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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90화 (190/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90 - 병법의 대가

유금필에게서 아무 조언도 못 받은 나는 시무룩해졌다.

‘유금필이 몇 년만 더 버텨준다면 정말 든든할 텐데.’

그런데 유금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느 방향으로 군사를 진격시킬지 어떤 전술을 쓸지는 지금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윤비 마마께 드릴 조언이 있긴 합니다.”

“무엇입니까?”

유금필이 뭔가 귀한 조언을 건넬 분위기라서 나는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일전에 일리천 전투가 일어나기 전 폐하께서 삼한 땅의 병법 대가를 3명 뽑았는데 기억나십니까?”

“폐하께서는 대장군, 그리고 궁예와 견훤의 군재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때 왕건이 했던 말은 귀한 사료적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여태 외워두고 있었다.

“저는 폐하의 그 말씀에 사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궁예, 견훤 그리고 저보다 더 뛰어난 병법의 대가가 삼한 땅에 있습니다.”

유금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게 누구입니까?”

“바로 폐하이십니다.”

유금필은 왕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허허허. 이거 참.”

그 말을 들은 왕건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약간 당혹스러워졌다. 그런데 유금필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건 폐하께 아첨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 제가 곧 죽을 텐데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합니다. 일리천에서 폐하께서는 10만 대군을 모아서 백제를 멸망시키셨습니다. 전국의 호족들을 움직여 일리천에 오게 만들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일리천에서 엄청난 대군이 싸웠음에도 사상자의 수는 적은 편이었습니다. 정윤비 마마. 훗날 거란과 싸우게 될 때 반드시 일리천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유금필의 말이 상당히 심오했지만 나는 뭔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세를 살펴보면 거란족의 숫자가 지금은 많은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 연운 16주의 식량을 바탕으로 그들의 호구가 크게 늘 것입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중원에서 나서서 거란의 힘을 분산시키고, 여진의 무리들과 진정 힘을 합칠 수 있다면 거란을 꺾을 수 있습니다. 여진의 기마술은 어떤 부분에서는 거란보다 뛰어납니다. 일리천에서 폐하께서 어떻게든 여러 호족들을 전장에 나오게 만든 것처럼 여진족들을 끌어들이십시오. 폐하께서 호족들의 마음을 조종했던 것처럼 여진족들의 마음을 조종해야 합니다. 유학자들처럼 단순히 덕을 베풀라는 말이 아닙니다. 덕을 베푸는 것은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합니다. 그 외에 겁을 주든 속이든 해서 어떻게든 우리 뜻대로 그들을 움직이는 것이 병법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중하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어떤 포진을 펼칠지는 그다음 순위입니다. 또한 박술희나 박수경, 황보금산 등 싸움에 능한 장수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포진 같은 것은 그들의 재주를 빌리십시오.”

유금필의 말을 들은 나는 용기가 솟아올랐다.

‘따지고 보면 내가 준비하고 있는 여러 일들이 유금필이 말하는 병법의 이치에 부합한다. 유금필이 내가 추진하고 있는 일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용기를 주려고 이리 말하는 건가? 어쨌거나 힘이 나긴 하네.’

나는 두 손을 모아 유금필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던 유금필은 왕무를 보고도 말했다.

“정윤 전하께서도 정윤비 마마가 그 뜻을 펼칠 수 있게 잘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왕무가 정중히 유금필에게 군례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 유금필은 왕건을 바라보았다. 왕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말했다.

“나와 대장군이 긴히 할 말이 있다.”

나와 왕무는 고개를 숙이며 유금필의 처소에서 나왔다. 밖에 나오니 동양원 부인이 초췌한 안색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부인.”

나는 동양원 부인의 곁에서 그 손을 꽉 잡아주었다. 그리고 왕무와 함께 왕건을 기다렸다. 할 말이 많았는지 왕건은 한참 있다가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이라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만 그러면 오히려 이 저택의 사람들이 힘들 것이니. 가자.”

왕건은 침통한 표정으로 나와 왕무에게 말했다. 확실히 왕이든 정윤이든 정윤비이든 유금필의 저택에 오래 머물면 폐가 될 것이다.

저택 사람들이 왕족들을 대접하느라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동양원 부인과 유금필의 가족들을 위로하고 떠날 채비를 했다.

다만 왕건은 자기가 가자고 해놓고도 꾸물거렸다. 늦장을 부리며 일행은 유금필의 저택에서 나섰다.

그리고 느릿느릿 궁을 향해 나아갈 때였다.

유금필의 저택 안에서 엄청난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택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는 것 같았다.

“앗. 하아.”

그 소리를 들은 왕건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유금필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왕건뿐만 아니라 고려의 수많은 호족들이 애도를 표했다.

장례가 끝나고 나선 임희가 나주원에 찾아왔다.

“대장군이 오랫동안 고려를 지켜주기를 바랐는데 일이 이리됐구나. 허전하구나. 허허, 이거 참. 나도 어찌 될지?”

임희가 자신의 흰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버님! 무슨 말씀을!”

나는 임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임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벌써 941년이다. 이젠 왕건의 수명도 2년 정도 남았을 뿐이야. 그리고 아버님도 그렇고 나도 왕무도…….’

가깝게 지내던 사람의 죽음을 보니 나는 우울해졌다.

‘한동안은 동양원에 자주 들러야겠어. 동양원 부인을 위로해야지.’

내가 기겁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임희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따지고 보면 연우 네가 유긍달을 제압해놔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기실 나는 대장군이 은근히 우리 편을 들고 있기에 나중에 반정윤파의 무리들도 능히 제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장군이 이리 세상을 떠나다니. 유긍달이 지금 연금 상태라 조정이 조용하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었다면…….”

