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풍월각의 구미호
안성패는 약속대로 들판에서 열성적으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춤이야 알려 주겠지만, 우리를 따라 노래하는 것은 안 될 일이오.”
꼭두쇠가 얄밉게 비아냥대었다.
우리와 함께 따라온 제자가 꼭두쇠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내게 받아 간 곡을 그렇게 훔치다니, 이 말이 되는 이야기요?”
그의 말에 꼭두쇠가 박장대소했다.
“우리도 노래 한 곡을 받기로 하였으니 피차 마찬가지 아니오?”
“당신들은 훈련을 이겨 내지도 않았잖소. 노래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었단 말이오!”
꼭두쇠가 코웃음을 쳤다.
“그 노래는 이미 우리 것이오. 저잣거리 사람들이라면 이제는 모두 아는 사실이지.”
그의 말을 듣자, 제자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고, 나는 털보의 목에 걸린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쨌거나, 춤을 알려 주시지요. 우리는 당신들의 기술에 대해 값을 지불하였으니. 설마 그 금가락지도 본래 자신의 것이라 우기지는 않겠지요?”
내 말에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 본래 받은 만큼 값은 치러 주는 자요. 얘들아, 보여 주거라!”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누가 봐도 대충대충 알려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균형점을 어찌 잡아야 하오?”
열하는 집중하여 시도해 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별호와 로버트는 균형감각을 익히는 기술이라며 줄타기를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줄타기를 시도하다가 한 발로 땅에 서며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
화로 대신 무거운 돌을 안고 현명이는 날랜 몸으로 공중제비를 돌려다가 몇 번이고 땅에 처박혔다.
“무거운 것을 드니 균형잡기가 결코 쉽지 않네요.”
멤버들이 열심히 따라오려 하자, 꼭두쇠의 눈치를 보던 안성패의 단원들도 본분을 잊은 듯 열성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제자가 내 곁에 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본디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만, 아마 이번에 궁에서 내려온 방을 보고 저러는 듯합니다. 저들이 갖지 못한 유일한 것이 노래라고 생각했을 겝니다.”
“그렇죠. 아무래도 눈과 귀가 솔깃할 혜택들이더군요. 궁궐 소속의 재주꾼이 된다면, 나아가 전 백성의 우상이 되는 것이니까요.”
꼭두쇠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멤버 중 훤이 접시를 검 끝에 세우는 것을 성공해 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꼭두쇠는 함께 박수를 치는 단원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쯤 알려 주었으면 된 것 같군. 원래는 우리 단원이 아니면 알려 주는 것도 아니올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꼭두쇠가 시니컬하게 비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소. 그런 빈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아뇨, 저는 빈말이 아닙니다. 이게 안성패의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니까요. 그리고 저 역시, 받은 만큼 돌려드리는 자입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꼭두쇠의 눈을 피하지 않고 굳게 바라보았다.
더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그들의 장점을 훑고 새로운 판으로 나아갈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멤버들과 작곡가를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꼭두쇠의 눈에는 분명 이기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열망을 어떻게 발현하는지에 따라 파멸로 갈지 성공으로 갈지가 결정되는 것.
꼭두쇠의 눈을 바라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최혁재의 엔터테인먼트와 정리하던 그날의 기억이 언뜻 스쳐 지나가며 내게 묘한 기시감을 주었다.
그 뒤로 나는 크게 성공했고 또 크게 망했으니까.
나는 표정을 풀고 미소를 다시 머금고는 멤버들에게 물었다.
“노래 제목은 ‘계절의 서’가 어떤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길을 걷다가 내가 뒤돌아 물었다.
열하가 손을 번쩍 들며 질문했다.
“하오면 서가 무슨 한자를 쓰는 겁니까? 깃들 서? 아니면 책 서?”
나는 싱긋 웃었다.
“한자는 무엇이든 상관없을 것 같아. 별호가 노랫말을 적어 보도록 해. 계절을 담아 써 봐.”
