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84 - 일장춘몽
“이것 참. 별일이 다 있어. 사람이 별에 맞아 죽다니. 어쨌거나 조사온이 죽은 것은 확실한가?”
왕건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확실합니다. 대대적으로 장례까지 치렀다고 합니다. 거란 군사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습니다.”
서경유수 왕식렴이 왕건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원래 왕식렴은 서경에 계속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란의 정세가 심상치 않자 왕건이 큰일을 논의하기 위해 왕식렴을 개경으로 부른 것이다.
왕식렴뿐만 아니라 고려의 무장들은 거의 왕건의 부름을 받고 모였다. 본격적인 북벌 논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왕식렴을 흘겨보았다.
‘왕식렴만 아니면 나도 그냥 나주원에서 쉬었을 텐데. 하지만 왕식렴을 견제해야 하니.’
나는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른 내 배를 쓰다듬었다. 말라 스님의 말을 듣고 거란에 세작을 보내고 정보를 얻는 사이 몇 개월이 훌쩍 지났다.
‘뱃속의 아가는 어떤 상태일까? 내, 내가 엄마가 된다고? 아빠도 아니고?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배가 불러와서 아가의 존재를 느끼게 되자 나는 새삼 혼란스러워졌다. 왕무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사랑 때문에 내가 임연우임을 당당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태어날 아가를 떠올리면 나는 마음이 갑갑했다.
‘무엇보다 내 아이에게도 내 신세내력을 숨겨야 하나? 아기한테 엄마가 전생에 남자였다고 이야기하면 혼란이 크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나는 왠지 모르게 고독해졌다. 최치원이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에잇 이런 생각은 나중에 하자. 우선은 왕식렴을 견제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해.’
내가 유긍달을 날려버린 이후 반정윤파는 우선 와해됐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왕식렴과 황보제공을 중심으로 세력을 수습하고 있었다.
왕건이 거란을 칠 마음을 먹고 북방에 군사들을 집중시키면 자연스레 서경에 주둔한 왕식렴의 세력이 커지게 되어 있었다.
서경은 오늘날의 평양인데 북방에서 무슨 일을 꾸미려면 이곳에 힘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실제 역사를 보면 왕식렴이 이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개경으로 진군해 왔어. 중간에 왕식렴의 군사를 막아야 할 황주 황보씨는 오히려 쌍수를 들어 왕식렴을 환영하며 보급을 해주고. 그리고 왕요 태자를 왕으로 세우고. 이 나쁜 놈들!’
나는 격분해서 왕식렴과 황보제공을 노려보았다. 이 두 사람은 근거지가 평양과 황주인 만큼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모로 심란한 상태인데도 이 자리에 나왔다.
‘북방에 우리 쪽 사람들을 많이 심어놔야 해. 그래서 왕식렴이 함부로 서경을 비울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안북부에 정윤파를 많이 보내야지.’
안북부는 오늘날의 안주였다. 왕식렴의 근거지인 서경 북쪽에 있었다. 이 안북부를 정윤파가 장악하면 왕식렴은 함부로 못 움직였다.
만약 난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왕식렴이 서경을 떠나면 안북부의 군사들이 그대로 남하해서 서경을 장악하면 됐다.
‘내 뜻대로 일을 추진하려면 내가 직접 나서야지. 의원도 이제는 안전하다고 했으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겨우 마음을 달랬다. 그 와중에 왕건이 음침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뭐 하늘이 나더러 거란을 치라고 명을 내린 것 아닌가? 조사온이 그리 황당하게 죽다니. 거란 태후 술률평 그 할망구가 황권을 강화시킨다고 거란의 여러 장수들을 숙청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조사온이 이리 죽다니. 거란에 쓸 만한 장수가 거의 없어진 것 아닌가? 응?”
왕건의 말이 옳긴 했다. 거란도 우선 나라를 세우긴 했으나 그 내부에 여러 부족들이 있어서 중앙집권이 제대로 안 됐다.
그 부족장들을 가만히 두면 답이 없으니 거란 태후 술률평이 나서서 대규모 숙청을 했다.
‘이런 식의 대규모 숙청을 하면 당장 힘이 약해지는 것은 맞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숙청을 통한 중앙집권강화가 효과를 드러낸다. 수십 년 뒤에 거란은 수십만 대군을 자유자재로 동원하는 초강대국이 된다. 지금이 그나마 거란을 상대로 뭘 할만한 상황이긴 해. 하나 그래도 거란이 워낙 강해서.’
나는 왕건의 말을 듣고 더 심란해졌다. 나는 아직도 전력을 다해 북벌을 추진할지 아니면 포기할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석경당이 군사를 움직여 주기만 하면 거란에 한번 도전해 볼 수 있습니다. 최소 강동의 땅은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만약 출진하신다면 어디까지 나아가실 작정이십니까?”
유금필도 조사온의 죽음에 대해 듣고선 할 만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가장 상책은 요동을 포함해 발해의 옛 땅을 모두 되찾는 것이다. 중책은 요동은 포기하고 발해 동부 지역을 탈환하는 것. 하책은 국내성을 되찾고 옛 졸본 땅이나마 확보하는 것이다. 국내성은 옛 고려의 3경 중 하나이고 졸본은 동명왕께서 몸을 일으킨 곳이다. 그곳을 확보하면 체면치레는 하는 거지.”
왕건이 당당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말갈, 여진 무리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고려 기병들로 숫자를 채우고 말갈 기병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거란과의 승부가 가능합니다.”
유금필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진작 그에 대해 생각한 바가 있다. 일찍이 일리천 전투 때 우리 고려군사들만 가도 신검을 물리치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말갈 무리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것은 거란과의 승부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대장군이 말갈 기병 1만 기를 거느리고 선봉에 선다면 내가 든든하다.”
