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녀의 안으로 침범하다2021.11.25.
데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 쓴 엘리제가 덜덜 떨며 울고 있었다.
“엘리제 님.”
그녀를 나지막하게 부르며 침대로 다가갔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난 엘리제가 데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살, 살려주세요. 오늘 밤 제가, 아앗!”
고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크게 열린 엘리제의 금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쉿, 아무 말도 마십시오.”
데몬이 손을 들어 엘리제의 입술에 살포시 대주었다. 엘리제의 몸에 떨림이 서서히 멈추어 갔다.
“지금은 주술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서 들으신 내용을 말씀하시면 고통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였구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들렸다고, 오늘 밤 그 발작이 다시 시작될 거라고 데몬이 오기 전까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은 죽을 만큼 괴로운 고통에 삼켜질 거라는 것을. 온몸을 흔드는 공포에 그저 자리에 주저앉아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데몬의 손이 닿자 조금씩 진정이 되고 고통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울컥, 안도감에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
“……너, 너무…….”
엘리제는 그만 데몬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너무 무서웠어요. 너무 무서워 말도…… 할 수 없었고, 끅, 끅.”
쏟아지는 울음에 엘리제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울며 매달리는 그녀로 인해 데몬도 말문이 막혔다. 쏟아지는 그녀의 눈물을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게다가 그녀가 안기면서 부드러운 몸이 가차 없이 데몬에게 와 부딪쳤다. 그녀가 흔들리며 동시에 느껴지는 생경한 감각들에 데몬의 사고가 마비되어 버렸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와 제복의 미남자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나는 은발의 여인이 안기자 두 사람의 모습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지켜보는 제레미의 마음 어딘가가 애잔해질 정도였다. 엘리제의 고통은 사라지고 있었지만 조금 전까지 온몸을 지배했던 공포와 울음으로 아직도 그녀의 몸이 들썩이며 떨리고 있었다. 갈 곳을 잃은 데몬의 손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한참 엘리제를 다독이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에 닿아 멈추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안자, 작게 흐느끼는 울음과 심장소리가 데몬에게 그대로 들렸다. 그녀를 좀 더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두 손으로 등과 다리를 받쳐 올렸다. 순식간에 엘리제는 동화 속 공주님처럼 데몬에게 안겼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그녀의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엘리제 님…….”
얼마 후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고 숨소리가 일정해지자 데몬이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에 다시 내려놓으려 했다. 스르륵. 가느다란 팔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고 데몬의 두 눈에 제 품에서 울다 잠든 엘리제의 얼굴이 담겼다. 극한의 공포에서 벗어나 긴장이 풀리자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신과의 접촉으로 마력이 흡수되면서 잠들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순간, 선명하게 붉은 두 개의 멍울이 데몬의 눈에 띄었다. 잠든 그녀의 하얀 목 위로 누군가가 어제 만들어 놓은 흔적이었다. 데몬의 잘생긴 미간에 저도 모르게 주름이 갔다. 엘리제의 목에 저런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제국에 한 명뿐이다. 황제 로안. 그는 엘리제에게 그렇게 할만한 관계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거지?’
데몬은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소한 감정에 당혹스러웠다.
“하!”
실소가 나왔다. 분명 되찾아올 그녀여서 그런 것일 뿐이고, 울다 정신을 잃은 그녀가 안쓰러워 그런 것일 뿐이라고 데몬은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 두세 시간 후 엘리제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데몬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데몬에게 급한 일들을 보고하고 허락을 받느라 보좌관 하임도 귀빈실에 함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데몬이 다정하게 그녀의 상태를 물었다.
“네. 많이 진정되었어요.”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크고 따뜻한 데몬의 손을 느끼고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무사히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 하임이 방을 나가며 데몬에게 말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자,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엘리제는 초조해졌다. 데몬이 계속해서 잡아 준 두 손을 더욱 꽉 쥐었다. 그녀가 꼬옥 쥔 손을 데몬이 바라보았다. 하얗고 보드라운 손. 잠시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는 꿈속을 헤매며 눈물을 흘렸다. 작게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데몬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엄, 엄마.”
어릴 적 데몬 역시 그리운 어머니를 꿈속에서 애타게 찾았더랬다. 힘없고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이, 울며 잠든 엘리제와 겹쳐 보였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엘리제의 눈물을 닦아 올렸다. 그녀가 원치 않은 첩의 자리에 가게 되어, 하필 주술의 고통 속에 빠지게 된 것이 어찌 보면 제 탓도 있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이토록 고통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애처롭기까지 했다. 덜덜 떠는 작고 하얀 손을 바라보며 데몬이 말했다.
“주술이 발동되면, 그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뭐, 뭐라고요?”
엘리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그 말은, 주술의 주인에게 가라는 거 아닌가? 나더러 이 끔찍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자에게 제 발로 걸어가라는 건가?
“엘리제 님은 지금 그 목소리를 거스르실 수 없습니다. 그런 게 주술입니다. 거부하려 하거나, 주술을 건 주인의 명을 발설하려고 하면 강한 고통에 빠질 뿐입니다.”
“아…….”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결국은 주인이 명하는 대로 하게 됩니다.”
절망적이었다. 두려움으로 인해 엘리제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일부러 고통을 경험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해서 그 주인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제게 생각이 있으니, 목소리가 들리면 그냥 그대로 따르십시오.”
내가…… 할 수 있을까? 엘리제의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데몬이 그녀를 달랬다.
“주술의 주인이 부르는 곳이 어딘지 제가 알게 될 때까지만 그리하시면 됩니다.”
데몬은 그녀가 잠든 사이 이미 주변 곳곳에 잠복을 명했다. 목소리에 홀려 엘리제가 움직이면,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서 주술을 건 이를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바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영악한 자이니.’
