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다음 행선지
늦은 시각,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이 주막 평상 위에 모였다. 훤이와 열하, 별호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성과가 있다!’
훤이를 설득하는 일이 까다롭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리더는 달랐다.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안정감을 주었으니까.
“피곤한데 빨리 말하고 파합시다. 방금까지도 진사랑 말싸움을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래, 그래. 네가 고생이 참 많았지.”
열하는 심리를 계속하다 온 것이라 피곤해 보였다. 반면 별호는 진사 집에서 이것저것 많이 먹고 와 혈색이 돌았다.
훤은 평상에서도 바른 자세로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때 열하가 눈치를 보며 입을 뗐다.
“뭐 불편한 것이 있으신 것이나이까?”
“……네 말투가 불편하군.”
“하하, 제가 무슨…… 혹시 산에서의 일이 불쾌하셨다면 사과하겠다이나이다.”
“다이나이다는 뭐야?”
별호가 끼어들자 열하가 냅다 소리쳤다.
“조용히 해라! 네가 끼어들 대화가 아니니라!”
열하는 땀을 삐질 흘렸다. 별호는 열하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나는 훤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잘한 일이겠지?’
절대 한 팀을 하기 싫다고 말하는 열하를 설득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열하에게 훤이 사실 왕자라고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나는 사실과 거짓을 조금 섞어 그에게 은밀히 이야기했다.
열하는 지금 훤을 궐에서 은밀하게 조사하고 있는 세력 중 하나라고 알고 있다. 왕의 먼 친척이라고까지 해 두었다.
처음에 열하는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으나 왜 양반을 살해하는지, 원(怨)이라는 글자는 왕의 수하가 적대자를 처단할 때 사용하는 글자라는 것을 알고서는 믿기 시작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절대 계약하지 않을 것 같았던 훤이 계약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훤은 조건을 걸었다. 일은 일대로 하되, 자신의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나는 최대한 협조할 거라는 조항도 추가해서 써 두었다.
“말했다시피 우리는 같은 동료고 앞으로 볼 꼴 못 볼 꼴 다 봐야 하는 사이야.”
“…….”
“그러니까 서로 말은 편하게 하도록 하자. 물론 나한테는 존댓말 해! 깍듯이 대표 누이라고 부르고!”
별호는 내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는 지금 기분이 최상인 상태였다.
처음으로 노비 문서 따위가 아니라 동등한 계약을 이행하는 문서에 서명을 했으니 말이다.
열하는 계약서를 가져가만 놓고 아직 사인은 하지 않았다. 꼼꼼한 열하는 증빙할 서류가 있느냐, 누군가가 증인으로 서야 하지 않겠느냐 하며 따져 물었다.
“너도 주모 일을 하는 거라면 낮에는 시간이 안 되겠군.”
훤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일어나 주막 안을 살펴보았다.
별호가 지내는 별채와 내가 지내는 안채까지 꼼꼼히 들여다본 그는 마당에 있던 짐을 들었다.
그리고 짐을 자연스레 안채에 두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긴 내 방인데?”
“이 방이 안방 아닌가?”
“그렇지?”
“그럼 내가 쓸 곳이지.”
훤은 당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마터먼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에이, 그건 안 되지. 너는 합숙 생활을 시작해야 해. 별호랑 같은 방을 쓰면 돼.”
“……방 좁은데.”
별호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훤은 나지막이 입을 뗐다.
“난 이 방을 쓰겠다.”
“……안 된다니까?”
“내가 어찌 이런 자와 같은 방에서 지내고, 더 좋은 방이 있는데 허름한 방을 쓰겠는가?”
“움막에서는 그럼 여지껏 어떻게 잤대?”
“…….”
훤은 조금 머쓱했는지 헛기침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짐을 옮기지는 않았다.
‘이런…….’
방을 가지고 대표와 소속 가수가 싸워야 하다니. 갑자기 내 신세가 처량해졌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팔짱을 꼈다.
“그럼 이 시간쯤에 모이는 것으로 알면 되는가?”
“아니. 시간은 모두 비워 놔.”
“저자는 관아에서 일하고, 너는 주모 일을 해야 하지 않나?”
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부터는 주모 일 안 해. 일은 하나만 할 거야. 너희를 키우고 다른 멤버…… 아니, 다른 인원을 보충하는 일.”
