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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86화 (186/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86 - 읽씹

나는 출산이 끝나고 몇 달만 쉬다가 한림원에 복귀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참 엄마가 할 게 많아. 현(賢)아! 그렇지?”

나는 품속의 아기를 향해 중얼거렸다. 아기가 깰까 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라는 말이 안 나올 것 같았는데 막상 아기가 생기자 자연스레 엄마라는 말이 입 밖에 나왔다.

‘근데 너무 흔하게 쓰는 한자를 아기 이름으로 삼은 것 아닌가? 나중에 현이가 왕이 되면 어쩌지?’

태어난 아기의 이름은 왕현(王賢)으로 정해졌다. 왕건 및 한림원 학사들이 의논한 끝에 이 이름을 지어줬다.

‘왕건이 그래도 네이밍 센스가 좋긴 하니까. 쉬운 한자로 이름을 잘 짓긴 해. 안동이나 천안 같은 고을들 이름도 정하고. 에라 모르겠다. 내가 우리 아기 이름 부를 때 좋으면 됐지. 다른 사람들 걱정을 왜 해? 다 알아서 굴러가지.’

나는 그렇게 무책임하게 고민을 끝내고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현아?”

내 중얼거림을 들은 아기가 살짝 눈을 찡긋한 것 같았다. 나는 너무 기뻐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참 우리 아기 얼굴도 왕무의 얼굴만큼이나 봐도 봐도 좋아.’

어린 아기 같은 경우 진짜 하루 자고 일어나면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를 유심히 살피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거웠다.

‘왕무도 어렸을 때 이랬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기의 얼굴을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쨌든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아기를 안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잠든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는 즐거웠다.

다만 아기를 보살펴야 하는 만큼 한림원에 복귀하는 일은 늦어질 것 같았다. 그때 문밖에서 시녀 경란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상산백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빨리 모셔라.”

나는 황급히 외쳤다. 내가 한림원에 못 나가는 만큼 아버지인 임희를 통해 조정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왕태손 저하.”

들어서자마자 임희는 현이를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매번 이랬다.

“아버님. 민망하게.”

마치 현이를 껴안고 있는 나한테 예를 올린 것 같아서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다. 미리미리 이런 연습을 해놔야 한다. 나도 그렇고 왕태손 저하도 그렇고. 왕실의 첫 왕태손 저하께서 태어나셨으니.”

임희가 근엄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현아! 외할아버지다!”

나는 품속에 있는 아기와 함께 임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꺄르르.

덩실덩실 아기를 가볍게 흔드니 신이 난 현이가 웃었다.

“이런 왕태손 저하.”

그 모습을 보고 임희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슬며시 현이를 임희의 품에 안겨주었다.

“왕태손 저하. 소신 상산백입니다.”

임희는 아기를 껴안은 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근엄하게 말했다.

‘아이고 웃겨라.’

임희는 진지하게 말하는데 아기를 껴안고 그러는 광경이 너무 웃겨서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그러면 엄청난 무례라서 억지로 참았다.

‘아버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유긍달 등이 자기 외손자를 왕으로 만들려고 악을 쓰는 게 이해가 간다. 왕실에서 태어난 외손자가 너무 귀엽고 좋겠지. 제압을 해놔서 다행이야.’

내가 새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문이 열리더니 상산 부인이 방안에 들어섰다.

“영공 각하 오셨군요!”

상산 부인은 출산 후에도 나를 돕기 위해 나주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음, 연우에게 조정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왔소. 그래 연우야. 우선 기쁜 소식이 있다. 정주의 유천궁이 마침내 혼사를 결정했다. 광주원군과 정주원 공주의 혼약이 정해졌다. 정주 세력의 합류로 이제 정윤파의 입지는 확고해졌다.”

임희가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말했다.

“여태 시간을 끌다니 유천궁도 참 대단합니다.”

그날 정주원에서 내가 유긍달을 제압했다. 그래서 정주 공주의 혼사를 결정하는 일도 흐지부지됐다.