주술을 건 이는 분명 엘리제가 대공가로 처소를 옮긴 것을 알고 있을 테고, 대공이 엘리제를 이용해 자신을 잡으려 할 것도 계산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단번에 자신이 있는 곳으로 엘리제를 부를 리 없었다. 아마도 엘리제를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그녀의 생명을 조금씩 갉아먹으려 들겠지. 그러다 운이 좋아 대공가에 빈틈이 생기면 곧바로 엘리제를 집어삼키려고 할 것이다. 아직 정확히 주술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생각보다 마력이 강한 남자라는 것 외에는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데몬은 신중하게 행동하고 지켜보며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주술의 주인이 단서를 남기기를. 대신 그동안 안타깝게도 미끼가 될 엘리제는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였으나 데몬은 그녀에게 미안했다.
“만약, 엘리제님이 위험해지실 것 같으면 제가 마력을 이용해 주술을 끊어내겠습니다.”
그제야 엘리제는 안심이 되었다. 자신이 주술의 주인을 만나게 되기 전에 데몬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었다. 마음을 놓는 엘리제를 데몬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를 말리는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엘리제에게 다시 소리가 찾아왔다.
[엘리제…….]
“아……!”
엘리제의 눈에 공포가 가득 담겼다. 데몬은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주술이 발동되었다.’
“대공가에 있는 모든 문을 열어라!”
데몬이 부하들에게 명했다. 일사천리로 대공가에 있는 모든 방과, 출입문이 일제히 열렸다. 엘리제가 목소리가 원하는 대로 이동하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주술의 힘이 엘리제의 몸을 장악하자, 또다시 그녀의 몸이 떨려왔다. 아름다운 금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목소리의 명령에 거부하지 마십시오.”
데몬이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혹시 위험해지면 제가 바로 주술을 끊겠습니다.”
그 말을 믿고 엘리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데몬도 움직였다. 귀빈실에서 집무실 앞을 지나쳐 엘리제는 중앙의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 본관의 정문으로 나가면 앞에는 정원과 분수, 별채들이 있었다. 곳곳마다 데몬이 명한 사람들이 빠짐없이 대기 중이었다. 그들이 엘리제를 놓치지 않고 따라갈 것이었고, 혹시 위험한 상황이 되면 그녀를 붙잡을 예정이었다. 각층의 창문과 복도, 지하실과 테라스 등 그 모든 곳에 대공가의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엘리제가 이 대공가에서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고 사라지거나 다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엘리제……, 나에게…….]
“하아, 하아…….”
[나에게로 지금, 오라.]
엘리제는 긴장과 두려움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목소리가 들린 직후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목소리에 반항하지 말라는 데몬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공포와 싸우는 중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막상 몸이 꼭두각시가 된 듯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움직이자 너무나 끔찍했다. 어느새 그녀의 몸이 정문을 통과해 정원 한가운데를 향하는 중이었다. 거대한 분수가 눈앞에 보였다. 분수를 중심으로 정원의 사방에는 더 많은 대공가의 사람들이 잠복 중이었다. 그녀를 풀 속이나 나무들 사이에서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 발, 한 발 엘리제가 앞으로 나아가고 데몬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아악!”
엘리제가 소리를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녀가 목소리에 반항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뿔싸!’
그 즉시 데몬은 자신이 놓친 한 가지를 발견하고 말았다. 엘리제의 눈앞에 분수대가 놓여 있었다.
‘설마, 이 정도까지!!’
주술의 내용을 눈치챈 데몬은 서둘러 엘리제의 몸을 잡아챘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거부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는 단호하게 반복하여 명하고 있었다.
[분수대 안으로! 어서!]
“으…… 싫, 싫어!”
엘리제는 울부짖었다. 물속에 빠지라니, 자기더러 죽으라는 말이 아닌가! 그녀의 의식은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몸은 착실히도 분수를 향해 손과 발을 뻗어갔다. 데몬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아악!”
“엘리제 님!”
데몬이 다급하게 엘리제를 불렀다. 그녀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모습에 그도 애가 닳았다.
‘아, 약속한 대로…….’
주술을 끊어주려 하는구나. 엘리제는 고통 속에서 힘겹게 생각을 이어나갔다.
‘……허락……을 해야 해.’
입맞춤이든 스킨십이든 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허락을 먼저 받아달라고 조건을 걸었던 엘리제였다. 그리고 그녀의 부탁대로 로안은 데몬에게 황명을 내렸다. 접촉의 종류가 무엇이든 그녀의 허락을 반드시 받은 후에 하라고. 그런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데몬이 낮게 신음하듯 말을 뱉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뜨거운 데몬의 입술이 고통으로 열린 엘리제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곧바로 열린 엘리제의 입 안으로 더욱 뜨겁고 말캉한 숨결이 침범해들어왔다.
“흡!”
엘리제의 숨이 바로 막혔다. 그가 말했던 대로, 연인들 사이에 부드러운 입술만 닿는 사랑스러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실세계는 다정하지도, 부드럽지도 않다는 듯 거칠고 깊은 키스였다. 데몬은 엘리제의 부드러운 입술과 속을 오가며 그녀의 입을 통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삼킬 듯한 기세였다.
“!”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감쌌고 가차 없이 밀려오는 데몬에 엘리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입이 막힌 것뿐인데 숨이 차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순간순간 데몬이 더욱 깊게 들어올 때마다 엘리제는 팔을 들어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데몬 크레미언…… 기어코 네가…….]
목소리가 분노를 삼키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주술의 힘이 끊어졌다. 그 순간 엘리제는 데몬의 품에서 축 늘어지며 혼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