“뭐라? 아니, 그럼 내 관아의 일은 어쩐단 말이오?”
열하가 벌떡 일어났다. 열하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러나 각자 할 일을 하고 한두 시간씩 작업하면 너무 더딜 것이다. 하나는 포기하는 게 맞았다.
아쉽긴 하지만 열하는 밤에 스파르타 교육을 하고, 나머지 두 사람만이라도 완벽하게 무대를 씹어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멤버도 찾아야 하니까…….’
훤이를 보고서 확신이 들었다. 훤이까지 이전의 삶과 비슷하게 살고 있다면…… 나머지 멤버도 확실히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내일 마지막으로 남은 음식 정리하고 나서 식당 문은 닫아.”
“……주모 누이…… 아니, 대표 누이, 정말 그래도 되겠소? 그래도 일궈 온 노력이 있을 것 아니오?”
역시 날 걱정해 주는 건 별호밖에 없었다.
“그리고 음식을 팔지 않으면…… 내 밥은 어떻게 먹소?”
그럼 그렇지. 별호의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아올랐다.
나는 화가 나는 마음을 애써 누른 채 씩 웃었다.
“사 먹을 만큼 돈을 벌면 되겠지? 그리고 그러려면 네가 열심히 몸을 굴려야겠지? 어?”
어서 빨리 주모 신분을 버려야 했다.
* * *
마지막으로 주막 문을 열면서 나는 파격 할인가를 걸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마을 주민이 아닌 사람들에 한해서만 국밥을 반값에 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 행사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원성을 사긴 했다.
“우리가 국밥을 먹으면 그 사람들보다 더 먹었지!”
“암암! 근데 왜 우리는 가격을 낮춰 주지 않는 거요?”
“우리도 적게 받으시오!”
“아이, 이거 왜 이러십니까…….”
별호는 특유의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마을 사람들을 상대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마을에 잠시 묵는 사람들이 얼마나 궂은일을 하는지요. 우리 주모의 너른 마음을 헤아려 주시오.”
별호는 아녀자들만 골라서 눈웃음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그래…… 뭐 사람들이 다 고생하는데…….”
“값을 올리지 않는 게 어디야?”
“아니, 이 여자들이 왜 이래! 이놈이 몸이 좋아서 이러는 거지?”
결국 내가 생각한 이벤트는 그대로 진행했다. 덕분에 주막은 낯선 얼굴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나는 동동주 한 사발씩을 상에 올려 주며 그들의 말을 하나하나 들어 보았다.
“아이고, 고맙소! 주모! 우리가 덕분에 이렇게 배부르게 밥도 먹고 술도 먹는구먼!”
“그러게나 말이오! 매번 밭만 갈던 놈들이 포식도 하고…….”
한 상은 밭일을 대신해 주며 돈을 벌어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북쪽 지방의 사내들이었고…….
“우리도 마찬가지요! 가축을 팔아서 가야 해서 돈이 부족했는데…….”
“맞소. 밥을 어찌나 많이 먹는지…… 한양 땅에 가축 하나 데리고 오려면 돈이 참 많이 들지!”
저들은 아래 지방에서 온, 가축을 팔아 농사를 지으려 하는 평민들이었다.
“우리만 하겠소? 배를 타고 비린내를 맡아 가며 얼마나 갖은 고생을 하는데…….”
“요즘에는 좀 괜찮지 않소? 말이 안 통해서 그렇지, 몸은 꽤 쓰잖아?”
“그러니까. 언제 말이 통할는지…….”
‘찾았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그들의 상 앞에 앉았다. 그들은 서해안 쪽에서 어업을 하는 어부들이었다.
바다 아래에서 햇빛을 받는 그들의 피부는 까슬까슬했고, 머리카락 또한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일이 많이 힘드시죠? 내가 동동주 한 잔 더 올려 드릴게요.”
“아이고! 우리가 오늘 계를 탔구먼!”
“걱정 말고 드십시오. ……그런데 말이 안 통하는 자라니, 그건 무슨 소리예요?”
“아, 한양 땅에는 몇 없어서 모르겠구먼?”
동동주를 한 사발 들이켠 사내는 기분 좋은 얼굴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렇게 일을 하다 보면 배를 잘못 타고 온 놈들이 꼭 하나 있지.”
