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아이돌-9화 (9/27)

9. 거래 조건

훤이는 내 팔을 뿌리친 채 허리춤에 찬 검을 빼어 들었다. 그의 눈에서는 서늘한 살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냐?”

“……”

“아버지가 보낸 자객인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네 복수를, 내가 이뤄 줄게.”

“그 입, 다물라. 죽여 버리기 전에.”

나는 스스로 검 끝에 목을 갖다 댔다. 훤이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는 널 알아. 넌 나를 죽이지 못하겠지.”

“……더 이상 다가오면……”

“그리고 철저한 성격이라는 것도 알고.”

“…….”

“계약하자. 계약서를 써. 내가 네 복수를 도와준다는 내용을 적자.”

“너…….”

“대신 너도 날 도와야 한다는 내용을 적어야 할 것이고.”

훤이는 내 말에 검을 거두었다. 그러나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히 똑같았다.

“내 복수를, 네가 도울 수 있다고?”

“그래. 네가 원하는 일을 내가 이뤄 줄게. 넌 내가 원하는 걸 이미 이뤄 주었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야.”

“난 널 처음 본다.”

“난 널 오래도록 지켜봤어.”

“……이해가 안 되는군. 너 같은 아녀자가 날…….”

“솔직히 너도 무섭잖아. 혼자서 그 일을, 너 감당할 수 있어?”

“…….”

“너에게 필요한 건 믿을 수 있는 사람 같은데?”

훤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왕족…….’

외자 이름은 왕족만 쓸 수 있다고 했을 때 나는 훤이의 처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왕이 되어야만 하는 자가, 산속에 숨어들어 양반을 죽이고 있다.

그 양반은 사리사욕에 찌들어 비리를 저지른 패악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양반은 왕의 수족이었다.

왕족인 훤이의 칼날이 왕당파로 향했다면, 훤이는 분명 궁에서 버림을 받았거나 도망 나올 수밖에 없는 신세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낮에 보았던 남사당패의 연극이 스쳐 지나갔다.

남사당패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왕과 충신들을 희화화하는 연극을 했다.

그들은 무력한 왕이 매번 거두는 세금과 뿌리 깊은 원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들의 연극에 왕세자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했다.

“같이 가자. 네게 힘이 되어 줄게.”

“힘이라. 그래. 네 말대로 내게는 나를 믿어 줄 사람이 필요하지.”

“그래! 그게 내가……”

“그런데 너는 나를 도울 힘이 있나?”

훤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그는 어딘가 피곤한 기색이었다.

“네가 내 정체를 우연히 알게 되어서 어떻게든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을 속셈이면?”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우리가 한배를 타야 한다면, 수지타산이 맞아야 하겠지.”

“…….”

훤이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원래 같았으면 네 말을 듣지도 않았을 텐데…… 나도 이상하군. 네 말대로 사람이 그리웠나. 그게 어떤 사람이든?”

“…….”

“능력을 보여 줘라. 네 능력이 내가 만족할 수준이면…… 내가 널 믿어 보지.”

“…….”

“그리고 확실한 신분을 밝혀야 할 것이다. 난 너를 지금 살려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훤이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계약서를 써서 널 찾아갈게.”

“난 오늘 여길 떠날 것이다.”

“그래. 네가 어디 있는지 찾는 것부터가 내 능력을 보여 주는 일이겠지.”

“…….”

“이따가 보자, 훤아.”

나는 그를 등진 채 다리를 절뚝이며 아래로 내려갔다.

* * *

훤은 혼자 남아 움막에 있던 짐을 정리했다. 매번 혼자였던 움막이 잠깐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웠던 게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들…… 그리고 그 여인…….’

훤은 짐을 챙기다 멍하니 마을 아래쪽으로 가는 길을 응시했다. 통성명도 하지 못한 여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길을 내려갔다.

호랑이를 보며 겁에 질렸던 그 여자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자신의 신분이 밝혀질 위기였으나 훤은 망설임 없이 그들을 구했다.

왜일까?

장터에서 셋이 도란도란 앉아 떠들던 모습이 부러워서?

훤은 장터에서 그들을 먼저 보았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장터에 쏠린 틈을 타 마무리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남사당패의 놀이를 구경하던 여인을 처음 보았다. 그 옆을 지키던 두 명의 사내 또한.

