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85 - 고통
왕무의 의지를 확인하고 내가 전력을 다해 북벌을 돕겠다고 결심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런 각오를 한 만큼 내가 한 일은…….
‘없어. 몸이 무거워서.’
나는 부풀어 오른 내 배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방문한 의원도 진지한 표정으로 될 수 있으면 나주원에서 쉬라고 말했다.
게다가 지금과 같은 정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실패하든 말든 지금은 왕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둬야지. 괜히 중간에 끼어들어봤자 왕건의 핀잔이나 들어. 왕건은 이번 일이 성공할 거라고 믿고 있으니.’
나는 왕건의 북벌 시도가 실패한 이후에 움직일 작정이었다.
‘그때쯤이면 출산도 끝날 거고 내가 움직일 공간이 생겨. 다만 왕건의 생전에는 도무지 북벌을 감행하기 어렵다.’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왕건이 살아 있을 때 왕건과 함께 북벌에 나서는 것이 고려 입장에선 가장 좋았다.
‘그런데 중원에서 석중귀가 즉위하고 거란과 전쟁을 일으키는 때가 왕건이 죽을 무렵이니. 그러고 보니 왕건의 수명도 얼마 안 남았구나.’
그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막막함을 느꼈다.
‘왕건은 수명이 다해서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거라 내가 막을 방법도 없고. 그런데 정말 왕건이 세상을 떠난다고?’
미래에서 와서 왕건이 죽는 연도까지 알고 있는 나였는데, 막상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아냐, 아냐.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뱃속의 아기에게 좋지 않아! 밝은 생각을 하자!’
나는 고개를 휘저으며 마음을 달랬다. 그때 시녀 경란이가 문밖에서 외쳤다.
“정윤 전하께서 발해 태자와 함께 오셨습니다.”
“그래. 들어와서 나를 좀 부축해라.”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진작 왕무에게 대광현과 함께 나주원에 한번 오라고 말했다. 북벌 논의가 이어지는 만큼 대광현을 한번 만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내 출산이 다가오고 있었다. 출산 직전이나 출산 이후 몇 달간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대광현과 만나려면 지금 한번 만나야 했다. 그래서 왕무에게 대광현과 함께 오라고 당부를 했다.
“마마. 조심하십시오.”
경란이를 비롯한 시녀들이 나를 좌우에서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리고 다실로 나아가니 과연 대광현이 와 있었다.
대광현은 나를 보자마자 정중히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 우리 발해 사람들이 고려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또한 거란을 치는 일 역시 이리 지원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광현은 크게 흥분한 기색이었다. 왕건은 망명해 온 대광현과 발해유민들을 잘 돌봐주긴 했다. 다만 지난 몇 년간 거란을 치는 일은 고려 조정에서 논의되지 않았다.
왕건에게 군사를 빌려 거란을 치고 싶어 하는 대광현은 그동안 많이 초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거란의 조사온이 죽었다는 첩보가 들리고 왕건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니 대광현은 크게 기쁠 것이다.
이미 몇 차례 왕건이 대광현을 불러 북벌에 관해 상의를 했다.
“과찬이십니다.”
대광현의 인사를 듣고 나는 조심스레 답례했다.
‘내가 초반에 발해 유민들의 정착을 도운 것은 맞아. 다만 북벌에 대해선 딱히 한 게 없는데. 대광현이 이리 감사인사를 하네. 나더러 앞으로 열심히 도와달라고 압박을 넣으려고 감사인사를 한 건가? 고려 조정 내에서 북벌을 추진하려면 내 힘이 필요하니.’
이 시대에 떨어지고 나서 의심이 많아진 나는 그런 생각이 덜컥 들었다. 대광현이 그냥 인사치레로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 와중에 나와 대광현이 인사를 끝내자마자 왕무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는 길에 태자와 함께 북방에서 어떻게 군사를 움직일지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계속 해야겠습니다.”
그러더니 왕무는 대광현과 딱딱한 군사실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참. 왕무는 언제까지 이럴 건지.’
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왕무의 심리를 읽고 있었다.
‘대광현과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싫다는 거 아냐? 나는 왕무의 아이까지 가졌는데 이러다니.’
약간은 어린애 같은 왕무의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함을 느꼈다.
‘뱃속의 아기도 왕무를 닮았을까?’
그렇게 한참 다실에 앉아 있던 우리는 좀 갑갑해져서 잠시 정원에 나가 산책을 하기로 했다. 나도 약간의 운동을 할 필요가 있었다.
왕무는 또 나와 대광현 사이에 끼어들더니 대광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에게 접근을 못 하게 하려는 것이다.
‘헤헤헤. 왕무 속이 이젠 다 보여. 뭐 어쨌든 왕무와 대광현이 저렇게 절친해 보일수록 좋아. 우리 부부가 북벌에 적극적인 것처럼 보일 테니까. 오늘 대광현을 부른 것도 구체적 용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대외적으로 친분을 과시하려고 부른 거지.’
나는 약간 빠른 걸음으로 어깨동무를 한 채 걸어가는 왕무와 대광현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나를 부축하던 시녀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란 기색이었다. 그리고 경란이가 내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했다.
“정윤비 마마! 어찌 이런 일이! 정윤 전하께서 마마를 내버려 두시고 발해 태자와 함께 가십니다.”
경란이는 무슨 난리라도 난 것처럼 외쳤다.
“그건…….”
나는 나와 대광현이 나란히 걷는 것을 막기 위해 왕무가 저러는 것이라 말해주려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왕무의 속내를 함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릴 수야 없지.’
