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꿈은 만개하리니
“저는 이 선비님들과 밤을 지낼 것입니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눈이 풀린 파락호가 입술을 쭉 늘리며 샐쭉이 웃었다.
“내가 가지 않겠다면? 응? 장미 이년아! 내 후처로 너를 받아 준다는데도!”
갑자기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 파락호라는 작자가 칼을 내려놓고는 선경이의 가녀린 목을 쥐었다.
멤버들이 저마다 놀란 숨을 들이켜며 가까이 오려 했지만 나는 그들을 저지하며 파락호의 손을 잡은 뒤 아이들에게 말했다.
“문 앞을 막아.”
덩치 좋은 남정네 여럿이 문 앞을 막으니, 부서진 문 사이로 아무도 우리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상 위에 있는 술이 담긴 도자기 주전자로 파락호의 머리를 세게 두어 번 내리쳤다.
장미가 캑캑대며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동안 나는 단검을 발로 차 멤버들 앞으로 멀리 던져두었다.
“이게 어디서!”
파락호가 눈을 번쩍이며 칼을 주우러 가려고 하는 찰나, 별호와 열하가 함께 그를 들어 팔짱을 꼈다.
“나리, 취하셨습니다.”
“집에 가셔서 손도 닦으시지요. 그 죄가 닦일지는 모르겠지만.”
파락호는 버둥대면서 고함을 쳤다.
“풍월각의 주인을 불러와라!”
“대체 왜 이러십니까?”
그때 훤이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놈 역시 약쟁이인 것 같군.”
결국 듣다 못한 훤이 그의 멱살을 잡아 복도로 내동댕이쳤다.
그는 팔다리를 공중으로 허우적대었다.
파락호는 곧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더니 하인의 부축을 받아 나섰다.
그는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나와 장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로버트가 찡그리며 그의 말을 전했다.
“대표, 저 사람이 죽여 버릴 거래.”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전에 내게 죽을 것이라고 대답해 줘.”
로버트가 크게 외쳤다.
“내게 죽습니다!”
별호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로버트 그게 존댓말이야!”
현명이 은장도를 주워 내게 내밀었다.
나는 장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파랗게 질려 덜덜 떠는 그녀에게 내가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어 걸쳐 주었다.
작게 떨리던 그녀의 몸이 진정하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하오나, 제가 폐를 끼친 듯합니다. 저 파락호는 마을에서도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분이십니다.”
열하가 고개를 저었다.
“권세에 걸맞은 덕이 있어야 하오만, 그자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소.”
별호가 내게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대표 누, 아니 형님이 그렇게 직접 나서시면 어쩌자는 거요? 위험하게.”
“나 역시 사람 하나의 몫을 거뜬히 해낼 수 있거늘 무슨 말이냐?
너희가 직접 나서서 응징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내가 대표니 직접 이런 위험한 일에 나서는 것이 맞지.”
내 말에 장미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 소녀 어찌 낭군님을 즐겁게 해 드리면 될까 여쭙고 싶습니다.”
장미가 내 손 위로 손을 포개 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머리를 푹 숙였다.
“오늘 밤, 우리에게 춤을 알려 주시오!”
내 말에 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
“수청을 들면서요?”
나는 고개를 휙 저으며 말했다.
“아니, 수청은 필요 없고 그냥 춤 말이오!”
“네?”
그녀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혹시 어렵겠소?”
내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자, 곧 그녀는 다시 생긋 웃어 보였다.
“그것은 아니지만, 이런 청을 하시는 나리는 처음이라서요.”
“수청 같은 것은 됐고, 그대의 그 예술적 능력에 대해 자자한 칭찬을 들었소.”
순간, 장미의 눈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제 능력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예술적 소양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어, 우리도 그것을 한 수 배우러 왔지.”
그녀가 목이 멘 듯,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그간, 다들 제 얼굴만 보고 수청을 요구하며 저를 찾아 주셨던지라. 제 능력에 대한 칭찬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곧 내가 내민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럼, 그리하지요. 단, 오늘 밤으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곧 장미의 주최로 풍월각에 딸린 별채의 정원에서 작은 공연이 펼쳐졌다.
저마다 손에 부채를 들고 모인 아름다운 기생들이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훤칠하시지 않니?”
“그러니까. 이곳을 찾아 주신 분들 중에 가장 외모가 출중하셔.”
쑥덕거림이 잦아들고 장미의 나긋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단순한 유흥이 아닌 우리가 그간 갈고닦았던 예술의 무희를 보여 드릴 기회다.”
장미가 부채를 탁 공중으로 던졌다가 다시 잡았다.
“하나!”
뒤쪽에 두었던 거문고와 해금을 꺼내 온 기생 둘이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둘!”
기생들이 직선으로 늘어서더니 완벽한 삼각형 대열을 만들어 내었다.
“셋!”
모서리에 있던 사람들이 촤락, 하는 소리와 함께 부채를 넓게 펼쳤다. 장미가 사뿐히 걸어가 그 가운데에서 꽃잎의 수술 역할을 하고 새의 머리를 맡아 그 공연을 진두지휘했다.
부채가 모여 만든 고운 선들이 새의 날갯짓 같아 보이기도 하고, 흐드러진 진달래꽃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나와 멤버들 모두 눈을 떼지 않고 그 공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남사당패의 생동감 넘치는 공연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쉬고 팔딱거리는 활어 같은 생동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기생들이 추는 이 춤은 봄에 불어오는 부드러운 산들바람 같은 아련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부채춤이 끝나자 장미가 싱긋 웃었다.
“이것은 우리가 이번 궁궐에 가 직접 선보일 무희입니다. 어찌 보셨습니까?”
