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랑 같이 가자
약초를 캐러 간 훤이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에서 혼자 지낸 건가?’
밤에 불을 피운 흔적이나 말리기 위해 줄에 걸어 둔 옷가지가 눈에 띄었다. 너무나도 초라했다.
“대표 누이, 왜 저자의 집까지 따라오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오?”
별호는 바닥에 누워 하품을 하며 내게 물었다. 환경이 여의치 않아도 어디서나 머리부터 대고 보는 녀석이었다.
“역시, 수상하구나.”
열하는 매서운 눈초리로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괜히 훤이가 와서 역정을 낼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열하야, 그만 보고 앉아. 실례잖아.”
“……흐음.”
열하는 내 말에도 멈추지 않고 움막 안으로까지 들어갔다. 그를 제지하려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주춤댔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목에 통증이 올라왔다. 입술을 살짝 깨물어 신음을 삼키는데 열하가 턱을 매만지며 움막 안에서 나왔다.
“역시.”
“왜 그래?”
열하는 종이를 들고 굳은 표정으로 내 앞까지 왔다.
“아까 내가 추노를 피해 산에서 숨어 사는 노비 얘기를 하지 않았소?”
“알아. 그럼 훤이가 노비라는 거야?”
‘그럴 리가…….’
서울에서의 훤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모습을 갖췄던 훤이.
그의 집안은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기업이었고, 그는 그 집안의 장손이었다.
열하도 아이돌을 시키고 계약하기까지의 많은 부딪침과 고난이 있었으나 훤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훤이는 아이돌로 얼굴을 내비치지 않아도 언젠가 뉴스에서 대기업 후계자의 모습으로 나올 아이였다.
그러니까 훤이는 아이돌을 해서 돈을 얻는 것도, 유명세도 전부 뒷전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영원의 멤버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은 이전의 생과 아이들의 생이 비슷해서였다.
몸을 잘 쓰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별호는 머슴을 하고 있었다. 순진한 머리로 뒤통수를 맞아 가면서.
책을 가까이하고 머리가 똑똑한 열하는 여전히 여기서도 장원 급제를 해서 관아의 관직을 꿰차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아이들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물론 외국인인 로버트나 현명이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를 테지만…….
‘그런 훤이가 노비라니!’
차라리 검객이나 추노꾼을 하고 있다고 했다면 쉽게 믿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조선에서의 신분 격차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역시 신분제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가…….”
“그게 무슨 소리요?”
“아냐.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그러고 보면 너는 꽤나 운이 좋구나.”
“뭐요?”
“넌 이곳에서도 네 비상한 머리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났잖니.”
이곳은 신분제로 돌아가는 사회였다. 훤이가 노비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그가 아무리 잘났어도 노비였을 테니 말이다.
열하는 내 말을 듣더니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난 그자가 노비라고 생각하지 않소.”
“뭐? 방금까지 추노 얘기를 하면서 노비를 들먹였잖아.”
열하는 턱을 매만지며 입을 뗐다.
“산에 노비도 사는 건 사실이고…… 또 완전히 다른 신분도 산을 찾게 되지.”
“……무슨 소리야?”
“노비가 산에서 살기로 마음을 먹으면…… 이런 허술한 거처를 지었겠소?”
“…….”
“이건 금방이라도 떠나려 하는 자의 모습 아니오?”
그건 열하의 말이 맞았다.
이곳이 집이라면 움막이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었다. 또한 몇 벌 안 되는 옷가지나 작은 짐 꾸러미 또한 걸렸다.
“그러게 말이야. 밤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장작만 종일 팼어야지!”
별호가 한 소리 거들었다.
“그렇다면 훤이가 뭐라는 거야?”
“훤?”
“그래. 쟤 이름은…… 내가 아는 게 맞는다면, 훤이야. 네가 열하인 것처럼.”
“성은 아시오?”
“그건 아직 모르지만, 아마 한훤이겠지.”
열하가 가느다란 눈초리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의심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럼 성이 한이요, 이름이 훤이라는 거요?”
“그게 왜?”
“……대표 누이는 알다가도 모르겠소.”