그래서 나는 말을 바꿨다.
“북벌 대업을 논의하기 위해 저러시는 거지.”
“그런데 발해 태자 저하께서는 너무 잘생기셨습니다. 그런데 저리 정윤 전하와 친밀하게 지내시니…….”
경란이가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나는 경란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아 웃으며 대답해 줬다.
“발해 태자 저하가 그냥 귀공자처럼 생겼지만 보통 분이 아니시다. 북방 땅에서 수만 명의 유민들을 인솔해서 고려까지 오실 정도니. 통솔력이나 군사적 능력은 검증된 분이다. 생긴 걸로 판단하지 말렴. 정윤 전하를 보좌할 만한 능력이 충분하신 분이야.”
나는 경란이에게 찬찬히 일러주었다. 군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경란이가 외모만 보고 대광현이 믿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휴우. 알겠습니다. 마마.”
경란이는 한숨을 내쉬며 그리 대답했다.
* * *
대광현과의 회동이 끝난 이후 나는 외부 손님은 만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정말 출산이 임박한 것이다.
‘10개월이 이리 짧았어? 뭐 제대로 태교를 한 것도 없는데. 태교를 하기에는 바깥 정세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갔어. 태교를 하려면 왕건, 왕식렴, 황보제공 같은 사람들을 안 봐야 하는데. 별에 맞아 죽은 사람 이야기도 듣지 말고.’
그사이 문밖에서 상산부인이 들어섰다. 내 첫 출산을 앞두고 상산부인이 나를 돌보기 위해 몇 달간 나주원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출산도 그냥 순식간에 다 지나가는 일이야. 별 거 아니야.”
상산부인이 내 곁에 앉아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나주 왕후도 그렇고 출산경험이 있는 어른들은 다 똑같이 말을 하니. 하, 그래도 불안하다. 같이 불안해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오지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딱 한 번 김장명과 무사히 만났다는 전갈을 받은 뒤부터는 연락이 없으니. 오지수가 나주원에 있었다면 큰 힘이 됐을 텐데.’
나는 오지수가 보고 싶어졌다. 내가 유긍달을 실각시키며 오지수 건을 무마시키긴 했다. 그래도 오지수는 왕건의 명도 없이 멋대로 혼인을 한 죄인이었다.
왕건이 개경에 오지 말라고 명도 내렸다. 그래서 눈치가 보여서 오지수와 연락도 주고받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오지수가 있을 때 임신을 했어야 했어. 조금만 빨리 왕무에 대한 내 마음을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7년의 시간을 낭비했으니.’
나는 새삼 내가 허비했던 시간이 아쉬웠다. 내가 대체 왜 그랬는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나마 나주 왕후나 상산부인의 보살핌은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어른들이 옆에 계시니 든든하긴 하네.’
나는 상산부인의 손을 꽉 쥐며 마음을 달랬다.
‘출산 당일이 되면……내가 어찌해야 할지.’
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 *
그리고 시간은 꾸준히 흘러갔다. 마침내 나는 산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 평생 이런 통증을 느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산통이 시작되니 나는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없었다.
너무 아파서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현대 의학의 힘을 빌릴 수도 없고.’
나를 돌봐주기 위해 온 산파가 걱정스레 말했다.
“고통이 그리 심하십니까?”
“응.”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산파가 침중한 표정으로 시녀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나를 돌봤다.
나를 돌보기 위해 나주 왕후와 상산 부인도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 두 사람도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초조해졌다.
‘과연 나와 아기가 어찌 될지? 역시 왕무와는 입맞춤만으로 만족했어야 했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7년이나 시간을 끈 게 후회됐는데 지금은 왕무와 끝까지 간 것이 후회됐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통증도 점점 극심해졌다. 나는 반쯤 까무러쳤다.
“아이고. 마마!”
산파가 근심스럽게 외쳤다.
“으으윽.”
나는 신음성을 흘리며 반쯤 의식을 잃었다. 주변에서 시녀들이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다 들렸는데 고통 때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이 며칠은 흐른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 몸이 홀가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앵
그리고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누워 있는데 산파가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정윤비 마마께서 순산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크게 노했다.
‘순산? 이게 순산이라고!’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당장 벌떡 일어나서 산파의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 엄청 아팠는데 순산이라는 말이 나오니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으으윽.”
나는 미약한 신음성을 흘렸다. 산파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말을 할 기운도 없었다.
그런데 한쪽에 있던 나주 왕후와 상산 부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순산이에요!”
나주 왕후가 먼저 외쳤다.
“연우가 워낙 아파해서 걱정했는데. 순산입니다.”
상산부인이 그리 맞장구를 쳤다.
“으으윽.”
나는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산파가 웃으면서 강보에 싸인 아기를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건강한 아드님이 나오셨습니다. 왕태손 저하께서…….”
산파가 감개무량해하며 눈물까지 닦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아기를 조심스레 내 곁에 눕혔다. 나는 아기를 보다가 퍼뜩 걱정이 들었다.
‘아기 이름은 뭐로 짓지? 왕무는 이름이 무(武)라서 고려 사람들이 고생이 많았어. 왕의 이름인 무(武)란 글자를 일상생활에서 쓸 수 없어서. 우리 아기 이름은 어떻게 적절하게 짓지? 진작 생각을 해놨어야 했는데. 최언위나 학사들과 진지한 논의를 해봐야 해. 아니지. 이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닌데.’
아기를 보니 나는 기쁘면서도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어쨌든 자야겠다. 한숨 자고 생각해야지.’
아기를 보며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