에 자신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데몬이 방을 나섰다. 그것이 언제 발동될지 모르는 흑마법을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또 다른 마음 때문인지 데몬은 알지 못했다.
*** 데몬에게 닭죽을 전해주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아직 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이 고장 났는지 계속해서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온 탓일 거야. 그나저나 맛있게 먹어주면 좋을 텐데.”
조금 전에 음식을 받아든 그의 눈이 어딘가 슬퍼 보여 마음이 쓰였다. 붉은 눈이 물기를 머금어 더 붉게 보였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막 씻고 나와서 그럴 수도 있지.”
막 씻고 나와서. 절로 조금 전 그의 모습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아……. 샴푸 향기 좋던데. 젖은 머리도 멋지고. 그리고 나를 구해주던 그 품도. 그리고 그 말도…….
“가능한 오래, 횟수는 자주일수록 좋습니다.”
‘악! 또 생각하고 있잖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헛수고였다.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반복적으로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 앞으로 그와 입맞춤을 가능하면 오래, 자주 해야 한다니 정말 까무러칠 지경이다. 새빨갛고 뜨거운 19금 어른들의 세계가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나는 철퍼덕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하잉. 진짜 미치겠네…….”
‘일부러 바깥바람까지 쐬고 왔는데. 물론 역효과가 났지만.’
목숨까지 빚지고 다시 한번 진심으로 반했으니 말 다 했다.
“아, 그리고 난 왜 그 말이 그렇게 멋있게 들리는 거야…….”
가능한 오래, 자주 키스할수록 좋다는 그 말.
‘내가 원래 이렇게 금방 누군가에게 빠지는 스타일이었나?’
주술을 풀 수 있는 것이 오직 데몬밖에 없어서 절박하게 그를 찾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완벽하게 잘생겨서 쉽게 다가가기 힘든 외모. 그와는 다르게 따뜻하고 배려 깊은 내면. 소름 돋게 멋진 목소리, 단단하게 짜인 몸. 나를 걱정하고 살펴주는 행동까지.
“거기다가 생명의 은인이시고.”
그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나는 매료되어 있었는데 스스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게다가 예상치 못하게 순간순간 보여주는 다정한 모습과 세심하게 챙기는 성격 때문에 더욱 순식간에 빠져든 것 같았다.
“하…… 이제 어쩌지? 데몬에게 마음이 생기면 안 되는데…….”
‘로안이 날 가만둘까? 도망가야 하는데. 프시케의 손이 아니라 로안의 손에 죽는 거 아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바로 그때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리제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데몬이다!
‘왜 벌써 왔지? 음식은 맛있었을까? 잠깐! 나 얼굴 빨간 것 같은데?’
“앗, 네!”
정신없는 와중에 문이 열리고 데몬이 들어왔다. 이상하다. 방금 전 그의 방 앞에서 음식을 전해주며 보고 왔는데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너무 떨린다.
‘큰일 났다! 나 이 남자 진짜 좋아하나 봐.’
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스프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드실 만했나요?”
“물론입니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행이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그의 미소를 보니 행복해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맛있게 드셔주셔서 저도 감사해요.”
“별다른 계획이 없으시면 오늘 줄곧 함께 있어 드리고 싶습니다.”
줄곧 함께? 두근두근 심장이 눈치도 없이 달음질을 시작했다. 안 돼! 아직 나대지 마!
“언제 주술이 발동될지 모르니 계속 손을 잡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손만 잡는 것으로 괜찮은가요?’
꿀꺽. 속마음을 삼키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거울을 바라보며 모습이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내 얼굴이지만 지나치게 이쁘다. 그리고 지나치게 붉다. 응?
“헉! 나 얼굴에 티 다 나는구나.”
조금이라도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나는 다시금 심호흡을 하며 경건한 마음을 장착하고 역시 경건한 마음으로 손을 씻었다. 신성한 의식을 위한 준비라도 하듯. *** 오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데몬과 손을 잡고 카우치에 앉아 있었고, 우리 곁에 일거리를 잔뜩 들고 온 하임 덕에 얼떨결에 나도 대공가의 업무를 함께 보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하임이라도 있으니 내 심장도 좀 이성을 되찾았고.’
둘만 있었더라면 제대로 숨도 못 쉬었을 것 같다. 업무를 보는 그의 모습마저 내 눈에는 너무 멋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일에 몰두하자 집중한 모습과 매력적인 저음, 깔끔한 일처리까지 곁에서 오롯이 지켜보며 감상할 수가 있었다.
‘이제 보니 완벽한 내 이상형이었어!’
내가 이렇게 병약할 줄이야. 병명은 상사병.
‘아무래도 나…….'