열하는 나와 눈을 맞추며 또박또박 말했다.
“노비도, 평민도 양반도…… 아무도 외자 이름을 쓰지 않소.”
역시 이곳은 내가 아는 조선 시대와는 많이 달랐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외자 이름은 왕족의 것이니까.”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열하는 입술을 비죽이며 이어서 말했다.
“저자의 이름은 훤이 아니라 훤인이나 환자겠지. 미친놈…….”
열하는 머쓱한 듯 내 눈치를 보며 큼큼거렸다. 나는 그를 부추기며 물었다.
“아까 이야기를 좀 더 해 봐. 노비 말고, 산속에 숨어드는 사람 말이야.”
그는 내게 종이를 보여 주었다. 종이에는 원(怨)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관아에서 일을 하는 건 알고 있지 않소?”
“그래.”
“관아에서는 이 글씨가 벽보에 붙어 있소. 왜인 줄 아시오?”
“……왜?”
“양반 가문에 누군가가 이 종이를 붙여 놓고 다니기 때문이오. 벌써 셋이나 그랬지.”
“그게 왜……?”
“그리고 그중 둘은 이미 저승으로 건너갔고. 뭐…… 그들의 죄목을 따진다면야 진즉에 모가지가 날아가도 할 말이 없었지만.”
놀란 얼굴로 열하를 바라보았다. 열하는 꽤나 진지한 모습이었다. 책을 읽거나 어떤 사건에 몰입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산에서 이렇게 움막을 짓고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오.”
“은신처.”
내 말에 열하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끝나면, 언제든 이곳을 떠날 자라는 얘기지.”
우리 말에 호기심을 느낀 별호가 일어나 다가왔다. 별호는 다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떠난다고?”
“넌 몰라도 된다.”
“왜! 나도 알려 주시오!”
“가서 자른 나무 판때기 이고 갈 준비나 하래도!”
열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뾰족한 돌을 들고 나무에 작게 표시를 했다. 그는 돌을 소매 안에 넣었다.
“뭐 하는 거야?”
“이자의 움막에서 이것이 나왔으니, 내일 동이 트면 난 해야 할 일을 하겠소.”
“……훤이를 잡겠다는 거니?”
“쯧, 그자의 이름은 훤이가 아니라니까. 외자는 왕족의 이름이라고 하지 않았소. 왕족이 왜 이런 움막을 짓고 살겠소?”
“열하야, 잠깐…….”
나는 열하의 말을 자르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당황스러운지 나를 내려다보았다.
“뭐, 뭐요?”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거요?”
“훤…… 그래, 아무튼 이 사람을 신고해서는 안 된다고.”
“왜지?”
옆에 서 있던 별호가 열하 대신 내게 물었다.
“그건…….”
“이봐, 대표 누이. 우리가 아무리 같은 길을 걷기로 했대도, 이걸 눈감아 줄 수는 없소.”
“열하야, 생각해 봐. 저자는 우리를 구해 준 은인이야.”
“…….”
“그리고 저자는…… 내 동생이야.”
“……뭐요?”
“동생?”
열하와 별호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옛날에 잃어버린 내 동생 같아.”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게 믿으라고 하는 소리요? 저자는 양반을 죽인 용의자요.”
“원래 죽어도 싼 놈들이라며!”
“그래도 저자는 위험한 놈이오. 의적 놀이를 하고 싶은 놈이거나…… 양반에게 원한이 있는 자겠지.”
“아무튼! 우리를 구해 준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하지는 못할망정, 잡아가겠다고?”
“큼…….”
“내가 다쳤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은신처를 보여 준 거잖아. 심성이 착한 아이야.”
열하는 내 말에 주춤했다. 그가 훤이에게 말을 쏘아붙이긴 했으나 열하 또한 잘 알 것이다.
우리는 정말 훤이가 아니었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아찔한 순간에 훤이가 우리를 구했다.
열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양보하고 또 양보해서…… 모른 체해 줄 수는 있겠지. 더 이상의 사건이 나오지 않는다면야.”
“……더 나올 거라는 이야기야?”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소. 한 명은 아직 살아 있다고. 난 그가 죽는다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말할 수밖에 없소.”