“네! 해 볼게요!”
별호가 눈을 반짝였다.
제자를 다시 산신령이 있는 의원으로 배웅해 주었다.
헤어지기 전, 그가 내게 다시 물었다.
“세월을 어떻게 그려 낼지 기대가 됩니다. 춤을 완성해 공연을 여는 날, 저와 스승님을 꼭 초대해 주십시오.”
나는 그가 건넨 손을 잡았다.
“약속하지요.”
제자와 작별을 고한 뒤, 우리는 숙소에 들러 짐을 챙겼다.
“대표 누이, 이제 또 어디를 가려고 그러오?”
별호가 짐을 등에 지며 물었다.
“우리는 기방, 풍월각에 갈 것이다.”
내 공표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계약서에는 분명 여색을 멀리하라고 적어 두지 않았소? 어찌 아리따운 여인들이 가득한 곳으로 가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오?”
한숨을 쉬며 열하가 되물었다. 별호 역시 두려운 눈으로 말했다.
“그곳에는 꼬리가 백 개가 달린 구미호가 둔갑한 여자도 있다고 들었소. 이 장터에서 지나가다가도 사람들이 풍월각 풍월각 하던데.”
“구미호가 둔갑했건 안 했건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러 가는 것이 맞지.”
나는 덤덤히 말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또한 인연인 것이니, 응원해 주겠다. 그러나 우리의 주 목적은 일을 위해 가는 것이다. 이곳을 주름잡는 기생집, 풍월각에는 엄청난 만능 재주꾼들이 넘친다고 하니까.”
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는 기방 출입이라니, 이러다 재주꾼들이 있다면 저승이라도 갈 판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마찬가지 아니야? 어디든 못 갈 것도 없지.”
거울을 보며 나는 머리를 틀어 올린 후 열하의 갓을 빌려 쓰고 현명이의 옷을 빌려 입으니, 그래도 나름 꽤 남정네처럼 보이는 것도 같았다.
“어떠냐?”
내 물음에 녀석들은 말없이 쿡쿡대며 웃었다.
별호가 천연덕스럽게 넙죽 절을 하며 말했다.
“선비 중의 선비 같으십니다, 대표형님!”
짐을 짊어지고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열이면 아홉이 헤어나지 못한다는 그곳.
풍월각으로.
* * *
풍월각의 초입은 붉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하게 물었다.
“풍월각의 장미를 만나러 왔소.”
입구에 선 여자가 새초롬히 대답했다.
“맨날 다들 그놈의 장미 타령! 다른 꽃들도 얼마나 많다고요.”
내게 몸을 가까이 밀착해 오는 여자를 나는 어색하게 밀어냈다.
“어허, 내 그런 용무로 온 것이 아니고.”
당황한 내 목소리에 열하가 부채를 펴 내 얼굴을 가려 주었다.
“이 선비께서는 부끄러움이 많으시다. 네가 그리 가까이 다가가면 아랫도리가 곤란해지실 것이다.”
여자는 곧 까르르 웃으며 내게서 몸을 떼 내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다들 미남이시어서 소녀의 마음이 설렜지 뭡니까.”
그녀가 웃으며 우리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장미 언니를 만나지는 못하실 겁니다. 지금 한 달째 가득 돈을 가져와 예약해 놓은 자가 있거든요.”
나는 장미의 시중을 든다는 아이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아이는 나를 보더니 화색을 지었다.
“아니, 그 파락호님께서 좀 이상해 안 그래도 장미 언니가 걱정이던 차였습니다.”
사연을 듣고 보니, 장미가 거절했는데도 후처로 맞겠다고 고집하며 매일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돈을 돌려드린대도, 막무가내로 그러시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복도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또 그 방인 모양입니다.”
“일단, 알겠소.”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그쪽으로 뛰어갔다.
우리를 안내해 주던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방문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장미 언니의 안색이 너무나도 안 좋으십니다.”
