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아이돌-24화 (24/27)

24. 계절의 서

그해 후속곡 ‘사계의 서’가 메가 빅 히트를 치면서 그나마 치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아원에게는 일어설 힘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조선 땅에서 맨땅에 헤딩을 하듯 역경을 다시 딛고 일어나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숙소로 돌아와 멤버들 앞에서 아원은 애써 밝은 모습으로 식사를 했다.

“그래도 일단은 노래 연습하고 있어라. 그 노래가 우리 것인 것을 증명해서 다시 가져오면 된다지 않겠어?”

열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이. 노래는 누가 얼마나 잘 불렀는지가 더 중요한 것을 알지 않소? 여기서는 누가 먼저 노래를 불렀는지, 그게 누구의 것인지 중요하지 않소.”

아원이 입술을 꾹 물었다. 알고 있었지만, 녀석들 앞에서 결국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너희가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아니 배신을 당한 내가 너무나도 부끄럽구나.”

모두들, 축 처진 아원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표 누이, 다시 하면 되잖소.”

“맞아요, 대표 누님. 제가 더 연습할게요.”

별호와 현명이가 밝은 목소리로 나를 다독였다.

로버트도 꾹 쥔 악보를 구기며 대답했다.

“내가 그 사람한테 좀 더 배우면 돼!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훤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전화위복일지도 모르지. 이번에는 쉽게 따라 하거나 우리보다 잘할 수 없는 노래를 만들면 그만이니까.”

전화위복(轉禍爲福), 재앙이 바뀌어 오히려 좋은 일이 생긴다.

그랬나.

전화위복으로 서울에서도 많은 일들을 헤쳐 나갔다.

아원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에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그런 그녀를 잡아 준 것은 영원의 멤버들이었다.

“배신을 당하는 것은 배신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니, 대표는 떳떳하지 않소?”

열하의 말에 아원이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그녀의 몰골에 영원들의 마음도 아파 왔다.

물불 가리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일해 왔던 그녀의 곁에 믿음으로써 함께해 주고 싶었다.

훤이 한숨을 조금 내쉬며 머리를 헝클었다.

“누군가를 믿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못하겠소. 대표, 당신이라는 사람이 믿음 그 자체니.”

아원이 입꼬리를 씩 들어 웃었다.

“잠깐 힘들었을 뿐이야. 뒤통수가 얼얼했다.”

로버트가 아원의 머리를 문질러 주었다.

“아까 그 아저씨가 누이를 때렸어?”

모두들 로버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그간 노력하며 지켜 온 노래를 빼앗긴 것은 분명했고, 춤을 받을 곳도 사라졌으니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시각, 아원은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였다.

고된 일정으로 멤버들은 곤히 잠에 들어 있었다.

아원이 살금살금 걸어 나가다가 밖에서 우두커니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는 대청마루의 로버트를 발견했다.

달빛을 받은 아원이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새 노래를 받으러 가자.”

* * *

아침에 일어나니, 아원이 정갈하게 쓴 메모를 남긴 채 자리를 비웠고, 로버트 역시 이부자리에 없었다.

-급히 다녀올 곳이 있으니, 내가 없어도 식사, 운동, 연습 거르지 말 것. 최대한 빨리 올게!♡-

“이 기호는 대체 무슨 뜻이지?”

훤이 일어나 메모를 들여다보자 모두들 옆에 와서 아원이 적은 메모를 들여다보았다.

별호가 손가락 하트를 만들며 말했다.

“이게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하던데. 이 모양과 좀 닮지 않았소? 대표 누이가 알려 준 것이오.”

“사랑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다니.”

훤의 말에 열하가 핀잔을 주었다.

“친애라는 것이겠지, 대표 누이가 설마 너를 연모하겠느냐?”

훤이 열하를 째려보았다.

“일단 너를 연모하는 것도 절대 아닐 것이다.”

투닥거림에 현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재에 나섰다.

“우리 모두를 좋아하시겠죠. 공평하신 분이니까요.”

* * *

산길을 찾아가는 것은 전과 달리 어렵지 않았다.

산길이긴 했지만 그래도 쉬운 편이므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제자가 지름길을 일러 준 곳으로 가자, 전보다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로버트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전에 왔던 길이랑 달라!”

“원래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 하는 거야.”

“이상해, 왜 젊었을 때 일부러 고생해?”

“고생을 해 봐야, 응? 좋은 것도 알고 그러지.”

“아, 그래서 대표 누이 계속 고생하는구나.”

저걸 확 그냥 쥐어박으려다가 푸른 눈으로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는 녀석을 보니 손이 절로 내려왔다.

“미모가 너를 살렸다고 생각해라.”

로버트의 발음을 교정해 주며 폭포에 다다르니, 산신령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그 옆의 제자는 안절부절못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어젯밤부터 약효를 시험해 보시겠다며 이것저것 드시더니 갑자기 저리 드러누워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일단,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노래 이야기를 꺼낼 틈도 없이 로버트와 제자가 함께 번갈아 가며 산신령을 업고 산을 내려와야만 했다.

혼자서는 절대 내려올 수 없는 길이었다.

마을의 의원을 수소문하고 산신령에게 침을 놓는 중, 마루에서 제자가 고마워하며 말했다.

“필시, 급한 일이 있어 저를 찾아 주신 것일 텐데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도왔으니 망정이지, 혼자서 축 늘어진 사내를 업고 왔으면 아마도 산에서 내려오는 도중 사고라도 났을 일이었다.

“저희가 알맞게 찾아간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나는 본론을 꺼냈다.

“저번에 주신 음악을 사실, 빼앗겼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성패에게 빼앗긴 건가요?”