그들은 남사당패의 놀이를 다 보지도 않고 산 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훤의 은신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또한 범이 출현한다는 소문에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산이었다.

훤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쫓았다.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덩치 큰 사내나, 비단옷을 빼입고 여인의 눈치를 보던 사내 또한 여유로워 보였다.

자신이 저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던 것은 언제였나? 그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지금의 마음에 비하면 그때 느낀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인은 훤의 신분을 이미 알고 있다. 아니, 알게 된 것 같았다. 움막 안에 둔 어떤 단서를 보게 된 것일까?

그러나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믿겠다던 그 표정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한 유모의 표정과 비슷했다.

‘내 정체를 알면 관아에 고할 일이다……. 아무도…… 내가 왕의 후계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 흔한 연극에도 훤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죽은 듯 잊히고 있었다. 하나뿐인 왕세자임에도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책봉은 미룬다.”

“전하!”

“그리할 것이다. 내 혈통이 하나뿐이래도, 아비를 거역하는 놈을 책봉할 수는 없다!”

“어찌 그런!”

“저놈의 눈을 보아라. 저게 어디 아비를 보는 아들의 눈이 맞는 것이냐?”

“…….”

“저놈은 나를 죽일 것이다. 그렇지? 응?”

어떻게 그렇게 되어 버렸을까? 어떻게 왕궁은 망하는 길로 스스로 들어가 버린 것일까? 훤은 그것을 홀로 캐는 중이었다.

여인의 말대로 이 일은 가다가 멈출 일이었다. 양반 두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지금도 황궁에서는 자객을 보내 훤의 발자취를 쫓고 있었다.

‘과연…… 그 여인은 날 찾을 수 있을까?’

아무리 자신의 신변을 알았다고 해도 훤이 숨는다면 여인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훤은 내심 피어오르는 기대를 멈출 수는 없었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감각은 훤이 찾고 싶지만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주 오래전에 이미 잊은 감각이었다.

* * *

고을의 황 진사댁은 언덕에 위치한 기와집이었다.

튼튼하게 쌓아 올린 집은 어느 마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넓었다. 또한 천지에 깔린 것이 무사였다.

‘양반까지 죽고 있다지 않소?’

‘죽어도 싸지.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쌀 포대가 몇 가마니인 줄 아시오!’

‘맞소! 입에 풀칠을 하려 해도 할 것이 없소!’

‘죽어도 마땅하지!’

바깥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아니, 흉흉한 소문은 곧 사실이었다.

창고에 곡식을 쌓아 놓고 사는 양반은 욕심의 우물을 채우기 위해 평민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중 악명이 제일 높은 자가 바로 진사댁이었다. 고을에서 제일 넓은 땅과 집이 있음에도 창고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일하는 노비가 죽으면 돈을 내어 다른 자를 사 왔다. 그것도 장례를 치러 줄 돈이 아까워 죽기 직전 숨이 달싹일 때, 노비를 맨몸으로 내쫓았다.

창고에 쌀이 한 톨이라도 빈다며 트집을 잡은 매타작이 이어졌다.

노비들은 집 안에서 함부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허리를 굽히며 땅만 보고 걸었다.

그런 진사댁에서도 원(怨)의 표식이 발견되었다. 사방팔방에 붙은 표식을 보며 진사는 사색이 되었었다.

그 표식을 받은 자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단칼에 목이 베여 죽었다.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입과 혀가 나온 채로 굴러다니는 머리를 겨우 수습했다.

진사댁은 거금을 들여 수십 명의 무사를 배치했다. 노비 옷을 입혀 위장을 하기까지 했다.

집에는 일하는 사람보다 무사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든 사내가 어둠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고요한 발걸음으로 지붕을 타고 올라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검은 복면을 뒤집어써서 눈만 내놓은 채였다.

그런데도 그 눈은 달빛보다도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사내는 조심스레 땅으로 내려갔다. 무사의 목을 꺾고, 뒤통수를 내리치며 하나둘 기절시켰다.

그는 이미 조사를 다 마친 상태였다.

넓은 이 집에서 진사가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어느 위치에 베개를 놓고 머리를 대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복도 안으로 침입했다. 촛불이 일렁이며 그의 그림자가 작아졌다 커지길 반복했다.