나를 비롯한 멤버들 모두 크게 박수를 쳤다.
“선이 아름답고 부드럽지만 그 내용 안에 전하고자 하는 말이 보였습니다.”
내 말에 장미가 되물었다.
“어떤?”
“흐드러진 꽃잎에 찾아왔던 새 하나가 지는 꽃에 슬피 울자, 떨어지는 꽃잎이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듯했습니다.”
장미가 살짝 미소 지었다.
“무슨 말을 했을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공연을 보는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말을 들었을 것 같습니다.”
장미가 공연을 하고 상기한 얼굴로 서 있는 기생들을 보며 내게 대답했다.
“공연을 하는 저희에게는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비록 우리의 신분이 미천하나 꿈조차 천할 필요는 없다. 곧 다시 꿈은 만개하리니.’”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던진 말에 나는 물끄러미 부채를 정리하는 기생들을 바라보았다.
장미가 주인에게 말해 우리에게 기방에 딸린 작은 안채 하나를 내주었다.
“내, 배우며 머무는 기간 동안의 돈을 미리 쳐서 지불하겠소.”
돈을 건네는 내 손을 한사코 거절하며 주인은 사람 좋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 한량 나리를 이곳에서 떼어 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죠.”
열하가 바깥에서 다른 기녀들과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짐을 풀고 있는데, 대화를 마치고 들어온 열하가 나지막이 한탄했다.
“삼패 기생으로만 남아 있기에는 아쉬운 자들이구나.”
“삼패 기생이 뭐야?”
내 물음에 훤이 대답했다.
“기생은 일패 기생, 이패 기생, 삼패 기생으로 나뉘지. 그중에서도 일패는 궁궐에서 임금의 앞에서 춤과 노래를 보이는 자들이지.”
열하가 그 말을 이어 나갔다.
“삼패는 마을의 한량들과 중인, 돈만 있는 졸부들을 주로 상대하오.”
현명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예전에 기생이셨지요.”
곱고 단아한 자태를 지닌 현명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훤이 말했다.
“궁궐에 가면 삼패 기생에서 일패 기생으로 올라갈 수도 있으니, 다들 이번 경연을 준비하는 모양이더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그럼 저이들은 모두 신분이……?”
별호가 씁쓸히 웃었다.
“나와 같은 천민이겠지.”
그래서 아까 꿈까지 천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했던 것일까?
우리가 경쟁자라는 것을 알려야 했다.
후에,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니까.
내가 문을 벌컥 열고 나가자, 때마침 그 앞에서 장미가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내 물음에 그녀가 수줍게 답했다.
“시장하실까 싶어 숭늉을 좀 만들어 왔습니다.”
나는 그릇을 방에 넣어 주었다.
“나눠 먹자고! 공평하게!”
“나이순으로 많이 먹자.”
“어허, 영원의 선후배순으로 먹어야지!”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부끄러워졌고 장미는 풋, 하며 미소 지었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여유와 미소였다.
나는 그녀와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 말할 것이 있소. 우리도 이번 궁에서 열리는 경연에 참석하는 자들이오.”
“그래서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하신 것이로군요?”
그녀는 조금 놀란 듯했다.
“혹시 주저된다면 지금 편하게 얘기해 주셔도 되오. 아무래도 경쟁자를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내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희 천한 기생들도 도전하는 것에 나리들께서 참여하신다는 것이 어찌 놀랄 일입니까?”
“고맙소.”
내 미소에 그녀 역시 생긋 웃어 보였다.
“우리 아이들에게 당신들의 그 선의 부드러움을 가르쳐 주셨으면 하오.”
“예, 그러지요.”
“걱정이 되지 않소?”
“가르치는 것에 배우는 것 역시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과도 서로 상호 절차탁마하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을 성장으로 이어 나가겠다는 말이군요.”
서울에서 봤던,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그 희망에 진심이었던 동생 선경이를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그녀에게서 알아낸 춤사위들은 이곳의 국악 선율에 잘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멤버들의 이번 공연에 대한 가닥이 선명히 보였다.
부드러움과 카리스마를 결합한 춤이 영원의 느낌에 알맞았다.
“술상이 앞에 없는데 이렇게 즐겁고 가뿐한 기분으로 담소를 나눈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짧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간 후, 나는 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남자라고 생각해 방을 하나밖에 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 여분의 이불을 챙겨 마루에 깔았다.
“밤공기가 차구나.”
긴 하루였기에 까무룩 잠에 들었는데, 하나도 춥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위로 이불이 다섯 겹은 족히 쌓여 있어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이게 뭐야!”
내 고함에 저고리에 두루마기까지 챙겨 입은 녀석들이 머리는 까치집을 해서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오?”
열하의 말에 내가 이불 더미를 가리켰다.
“자다가 응? 압사당하는 줄 알았다!”
별호가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누이가 추울까 봐 우리가 이불을 모아 덮어 준 것이오.”
훤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분명, 과한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거늘.”
“아주 땀나도록 따뜻하게 자게 해 줘서 고맙다. 응?”
내가 눈을 부라리며 인사하자, 멤버들이 저마다 웃음 지었다.
그러나 그 나른한 여유와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낮의 장미는 누구보다도 엄격했다.
“부드러운 선은 집중에서 나옵니다. 동작을 해내는 손끝까지 집중을 놓지 마십시오.”
까치발로 멤버들을 서 있게 하면서 그녀 또한 까치발로 사뿐히 걷고 있었다.
“까치발로 그리 어찌 돌아다니는 것이오?”
“사뿐한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장정 다섯이 까치발로 돌에 발을 디디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