“안성패라면 그 남사당패를 아시는지요?”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를 달라고 찾아왔지만, 저들의 생각과는 달랐는지 성을 내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노래를 일부러 주지 않으셨다고 하던데요.”

제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훈련도 영원처럼 똑같이 시켜 주려 했습니다. 그러자 화를 벌컥 내면서 저들의 뜻대로 하겠다며 내려가 버렸지요. 스승님의 기준에 맞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무슨 시험을 하려 하신 겁니까?”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난 소리꾼이셨다더군요. 그런데 어느 날 목소리를 잃으신 후, 약초로 사람의 몸을 다스리는 데 정진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아, 둘의 사연도 나름대로 깊은 모양이었다.

내가 그간의 사연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동안 로버트는 옆에서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내가 조금 그렸습니다. 같이 봐주실 수 있습니까?”

제자가 그 종이를 빼앗아 들더니 얼굴빛이 환하게 빛났다.

“직접 생각한 겁니까?”

로버트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건 아까 아원 대표가 흥얼거리는 걸 기억했다가 적어 본 겁니다.”

내가 흥얼거렸다고? 아, 산길을 올랐을 때.

기억을 되짚으니 그 노래는 ‘사계의 서’였다.

로버트가 작곡해 흥얼거리는 음은 틀림없이 우리가 빼앗겼던 그 노래였다.

“사계절의 흐름 속에

너의 미소와 온기가 담겨 있어.

그 공기.

내 사계절의 서

그 모든 것은 너와 존재해.”

내가 가사를 읊자, 둘의 눈이 놀라 점점 커졌다.

“노랫말을 지을 줄 아오?”

나는 미소를 띠었다.

“내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 중 한 명이 꿈에서 적어 준 것이지요.”

작곡가와 로버트가 머리를 맞대고 나는 그들의 작업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노래의 뒤를 조선의 스타일에 맞게 변형하니 퓨전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런 느낌은 난생처음이오.”

작곡가가 로버트의 손을 잡으며 기뻐했다.

“형한테 많이 배웠으니 나, 할 수 있었습니다!”

* * *

한편, 그 시간에 남은 넷은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구나.”

열하의 투덜거림에 별호가 끄덕이며 저고리를 휙 올려 보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먹어도 이제는 살도 찌지 않소.”

아원이 말한 대로 밥을 먹고 착실하게 운동을 하고 춤 연습까지 마친 후, 그들은 허탈해졌다.

“빼앗긴 노래를 연습한다고 쓸 일이 있을까요?”

나지막한 현명의 말에 훤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든 힘이 없으면 빼앗기는 법이다. 그 힘을 기르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고. 우리가 그들보다 노래를 잘하면 다시 우리 거라고 믿어 주겠지.”

그들은 폭포에서 배웠던 기본기들을 상기하며 저마다 호흡을 다스렸다.

서로 배를 누르며 확인하기도 하면서.

그러던 중,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들 하고 있었어?”

밝은 아원의 목소리에 저마다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로버트와 제자가 함께였다.

“아니, 이게 어쩐 일입니까?”

열하가 반가워하며 그를 맞아 주었다.

“제가 신세를 졌습니다. 저희 스승님을 살려 주신 것이나 다름없지요.”

멤버들 앞에서 로버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작곡가가 발을 구르며 리듬을 맞춰 주었다.

내가 적어 준 가사를 띄엄띄엄 읽으며 로버트가 노래를 부르자, 멤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대체 무슨 노래요? 처음 들어 보는 느낌이오. 그러나 너무 좋군.”

열하의 말에 훤이 고개를 돌리며 끄덕였다.

“좋긴 하군.”

저 목석같은 자식이 저렇게 얘기할 정도라니.

서울에서의 느낌과는 달리 노래는 로버트와 제자의 느낌으로 새롭게 편성되어 나갔다.

오히려 원곡보다도 훨씬 좋은 느낌이었다.

사계절을 함께한 사람과 걸었던 시간들에 대한 가사들이 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지고 있었다.

별호가 노래를 가만히 듣더니 말했다.

“이 노래를 들으니 사계절이 생각납니다. 뜨겁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로버트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와우, 네가 대표 누이의 꿈에 들어갔다 나온 거구나?”

작곡가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이 곡에 맞는 춤은 어찌하시려는 겁니까?”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춤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을 알고 계실는지요?”

내 물음에 그가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풍월각의 장미에게 가 보십시오.”

“풍월각이라면 기생집 이름 같은데요?”

“네. 직접 가서 꼭 만나 보십시오. 제게 고마워하실 겁니다.”

제자가 싱긋 웃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풍월각의 장미를 찾아가야 했다.

어떤 춤이든지 연습할 강인한 체력은 기본적으로 다들 지니고 있는 편이었다.

다만, 직접 춤을 구성해 칼 군무를 하는 것은 이곳에 와서 아직은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서울에서 아이들은 무대 때마다 소름 끼치는 표정 연기와 각을 잰 듯 하나로 움직이는 퍼포먼스로 이름을 떨쳤다.

뱀파이어 콘셉트나 동물 콘셉트를 할 때마다 아이디어를 내어 동작을 수정하고 결국 마지막 앨범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 콘셉트로 큰 성공을 이뤄 낼 수 있었다.

조선은 이곳 자체로, 확고한 하나의 문화와 기운이 있었다.

콘셉트를 확실히 잡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대중은 확실한 메시지와 볼거리를 원하니까.

안성패와 달리 우리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은 적은 인원이었다.

각 개인에게 집중될 수 있는 시선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었다.

무리보다는 개인, 동시에 개인이 아닌 무리가 눈에 들어오게 하는 일.

내 전문이었다.

곧 그들의 앞에 나타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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