유긍달이 날아가는 바람에 조정이 혼란에 빠져 누구도 정주 공주의 혼사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 틈을 노려 유천궁은 또 시간을 질질 끌다가 이제야 결단을 내린 것이다.

“뭐 왕태손 저하께서 태어나셨으니 유천궁도 더 늦으면 안 되겠다 싶어 결정을 한 거다. 왕태손 저하께서 정윤 전하의 입지를 강화시킨 거다. 으하하하.”

임희가 현이를 껴안은 채로 크게 웃었다. 임희는 진작부터 왕무의 후계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해 왔다. 그 구상이 이루어졌으니 임희는 너무 기쁜 것이다.

이제 반정윤파가 무슨 짓을 해도 정윤파를 흔들기 어려워졌다. 왕식렴과 황보제공을 중심으로 그들이 다시 뭉쳐도 왕위를 넘볼 동력은 모두 상실했다.

‘그 긴 암투가 이제야 끝났구나.’

나는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 내 앞에서 임희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폐하께서 마침내 때가 왔다고 여기고 말라 대사를 중원의 석경당에게 보내셨다. 석경당이 군사를 움직이면 우리 고려도 유금필 대장군을 앞세워 진군할 것이다. 나는 개경에 남아 후방을 지키게 됐다. 정윤 전하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 북벌이 혹여 지금 조정 구도에 무슨 변수를 주는 것은 아닐지? 연우 네 의견은 어떠냐?”

“흐음.”

나는 임희의 말을 듣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 북벌 시도의 결과를 알고 있는 만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북벌에 대해 떠올리는 나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왕무를 위해서 북벌에 진지하게 임하기로 결심을 했어. 그런데 현이가 태어났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 현이를 위해서라도 거란의 힘을 빼놔야 하나? 고려가 가만히 있다고 해서 거란이 안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니.’

수십 년 뒤의 일이긴 하지만 거란은 결국 고려에 대대적인 침공을 가한다. 원래 역사에선 고려가 끝내 귀주대첩으로 거란을 물리치긴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사실상 고려의 역사를 바꿔버렸다. 실제 역사와 달리 왕무는 탄탄한 왕권을 바탕으로 오래 즉위하게 될 거야. 그런데 역사가 바뀐 만큼 귀주 대첩이 그대로 일어날 거란 보장이 없어. 역시 나와 왕무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거란까지 처리해 줘야 하나?’

현이의 얼굴을 보면 그런 결심이 생겼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또 아기 옆에 계속 머물러 있고 싶고 위험한 전쟁 같은 것은 회피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연우야!”

그런 내 얼굴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는지 상산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임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임희와 상산부인을 바라보며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 * *

확실히 왕건이 석경당에게 국서를 보내며 고려 조정에 북벌의 분위기가 이는 것 같았다. 처소에 돌아온 왕무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현이를 사이에 두고 나와 나란히 침상에 누운 왕무가 말했다.

“폐하께서 북벌에 동원할 경보병도 훈련시키고 계셔. 그중에 돌팔매질을 하는 군사들도 있는데 연우 너의 광산에서 나오는 납으로 납탄을 만들면 좋겠다는 안이 나왔어. 연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납은 쓸 데가 많지 않아 창고에 쌓아 두고만 있었는데 잘 됐어. 곧 군영으로 보내라고 사람들에게 말을 해놓을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왕무가 왕위계승구도를 거의 굳힌 상황이었다.

‘헤헤헤. 왕건의 것이 결국 다 나와 왕무 거라서 광산을 통째로 줘도 무방하다는 말이야. 다만 납탄을 만들어봤자 쓸모가 없을 텐데. 납탄을 제조해야 하는 대장장이만 헛일 한 거지. 하긴 그런 건 한번 만들어놓으면 나중에 다 쓸모가 있으니.’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왕무가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적지 않은 납을 그리 흔쾌히 쓰겠다니. 여러 대호족들에게도 모범이 될 거야.”

