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91 - 거란 사신
왕건은 살이 확 빠졌다. 매일 한림원에서 왕건을 보는 나도 눈치챌 정도였다. 살이 서서히 조금씩 빠지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훅 빠졌다.
“이것 참 고창 전투 직후에는 살이 너무 피둥피둥 쪄서 고민이었다. 요새는 그것을 근심할 필요가 없구나. 시간이 지나면 살이 다 빠지는데 괜히 걱정했다. 허허허.”
왕건은 한림원에 나와서 짐짓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한림원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왕건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폐하! 식사를 거르지 마십시오.”
왕건의 심복인 김악이 안타까운 듯 외쳤다.
“내가 정말 최응에게 잘못한 일이 많다.”
왕건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봉경의 이야기는 왜 하십니까?”
김악이 묻자 왕건이 씁쓸하게 말했다.
“최응의 몸이 안 좋을 때 내가 억지로 밥을 먹으라고 권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죽을 때가 다가오면 입맛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밥이 목에 안 넘어가는데, 그것도 모르고 내가 최응에게 많이 먹으라고만 했으니. 최응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러니까 김악이 너도 나더러 괜히 밥 먹으란 소리 좀 하지 말거라. 허허허.”
“폐하!”
죽음을 거론하는 왕건의 말에 한림원의 학사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키더니 외쳤다. 나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됐다. 됐어. 알겠다. 앉아서 일이나 봐.”
왕건은 그런 학사들의 모습을 보고 귀찮은 듯 소매를 휘저었다.
‘이제 왕건에게 남은 시간은 1년여 정도. 정말 역사서를 읽고 와서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 막상 곁에서 지켜보니 괴롭구나. 그리고 왕건의 살이 빠진 것을 보면 다른 대호족들도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겠지. 슬슬 철저히 준비를 해야 해. 하필 왕건이 죽어갈 무렵에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니.’
나는 왕건을 근심스레 바라보다가 한림원 업무를 마쳤다. 왕건은 이제 걷기도 힘든지 시위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림원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왕건의 부축하는 저 시위들은 어느 쪽에 붙을까? 왕건의 측근에는 우리도 그렇고 대호족들 그 누구도 사람을 못 심었다. 왕건의 건강이 극히 안 좋은데 왕건 주변의 사람들이 무슨 일을 꾸미기라도 하면?’
나도 정치를 오래 해서 그런지 그런 의심부터 들었다. 나주원에 돌아가서 왕무와 이것도 의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 *
나주원에 돌아오니 왕무는 군영에서 이미 돌아와 있었다. 왕무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어전에서 폐하를 보니 살이 너무 빠지셨어.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내 주변의 장수들은 하나같이 나더러 이젠 군영에 나오기보다는 폐하를 보살피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해서 이리 일찍 돌아왔어.”
나를 보자마자 왕무가 그리 말했다. 왕무 주변의 장수들도 정세가 엄중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궁을 철통같이 우리가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시위 문제에 대해 입을 열려고 하는데 왕무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박술희 장군을 군영에서 불러서 밀담도 나누시고 처소의 병력들도 박술희 장군의 직계 군사들로 바꾸셨어. 아무래도 폐하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왕무의 말을 들으니 나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맞아. 왕건이 죽기 전에는 박술희를 불러 경호를 맡기지. 박술희는 왕건도 믿을 수 있고 우리도 믿는 사람이니. 시위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하긴 왕건이 왕무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결의는 확실하니.’
나는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이 힘이 빠졌다.
그런데 나에게 이런 말, 저런 말을 두서없이 하던 왕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왕무가 우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왕무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나는 눈물을 흘리는 왕무의 어깨를 잡고 내 품속에 안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왕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
왕건의 죽음이 가까워지며 고려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중원의 정세도 심상치 않았다. 왕건이 중원 진나라에 보냈던 사신 왕신일이 귀국해서 급한 소식을 전했다.