죽을 것 같다. 주술 때문이든, 로안의 집착 때문이든, 프시케의 질투 때문이든, 데몬의 치명적인 매력 때문이든 아무래도 엘리제로 오래 살긴 틀린 것 같다. ***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데몬은 어느 정도 업무를 마치고 엘리제의 곁에서 일어났다. 벌써 하루가 저물어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주무실 때도 곁을 지키겠습니다. 밤이면 흑마법의 힘이 더욱 강해집니다.”
“네. 그럼 저도 잘 준비를 하고 있을게요.”
엘리제가 잠시 혼자 있을 수 있도록 그녀에게 시간을 주고, 데몬도 서둘러 자신으로 방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력을 일으켜 다시 한번 자신의 몸속의 마력량을 가늠해 보았다.
‘미세하지만 역시 늘었다.’
오후 내내 엘리제 곁에 있으면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어떻게 이런 힘을 갖게 된 것이지?’
지금의 데몬에게 엘리제는 대공가의 하녀일 때와는 의미가 여러모로 달랐다. 되찾아 와야 하는 가문의 일원이고, 지켜야 하는 황제의 첩이며, 이제는 자신과 대공가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리운 어머니의 음식까지 만들 수 있는 사람. 휘이잉. 복도의 창을 타고 밤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창밖으로는 어두운 정원이 보였다. 그녀의 향기가 정원에서도 불어오는 듯했다. 무언가 떠오른 데몬은 방으로 돌아가서 제레미를 불렀다. 잠시 후. 귀빈실 앞에 도착한 데몬은 들어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열린 문틈 사이로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제가 보였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는지 데몬이 온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
쏟아지는 달빛을 받아 그녀의 빛나는 은색 머리가 더욱 반짝여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엄마, 아빠, 지훈아…….”
떠오르는 가족의 이름을 달을 바라보며 불러보는 것으로 그녀는 그리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데몬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 다음 날, 엘리제는 역시나 데몬에게 손을 잡힌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푹 주무셨습니까?”
“네. 덕분에 무척 잘 잤어요. 씻고 올게요.”
손을 잡고 잠든 것이 오늘로 3일째이지만 아침에 눈을 뜰 때만큼은 아직 적응이 안 되었다. 신기한 일은 그의 손을 잡고 잠들면 정말 편안하게 숙면을 취한다는 것이었다.
‘설레서 잠이나 잘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매번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잠들고 푹 잘 수 있었다.
‘마력이 몸 안에 흡수되면서 잠이 온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
데몬이 그녀에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는 언제 쉬는 것일까? 이렇게 밤새 그녀의 곁을 지키는데. 잠시 방에 다녀오겠다며 데몬 역시 귀빈실을 나갔다. 씻고 나온 엘리제 앞에 간단하게 아침식사가 준비되었다. 그때, 노크와 함께 귀빈실로 제레미가 들어왔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습니까?”
“와아! 이게 다 뭐예요?”
제레미의 뒤를 이어 그녀의 입술색을 닮은 코랄빛 장미가 한가득 방으로 배달되었다.
“대공가의 전통입니다. 여러 날 대공가에 머무시는 손님께 정원에 있는 꽃 중 그분을 닮은 것을 드리고 있습니다.”
‘손님을 닮은 꽃을 골라 드린다고? 이런 로맨틱한 내용이 소설 속에 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런 내용은 없었던 것 같긴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아침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신 코랄 빛에 은은한 장미 향까지 느껴지자 엘리제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어젯밤에 사실 조금 울적해지려 했었는데!’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의 기분을 완벽히 전환시켜주는 꽃배달이었다.
“대공 각하의 명을 받아 오늘에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안 그래도 정원에 나가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가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엘리제가 무척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돌아온 데몬도 그녀의 미소에 내심 안도하였다. 사실 대공가에 그런 전통이 있다는 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제레미는 데몬이 어제 시킨 대로 미리 코랄빛 장미를 준비하였고 오늘 아침 웃으며 꽃을 전한 것뿐이었다. 주술 때문에 방 밖을 나서지 못하고 있는 엘리제를 위한 데몬의 배려였다. 제레미는 주군을 응원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연기가 아주 찰떡같이 나왔다.
‘없는 내력이면 어떤가. 각하를 위한 것인데.’
충성스러운 집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없던 대공가의 전통도 지금부터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오늘 밤에 또다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꽃을 바라보며 마냥 행복해하는 아름다운 귀빈과, 자신이 모시는 주군 사이에 또 한 번의 입맞춤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두 분께 일어날 일이 저 장미와 같은 향기로운 일이면 좋겠군.’
데몬과 엘리제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제레미가 두 사람만 남긴 채 조용히 귀빈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