“어딜 가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알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눌러 앉히고 부려 먹는 거지. 이래 봬도 그들이 힘이 아주 세거든.”
이들은 불법으로 외국인을 부리는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조선이었다. 불법으로 노동을 시킨다는 개념 자체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어색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물었다.
“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생겼는데요?”
“하! 주모가 말이 좀 통하는구먼? 다양하지! 우리랑 외모는 똑같은데 말을 이상하게 하는 놈들도 있고…….”
“우리랑 눈동자 색깔도 다른 놈도 있지. 거기도 아주 장난 아니야!”
“에이! 무슨 그런 소리까지 하세요?”
“……큼큼 그런가? 아무튼 특이한 놈들 구경하려면 서쪽으로 오시오. 아, 원한다면 내가 소개해 줄 수도 있지.”
사내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진지한 음성을 내기 시작했다.
“돈은 좀 가진 게 있소? 원한다면 내가 한 명 구해다 줄 수도 있소. 일도 저 몸 좋은 놈보다 잘할 테고…… 밤에도 아주 쓸모 있을 것이고.”
킬킬거리는 사내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저는 취향이 아주 독특하답니다. 익은 벼 머리 색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놈도 있어요?”
“흐음…… 푸른 눈이라…….”
“누구는 청량한 하늘을 닮은 색이라고 하고, 누구는 연한 바다 색깔을 닮았다고 하죠.”
“……오? 혹시 그놈을 이야기하는 건가?”
건너편에 앉은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왜, 이번에 배 잘못 타고 들어와서 오징어 눈깔 떼던 놈!”
“아? 그놈?”
“그놈 이름이 혹시?”
“뭐랬더라…… 오반인가?”
“오씨는 확실하지!”
“오반…….”
사내는 내게 동동주를 따르라며 잔을 들어 올렸다. 나는 애교 있는 얼굴로 동동주를 따라 주었다.
“그런 이들이 그곳에 많나요?”
“아주 차고 넘쳐 나지! 그리고 거길 통하지 않으면 못 구해.”
“못 구한다니요?”
“큼…… 그러니까 거기에는 그런 놈들만 관리하는 곳이 따로 있다고. 거길 찾아가야 할 것이야.”
“……그러니까 그놈들을 사고팔고 관리하는 놈들까지 생겼다 이 말이군.”
“넌 누구냐?”
어디선가 나타난 훤은 그들의 자리에 앉아 동동주를 검집으로 쳤다. 동동주 잔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가 났다.
나는 화들짝 일어나 훤의 앞에 섰다. 그의 눈빛이 매서워 보였다.
“왜, 왜 이래?”
“인간을 나라의 허락도 없이 사고파는 일이…… 조선 땅에서 가당키나 하나?”
“인, 인간을 사고파는 게 아니라…… 그놈들을 사고파는……”
“그러니까 그놈들은 따로 관아에 고하지 않아도 된다? 니들이 보기에는 인간도 아니니까?”
분위기가 한순간에 착 가라앉았다. 밥을 먹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별호를 불렀다.
“훤이 좀 방 안으로 데려가.”
“알겠소.”
별호는 훤이를 힘으로 잡아 방으로 데려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하, 저놈이 아직 뭘 모릅니다. 소란이 있었으니 동동주 한 사발씩 더 가져다드리지요!”
다행히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나는 뱃사공들에게 수육을 건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셔요. 저 아이가 책을 좀 읽더니 맛탱이가 갔나 봅니다.”
“……크흠, 그러게나 말이오! 우리처럼 열심히 일해서 나라에다 돈을 갖다주는 놈들이 어디 흔한 줄 알고…….”
“그러니까 요즘 젊은것들은!”
“그러나 저는 다릅니다. 저는 젊은것들을 필요로 하는 여인이거든요.”
나는 눈빛을 반짝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게, 그 장소를 일러 주셔요.”
“……주모, 정말로 돈이 좀 있어? 많이 필요할 텐데?”
“제가 왜 주막을 정리하겠습니까? 새롭게 시작하려고 그런 거지. 새롭게 시작하려면, 새로운 사람을 찾아야죠.”
다음 행선지는 쉽게 정해졌다. 술과 음식을 파는 곳에는 정보가 쉬이 나오기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