그러더니 왕무는 은근슬쩍 침상 위에서 나와 현이를 한꺼번에 안았다. 왕무의 품속이 넓어서 나와 현이가 함께 안겨도 포근했다.

* * *

왕태손의 탄생과 북벌준비로 고조된 고려 조정의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현이를 껴안고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시녀 경란이가 외쳤다.

“영해공께서 정윤비 마마를 뵙고자 합니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나는 그런 지시를 내리고 현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영해공의 이름은 왕만세란다. 이름이 특이하지. 그런데 왕만세가 대체 왜 왔을까?”

나는 요즘 들어 조정의 주요 인사들을 만날 때 이렇게 현이에게 이름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이러면 일종의 조기교육이 되지 않을까? 무의식적으로 아기의 뇌리에 정치적 감각 같은게 새겨지는 거 아닐까?’

이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왕만세가 울상을 한 채 들어왔다.

“정윤비 마마, 왕태손 저하.”

왕만세가 우선 내 앞에서 예를 올렸다. 나는 시녀를 불러서 현이를 데리고 잠깐 다른 방에 가 있으라고 했다.

왕만세의 얼굴 표정을 보니 심상치 않은 일 때문에 찾아온 것 같았다. 현이의 재롱을 보며 웃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석경당에게 국서를 전한 말라 대사께서 무사히 돌아오신 지도 여러 시일이 지났습니다.”

왕만세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말라 대사는 분명 석경당에게 국서를 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사실인 것이 여러 경로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라 대사가 귀국한지 한참 지났는데도 석경당으로부터 답신이 안 오고 있어서 소장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영해공이 왜요?”

나는 왕만세가 왜 고생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그야 뭐. 폐하께서는 석경당의 사신이 답신을 가지고 배를 타고 오다가 중도에 풍랑을 만나서 빠져 죽은 게 아닌가 의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수군을 관장하는 소장을 불러다가 바다를 살피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폐하의 꾸짖음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십니다. 수군이 초계를 소홀히 한 것 아닌지 매일 추궁하시니…….”

왕만세가 초조한지 연신 땀을 닦으며 말했다.

“흐음.”

나는 또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을 다물었다.

‘석경당 이 사람도 참 냉혹하긴 냉혹해. 왕건이 그리 간곡하게 국서를 보냈으면 답장이라도 좀 보내지. 그냥 무시를 해버리니. 하긴 석경당이 적당히 핑계를 대서 이런저런 이유로 거란을 안치겠다고 하면, 왕건이 몇 년 뒤에 또 국서를 보낼 게 뻔하니. 아예 읽고 무시해 버리는 게 가장 좋긴 하지.’

그 와중에 왕만세가 말을 이었다.

“아니 석경당이 거란을 칠 마음이 있었다면 그 중대한 국서를 가지고 오는 사신을 1명만 보낼 리 있습니까? 우리 고려도 말라 대사가 국서를 못 전할 때를 대비해 놓았습니다. 여태 안 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런 마음 자체가 없는 건데. 영명하신 폐하께서 이번 일에 유독 집착을 못 버리십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수군만 꾸짖으십니다. 그러니 정윤비 마마께서 한번 왕태손 저하와 함께 폐하의 마음을 풀어드리신다면.”

왕만세는 초췌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전에서 왕건에게 많이 시달린 모양이었다. 왕건 입장에선 자기 평생의 꿈이 날아갈 판이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지? 우리 파벌인 왕만세가 힘들어서 찾아왔는데 외면할 수도 없고, 왕건을 어떻게든 달래야 하나?’

나는 그래서 왕만세에게 말했다.

“지금 폐하께서 어디 계십니까?”

“예성강 선착장에 나가 계십니다. 석경당의 사람이 혹여 오나 싶어서 요사이 자주 선착장에 들리십니다. 여러 수군 군졸들의 고초가 심합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나서주시면.”

왕만세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가 한번 폐하를 뵙겠습니다.”

나는 왕만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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