열하의 마음이 돌아서기 전에 답을 받아 놓아야 했다. 나는 열하를 보며 눈을 맞췄다.
“알겠어. 내가 막을게. 내가 잘 얘기해 볼게. 그럼…… 신고는 안 할 거지?”
열하는 머리를 싸쥐었다가 내 어깨를 꼭 잡았다.
“이봐, 대표 누이.”
“응, 열하야.”
“하나 명심하시오. 저자가 우리의 목숨을 구한 것은 내가 입을 다무는 것으로 갚은 것이오.”
“그래. 잘 알겠어. 고마워, 열하야.”
“그러니 이번 일 이후에 저자는 우리의 눈에 보이면 안 될 것이오.”
“뭐?”
“나는 범법자와 함께 일을 할 생각은 없소. 그가 대표 누이의 동생이라고 해도.”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건 지킬 수 없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훤이와 잘못 지어진 매듭을 빨리 풀어야 했다.
* * *
열하와 별호에게 먼저 내려가 있으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를 걱정하며 함께 남아 있겠다고 했으나 나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열하는 내 모습에 별호를 강제로 끌고 산을 먼저 내려갔다. 혼자 남은 나는 바위에 앉아 훤이를 기다렸다.
‘왕족만 쓰는 이름…… 훤.’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열하의 말과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종합해 보면…… 훤이가 어떤 상황인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때 훤이가 산에서 약초를 캐서 내려왔다. 그는 어딘가 다친 듯 보였다. 나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라. 괜찮다.”
“얼굴이…… 왜……?”
“원한이 생길 일은 싹을 끊어야 하는 법. 처리하지 못한 상대를 처리하고 왔을 뿐이다.”
훤이는 화살로 치명상을 입혔던 호랑이를 완전히 죽인 듯했다.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내 앞까지 왔다. 훤이는 발목을 살피며 조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까지는 조심하도록. 발목을 다치면 고생하니.”
“역시, 넌 친절하구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도록.”
“여기 있지 말고, 너도 나랑 같이 가자.”
훤이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자는 거지?”
“나, 조선에서 가장 유명해질 거야. 돈도 많이 벌 거고, 계획도 다 있어.”
“유명해진다고?”
“그래. 넌 재능이 있어. 난 그걸 알아볼 수 있고 널 키울 능력이 있고.”
“싫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나, 장사나 그런 것 따위에…… 난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그리고 난 해야 할 일이 있다.”
훤이는 내 말을 무시한 채 내 발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는 마른 천으로 내 발목을 압박해서 감기 시작했다. 욱신거리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훤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난 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네 일을 내가 도와줄게.”
“뭐?”
훤이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어이가 없었는지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 범을 봤다고 발목을 다친 네가…… 날 돕겠다고?”
“정말 눈앞에 있는 적 몇 명만 해치운다고…… 네 일이 해결될 것 같아?”
“……방금…… 뭐라고 지껄였지?”
그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채 입을 뗐다.
“알잖아? 네 원한을 뿌리 뽑고 싶으면…… 그런 암살로만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지. 네가 나와 계약하고 나서 내가 네 부모님한테 호출당했던 것처럼…….”
“뭐라고?”
“아무튼, 내가 네 일을 도와줄게. 너도 내 일을 같이하자.”
훤이는 붕대를 매듭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싫다. 난 누구와도 손을 잡을 생각 없어. 그리고…… 내가 어찌 널 믿지?”
순간 짧은 머리의 훤이 모습이 겹쳐졌다. 흰 티셔츠를 입고 열심히 춤을 추던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빛이 났다.
“훤아,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누나, 저는 누나 믿어요.”
“정말?”
“내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게, 집안의 문제아 취급을 당하지 않도록 해 준 게 누나잖아요.”
“훤아.”
“누나는 내 앞길을 막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누나가 내 앞길을 열어 준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훤이는 웃었던가? 혹은 눈시울을 붉혔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팔을 뻗어 훤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네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해 줄 거야.”
“…….”
“내가 널, 믿으니까. 훤아.”
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훤이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