그의 그림자와 몸이 일치하는 곳. 훤은 문 앞에 서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양반의 모습이 보였다.

훤은 허리춤에 찬 검을 천천히 빼어 들었다. 날이 선 검과 검집이 부딪치며 서슬 퍼런 목소리를 냈다.

“일어나라.”

“…….”

“네 목을 가지러 왔다.”

“꼬르륵.”

‘꼬르륵……?’

훤은 황급히 덮고 있던 이불을 거두었다. 그리고 누워 있던 양반…… 아니,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왜 이제 오는 거냐?”

“넌…….”

“별호다. 너가 아니라.”

“여긴 어떻게 왔지?”

“대표 누이가 여기 꼼짝 말고 누워 있으랬거든. 그럼 네가 올 거라고.”

“이 방의 주인은 어디로 갔느냐?”

훤은 굳은 표정으로 별호에게 물었다. 반면 별호는 여유로운 얼굴로 하품을 크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하가 데리고 갔어. 아마 밤새 조사를 하느라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을 거다.”

“뭐?”

“열하가 제 관아로 데리고 갔어. 그자는 벌을 받을 것이다.”

“하.”

훤은 가소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다시 차가운 얼굴로 입을 뗐다.

“이제 겨우 사또가 된 애송이가, 확실한 증좌도 없이 벌을 준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 일 같으냐?”

“나는 모르지. 난 그런 일과는 거리가 멀거든.”

“네…… 대표 누이라는 자는 어디 있느냐?”

“누이가 이걸 주라고 했다. 여기서 기다리면 누이가 올 거야.”

“…….”

“난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네. 조금 이따 보자고!”

별호는 배를 움켜쥐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훤은 그가 준 종이를 받아 자리에 앉아 펼쳐 보았다.

그는 천천히 내용을 살피고 또 살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비단옷을 빼입고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올린 여인. 익숙한 얼굴이었다.

“……널 대표 누이라고 부르더군.”

“약속대로 너도 그렇게 불러야 해.”

“이걸…… 네가 다 생각한 일인가?”

“응. 내가 말했잖아? 계획이 다 있다고.”

“어떻게 평민 주제에 어떻게 이렇게까지 조사했지? 그 짧은 시간에?”

훤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는 큰 눈을 깜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래 봬도 사업을 오래 했거든. 누군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건 내게 너무 익숙해.”

“…….”

“그리고 이 나리들은 자신의 약점을 누군가 건드린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하셨는지 너무 대놓고 일을 저지르셨더군.”

“……넌 누구지? 세도가의 숨겨진 딸이라도 되나?”

“난 누구의 숨겨진 딸도 아니고 밀정도 아니야. 너희의 대표가 될 사람이야.”

그녀는 소매 속에 숨겨 두었던 다른 종이를 꺼내 훤의 앞에 내려놓았다.

“말했지? 계약하자고. 거기 쓴 이름 옆에 내 도장을 찍었어.”

“……서……아원.”

“응. 내 이름이야.”

훤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아원이 준 종이를 확인했다.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아원은 눈치를 보며 기침을 했다.

“그, 그래. 지금 당장은 어이가 없을 수도 있는데……”

“네가 하자는 계약이…… 이딴 건가?”

“아니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달라! 그러니까 이건……”

“남사당패를 만드는 일? 그걸 나보고 하자고? 그걸로 복수를 하고 돈을 벌겠다는 소리였나?”

훤은 차갑게 아원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원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훤과 눈을 맞췄다.

“해야지, 당연히.”

“……내가 어떻게 이딴……”

“왜 못 해? 네 신분을 밝힐 수도 없으면 넌 뭔데?”

“…….”

“정신 차려. 남사당패가 되자고 하는 게 우습게 느껴져? 춤추고 노래하면서 돈 번다는 게?”

“…….”

“그렇게 해서라도 유명해져야지. 아무도 못 건드리게, 우리를 건드리면 민심이 요동친다는 게 느껴지게…… 우리 한마디면 사람들이 흔들리는 게 느껴지도록.”

“…….”

“그게, 내가 하는 일이야. 대중의 환심을 사고 그 사람들의 숨통을 터 주는 거.”

아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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