나는 왕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왕건의 야심이 대단히 컸고 나름 준비도 철저했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준비를 해놨다고 해도 고려 군사들이 졸본까지 진출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왕건이 나와 왕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대광현과 친하니 대광현과 발해 유민들을 잘 살펴라. 내가 북벌을 하면 대광현을 크게 중용할 것이다. 발해 유민들이 일제히 호응하면 보급이 편해지니.”
역시 대광현과의 관계에 공을 들인 내 판단이 옳았다. 왕건이 발해 유민들과 관련된 사안은 우리에게 맡기는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왕무가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래 정윤만 믿는다. 정윤비도 출산 이후 몸조리를 잘 하거라. 거란에 술률평 할망구가 날뛰고 있는데 우리 고려에선 정윤비가 나서서 상대해야지. 소문을 들어보니 술률평 그 할망구가 팔이 한쪽만 있다더라. 우리 연우가 한 팔로 술률평의 팔을 잡고 다른 팔로 때리면 술률평을 제압할 수 있어.”
왕건이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러나 굳이 이걸 지적하면 분위기를 깰 것 같아 나는 짐짓 팔을 걷어붙이며 외쳤다.
“제가 반드시 술률평을 제압하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최대한 왕건의 북벌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정윤파 사람들을 전방 요직에 심는 일이 중요했다.
“그래! 그런 기개가 있어야지.”
왕건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석경당에게 군사를 움직이라는 국서는 소신이 전하겠습니다.”
가만히 있던 왕규가 불쑥 끼어들었다. 왕건의 비위도 맞추고 싶고 왕규도 공을 세우고 싶은 것 같았다.
“음. 당장은 석경당에게 국서를 보내지 않을 작정이다. 우리 쪽도 어느 정도 군비를 갖추고 나서 움직이자고 해야 하니. 게다가 나는 말라 대사를 석경당에게 보낼 작정이다.”
왕건이 난감한 듯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 중원에 국서를 전하는 일은 소신이 여러 차례 했는데.”
왕규가 굉장히 서운한 듯 말했다.
“그게 대광이 정식 사신으로 자주 중원을 들락날락하다 보면 거란의 무리들이 반드시 눈치를 챈다. 석경당 주변에도 친거란파들이 많을 거야. 그쪽에 정보가 새어나가면 곤란하다. 그러니 말라 대사에게 국서를 들려 보내면 안전하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 말라 대사와 대화를 나누어보니 그분이 큰일을 같이 해볼 만한 성품이야.”
왕건이 왕규를 달래듯이 말했다. 상당히 그럴듯한 말이라 왕규도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왕건이 참 치밀한 것 같으면서도 허술한 면이 있어. 석경당 주변의 친거란파는 저리 경계하면서 석경당 본인이 친거란파라고는 조금도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려다가 억지로 참았다. 지금 주변에 사람이 많은데 한숨을 쉬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건이 아무리 웅대한 계책을 꾸며도 결국 다 일장춘몽이야. 석경당이 안 움직이는데. 뭐. 에라 모르겠다. 나는 왕무를 위해 챙길 것만 챙기면 그만이야. 왕건의 북벌사업에 동참해 안북부에 우리 사람이나 심어놔야지.’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눈치를 살폈다.
* * *
모든 게 일장춘몽으로 돌아갈 줄도 모르고 왕건은 북벌에 관해 길게 말을 늘어놓았다. 아침에 모였는데 저녁이 돼서야 사람들은 겨우 흩어졌다.
왕무는 나를 조심스레 부축해가며 나주원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왕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연우야. 오늘 기분이 안 좋았어? 한숨도 몇 번 쉬려 한 것 같고. 왠지 이상해 보여서. 평소 때와 달라 보여. 견훤과 어려운 싸움을 벌일 때도 항상 자신만만해하던 너였는데.”
그 말을 들은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왕무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
나는 새삼 그걸 느꼈다. 평소에는 그게 너무 좋았는데 지금 같은 때는 그것이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임신을 해서 기분이 오락가락합니다. 평소와 다를 수밖에 없지요. 전하.”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래.”
왕무는 약간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왕무가 내 말을 안 믿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따지고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도 왕무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게 됐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리가 북벌을 꼭 해야 하는 걸까? 전쟁을 일으키면 고려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데. 그냥 고려 땅만 지키며 살면 안 될까?”
“연우야. 아직 발해 사람들이 옛 땅에 남아 있고 여전히 싸우고 있잖아. 발해인들은 나라가 망한 뒤에도 거란에게 굴종하지 않고 항전하고 있어. 그만큼 거란의 통치가 잔인하다는 거지. 어쨌든 형제들이 그리 싸우고 있는데 외면할 수는 없어. 출진해서 무조건 패하는 상황이면 몰라도 희망이 있다면 나가야지.”
왕무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왕무가 왕이 되면 발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회가 생기면 출진하겠구나. 나라도 막을 순 없겠어.’
나는 어쩌면 세상에서 왕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부부기도 했고 또 남자로서도, 여자로서도 왕무를 이해하고 있었다.
왕무가 무조건 한번은 북벌을 감행할 것을 나는 이 순간 확신했다. 왕무는 발해 사람들의 절규를 무시할 수 있는 성품이 아니었다.
‘하긴 그런 왕무니까 거의 7년간 같이 지내면서도 잠자리를 안 한 내 말을 따라줬지. 그래서 결국 나도 왕무에게 빠져 버린 거고. 하하하. 에라 모르겠다. 왕무가 북쪽으로 진군하면 나도 꼭 따라가야지.’
그동안 북벌문제를 두고 나는 고민이 많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이 순간 느꼈다.
‘왕무를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해 북벌에 내 재주를 쏟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