현명이 내 대신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자가 곤란하다는 듯 등을 돌려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그녀의 오른쪽 얼굴 너머로 창호지를 뚫고 사기그릇 하나가 날아왔다.
그것을 빠르게 잡은 것은 훤이었고 여자를 끌어당겨 보호한 것은 로버트였다.
로버트가 그녀에게 괜찮은지를 묻자, 곧 그녀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현명이가 걱정 어린 눈으로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놀라서 열이 나는 것입니까?”
곧, 여자는 아련한 눈으로 현명이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소녀를 구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옷고름을 입에 가져다 대고 부끄러운 듯 웃는 모습이었다.
그래, 우리 애들이 멋지긴 하지.
“문을 열어라.”
훤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날이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소매를 꾹 붙잡고 헛기침을 몇 번 한 뒤에 말했다.
“나서지 말거라. 형이 들어갈 터이니.”
나는 사기그릇을 들고 미닫이문을 활짝 열었다.
“술버릇 한번 고약하군.”
내 말에 그렁그렁 눈물을 짓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선경이?
나를 면회하러 와 줬던 그 로즈, 선경이었다.
선경이가 풍월각을 주름잡는 기녀라니!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
선경이는 울먹거리던 목소리를 낮게 낮추었다.
“나, 나리, 방을 헷, 갈리신 것 같습니다.”
말을 끊어 하는 선경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옆의 파락호라는 자는 눈이 풀려 있었고 방에서는 지독한 연기가 자욱했다.
나는 현명이와 훤과 차례로 눈을 맞췄다.
“오늘은 내 특별히 풍월각의 주인에게 장미를 만날 기회를 얻었소. 여기 선수금 냈던 것을 받으시오.”
파락호가 음침하게 입술을 떨며 웃었다.
“내 분명, 장미의 모든 시간을 샀는데? 네가 직접 물어보거라, 이 계집이 누구와 있겠다고 하는지.”
나는 품에 있던 엽전 꾸러미를 들어 상에 내던졌다.
“당신이 산 시간을 이번에는 내가 사겠소.”
파락호가 왼손으로 다시 돈을 내 쪽으로 집어 던졌다.
“필요 없대도!”
장미의 모습은 딱 보기에도 불안해 보였다. 몸을 사시나무 떨듯,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파락호의 곁에서 무릎을 꿇은 장미의 자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장미의 저고리 밑 허리에 손을 대고 있는 파락호의 손에 무언가 반짝이는 서슬 퍼런 물체가 보였다.
엽전 꾸러미가 풀어지며 바닥에 엽전이 흩어졌다.
“아이고, 아까운 돈이!”
나는 엽전을 주우며 상 밑으로 넙죽 엎드려 그의 손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그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나는 엽전을 다시 끈으로 잘 묶은 뒤 장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장미, 자네가 골라 주시게. 매일 저 연로하신 파락호와 노는 것보다야 우리와 오늘 밤 물을 마시며 노는 것이 어떤가?”
파락호가 장미의 옆에 몸을 좀 더 바짝 당겨 앉고는 킬킬대며 웃었다.
“네가 오늘 나를 거절한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파락호의 목소리는 낮고 또 집요했다.
열하는 부채를 펴 들고 말했다.
“파락호께서 많이 취하셨습니다. 집에 가셔서 세족 후 취침을 권해 드리는 바입니다.”
‘술 취했으면 발 닦고 잠이나 자라.’구나.
훤이 복도를 통해 소리쳤다.
“이보시오. 파락호 나리께서 집에 가신다고 하오.”
“내, 내가 언제!”
파락호의 시선이 잠깐 이동했을 때, 나는 선장미에게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괜찮을 겁니다. 저를 믿어요.”
그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파락호가 다시 재차 물었다.
“이놈들을 내쫓거라. 장미 네가 나와 시간을 보낸다고 하란 말이다!”
장미가 입술을 열어 단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