“진나라의 석경당이 죽고 그 조카 석중귀가 황제가 됐습니다. 그런데 석중귀가 즉위하자마자 행하는 일이 심상치 않습니다. 여러 나라의 사신들 앞에서 거란 사신을 노골적으로 꾸짖고 더 이상 거란에 조공하지 않겠다고 외쳤습니다. 지금 석중귀는 거란에 바치던 조공을 군사비로 돌려 북쪽 여러 성의 방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이러면 거란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거란과 진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야 미래 역사를 알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충격은 엄청났다. 석경당이 죽자마자 진나라가 외교 노선을 이리 바꿀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시위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림원에 나온 왕건 역시 침통한 표정이었다. 요사이 왕건은 어전보다 한림원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전에 앉아 여러 대호족들과 기싸움을 할 기력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왕건은 한림원에서 웬만한 일을 보고 있었다.
“내 몸이 이리돼서 꼼짝할 수도 없는데 하필 일이 이리 흘러가는구나. 3~4년만 더 일찍 일이 이리 풀렸다면 내가 석중귀에게 호응했을 것을. 우리 고려 군사들이 지금 진군해야 하는데. 그래도 학사들은 북방의 도로와 군사에 대한 자료를 모아 와라. 내가 한번 봐야겠다.”
한림원에 나온 왕건은 연신 한숨을 푹푹 쉬었다.
왕건의 건강 때문에 지금 고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고려가 대군을 일으켜 출진하면 필시 도중에 왕건이 병사할 것이 뻔했다.
출정 중에 국왕이 죽으면 군사들의 사기도 떨어지고 정치적으로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 그러니 도무지 군사를 모을 수 없었다.
왕건은 이것을 알면서도 미련이 남는지 학사들에게 자료를 모아오라고 하는 것이다. 자료라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학사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데 전령 하나가 달려와서 외쳤다.
“안북부의 염상, 서경의 왕식렴이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급보입니다.”
“북방에 무슨 일이? 어서 가져와라.”
왕건이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전령이 염상과 왕식렴의 서신을 바쳤다. 그것을 읽고 왕건은 흥분한 기색이었다.
“거란의 야율덕광 그 녀석이 다급하긴 다급한 것 같구나. 덕광이 그 녀석이 우리 고려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석중귀가 군사를 일으키니 덕광이는 우리 고려가 조용히 있어 주길 바라는 거다. 간교한 것!”
왕건의 말을 들은 나와 학사들은 깜짝 놀랐다.
“아무렴 거란이 우리에게 조공할 리 있겠습니까?”
김악이 놀라서 외치는데 왕건이 서신을 흔들며 외쳤다.
“이 서신을 봐라. 낙타 50필에 예물을 잔뜩 실어 온 거란 사신이 나를 알현하고 싶어 한다고 써 있어! 염상, 왕식렴 등이 그리 써보냈다.”
놀란 김악이 왕건에게 서신을 건네받았다.
“정말 거란이 낙타를 바치러 왔군요. 그래도 야율덕광은 우리에게 뇌물을 줘서 달랜다고 생각하지 조공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텐데.”
“아니 그게 조공이 아니면 뭐야?”
왕건은 끝까지 고려가 조공을 받았다고 우겼다.
“어쨌든 그럼 그 조공을 받으실 것입니까? 그냥 만나주지 않고 국경에서 물리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기가 죽은 김악이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왜 물리쳐? 개경에 오게 해야지.”
왕건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럼 거란의 뇌물 아니 조공을 받으실 요량이십니까?”
김악이 놀라서 물었다.
“받긴 뭘 받아! 거란의 무리들을 개경까지 유인해서 낙타는 죽이고 사신들은 다 유배 보내겠다. 유배지로 쓸 적당한 섬이나 찾아와. 멀고 살기 힘든 곳으로.”
왕건이 학사들을 둘러보며 그런 명을 내렸다.