임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확실히 내가 그날 정주원에서 유긍달을 서둘러 처리한 것은 유금필의 수명까지 고려해서 일을 벌인 것이다.

임희가 반정윤파에 대해서 거론하니 나도 그쪽으로 관심이 쏠렸다.

‘이제는 슬슬 왕무가 즉위한 이후 그들을 어찌 다룰지도 생각을 해놔야겠어.’

* * *

유금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고려 조정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다. 어쨌든 전쟁이 끝났기에 근 몇 년간 고려의 민생이 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왕건은 내 부탁대로 물밑에서 전쟁을 준비하며 일을 하나씩 처리하고 있었다. 나는 한림원에서 일을 하는 척하며 이 일들의 진행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동해의 호족들이 폐하께서 명하신 배들을 모두 건조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쪽에서 묻고 있습니다.”

김악이 머리를 긁적이며 왕건에게 물었다.

“다 향후 쓸 일이 있으니 잘 관리하라고 해라. 언제든 때가 되면 출항할 수 있게 하고. 허허허.”

왕건이 웃으며 말했다.

“대체 어디에 쓰실 건지 소신에게만 좀 이야기해 주십시오. 대내학사로서 여러 기밀을 알아도 저는 한 번도 유출한 적이 없습니다.”

김악이 얼마나 궁금한지 왕건에게 말했다.

“나도 그걸 어찌 쓸지 보고 죽고 싶다.”

왕건은 무심코 김악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림원 한쪽에서 그 말을 들은 나는 살짝 가슴이 아팠다.

‘왕건에게 내가 그 배들을 어떻게 사용할지 다 이야기하긴 했어. 그러니 만들어주는 건데. 하지만 왕건은 그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겠지. 왕건도 그걸 느끼고 있구나.’

김악은 그 중얼거림을 잘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어디에 쓰신다고요?”

“가서 북방에 식량을 비축하는 일은 어찌 되어 가는지 장부나 살펴! 아 그리고 중원 진나라에 보낼 사신인 왕신일에게 학사 하나를 딸려 보내야겠다. 적절한 사람을 뽑아봐.”

왕건은 재빨리 화제를 다른 쪽으로 전환했다.

“우리가 사신을 계속 보낸다고 해도 석경당이 군사를 움직여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또 사신을 보내실 것입니까?”

김악이 묻자 왕건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 고려로서는 그쪽에서 움직여 줘야 뭘 할 수 있다. 당장은 움직여 줄 것 같지 않지만 중원의 사정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야지. 그냥 군사 쪽 일은 묻지 않더라도 한번 보내긴 해야지.”

“알겠습니다. 적절한 사람을 하나 뽑겠습니다.”

김악은 왕건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 * *

나는 한림원 업무를 마치고 나주원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초라한 나주원의 건물들을 바라보니 나는 헛웃음이 났다.

시녀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벽에 금이 간 곳을 석회로 메우고 있었다.

“끝내 이 허름한 건물들을 못 바꿨네. 이젠 영영 못 바꾸겠구나.”

처음 봤을 때부터 낡은 건물들을 손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유긍달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증거를 모으기 위해 몇 년간 손을 못 봤다.

그 이후에는 내가 임신을 하고 어수선해서 못 바꿨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건물들이 그대로였다.

이제는 건물들을 바꾸려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왕건의 수명이 다해가니 나주원 공사를 해봤자 의미가 없다. 짓는 도중에 나와 왕무는 왕건의 처소를 물려받아 쓸 거고. 나주 왕후가 태후가 되면 처소를 옮겨야 하고. 그리고 초라하긴 해도 나주원이 편하니.’

나는 상념에 잠긴 채 나주원 경내를 거닐었다. 경란이를 비롯한 시녀들이 그런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한쪽에 소나무 숲이 있는 것을 눈치챘다. 원래 고려 왕궁은 야트막한 산비탈을 깎아서 그 위에 지었다.

그래서 궁 양편에 작은 숲이 남아 있었다.

“내가 잠시 소나무 숲에 들어가 생각을 할 일이 있으니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거라.”

나는 시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그러나.”

경란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숲이지 나주원 바로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요사이 정세가 심상치 않아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알겠습니다.”

경란이가 결국 내 말에 굴복했다.

나는 홀로 소나무 숲에 들어섰다.

‘나무 향기가 좋긴 좋네. 원래 이 개성의 소나무는 유명했으니까.’

숲에 들어온 나는 주변을 힐끔 둘러보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나 살폈다. 다행히 나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소나무 한 그루 아래 앉은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나는 대한민국에 온 김선우였다! 원래는 남자였고 앞으로 천년이 넘는 역사가 어찌 흘러갈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임연우고.”

이 말을 입 밖에 꺼낸 순간 나는 청량한 소나무향을 다시 느꼈다.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진짜 숲속에 들어와서 홀로 이야기하니 마음이 풀리는구나. 옛 이야기가 사실이었어. 소나무 숲이 효과가 좋네!’

유금필의 죽음 이후 나는 싱숭생숭했는데 오늘만큼은 속이 다 후련했다. 용기를 내서 들어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앉아 있던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숲 밖에서 경란이도 기다리고 있었고 마음도 많이 풀렸다.

“금방 나오셨군요.”

내 얼굴을 보고 경란이가 반갑게 외쳤다. 나는 시녀들을 거느리고 내 처소 쪽으로 걸어가는데 이미 왕무가 돌아와 있었다.

왕무는 정원에 설치된 지동의를 유심히 살피며 동북쪽에서 떨어지는 구슬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정윤 전하!”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반갑게 왕무에게 달려갔다. 왕무 역시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나를 힘껏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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