“아니. 폐하! 그래도 사신을 상대로 그럴 수 있습니까? 아예 국경에서 물리치시는 것도 아니고.”
김악이 새파랗게 질린 기색으로 말했다.
“폐하. 그것은 예법에 어긋납니다. 거기에 이러면 앞으로 우리 고려가 거란에 사신을 보내야 할 때 누가 갈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던 한림원령 최언위마저 나서서 말했다.
‘왕건이 만부교 사건을 일으키려 하는군. 흐음. 확실히 거란 사신들을 저리 처리한 건 폭거이긴 했어.’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왕건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 고려가 그리 나와도 야율덕광이 뭘 할 수 있겠느냐? 석중귀 쪽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니 우리 쪽을 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거란 사신이 오면 통역을 위해 발해의 매국노들도 올 거 아니야? 다 유배를 보내야지! 원래 꼴 보기 싫은 녀석들이었는데. 한 번만이라도 화풀이를 해야겠다.”
발해인들이라고 해서 다 거란에 맞서 싸운 것은 아니었고, 거란에 부역하는 발해인들도 많았다. 고려와 거란이 사신을 교환할 때는 거란에 항복한 발해인들이 통역을 맡았다.
“그, 그래도…….”
김악은 차마 말을 못 잇고 어물거렸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도 않은 왕건이 이리 강경하게 나오니 차마 그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숙였다.
‘이 만부교 사건은 막아야 한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왕건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 문제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 표정을 살핀 왕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실에서 차나 한잔하자.”
밀담을 나누고 싶어 하는 내 의중을 왕건이 읽은 것 같았다. 한림원 한쪽에 마련된 다실에 들어간 나는 재빨리 왕건에게 말했다.
“이번만큼은 거란 사신을 후대해서 그들이 마음을 놓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북벌에 나섰을 때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나는 백두산이 폭발하는 946년에 군사를 일으킬 작정이었다.
‘946년 겨울이 중요하다. 그때 백두산이 터진다. 석중귀가 끝내 버티다가 거란에게 패한 것도 그때고. 석중귀도 그동안 축적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4년가량은 시간을 끌며 거란과 대결하니. 그전까지 거란을 안심시키고 고려 쪽 국경을 비워놓게 해야 해.’
내 말을 들은 왕건은 고심하는 기색이었다.
“연우 너는 무와 함께 필히 북벌을 할 것이냐? 만약 내가 연우 네 말만 믿고 거란 사신을 후대했는데 너희들이 북벌을 안 하면 역사에 내가 어찌 남을지? 발해 형제들을 외면한 사람으로 남지 않겠느냐?”
왕건이 걱정스레 물었다.
“이미 참요를 퍼뜨린 이상 북벌은 무조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벌을 안 하면 저와 정윤 전하가 오히려 곤란해집니다. 북벌은 반드시 합니다. 거기에 폐하 앞에서 맹세까지 했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참요를 퍼뜨리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나에게 퇴로가 없었다.
사실 내가 굳이 참요를 퍼뜨린 것은 스스로 배수진을 치는 의미도 있었다.
“연우 너는 확신이 있어 보이는구나. 무조건 가는 거냐?”
“그렇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외쳤다.
“그렇다면 나도 연우 너의 계책을 거들 수밖에 없겠구나.”
왕건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실에서 나온 왕건은 한림원 학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유배지로 쓸 섬을 찾는다는 명을 취소한다. 그냥 적당히 거란 사신을 접대할 예법에 대해 준비하도록 하라. 어느 정도 야율덕광이 마음을 놓게 말이야. 그냥 대접은 해주고 돌려보내야겠다.”
“명을 받듭니다.”
왕건의 말을 들은 한림원 학사들은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김악은 재빨리 나에게 다가오더니 예를 갖추며 말했다.
“역시 정윤비 마마께서 한림원에 돌아오시니 일이 순리대로 풀리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