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80화 (180/216)

< 180 : 오해 >

'왕건이 대체 무슨 의도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하지? 설마 경고인가? 아니면 정말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가? 내가 미래에서 온 사람이지만 왕건의 의중은 도통 모르겠다.'

나는 등허리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저 왕건 앞에서 머리만 조아리고 있는데 왕건이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의 속내를 간파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폐주, 아니 궁예에 대해서는 너도 들었겠지? 궁예가 관심법을 그리 잘 썼지."

"그야 궁예가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그런 것 아닙니까?"

내 말을 들은 왕건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연우 너는 어려서 궁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있지만… 석총은 확실히 억울하게 죽었지. 그러나 궁예는 청렴하고 도덕적인 면도 있었다."

왕건이 턱을 쓰다듬더니 그런 말을 했다.

'어쩌다 보니 화제가 이렇게 흘러갔네. 차라리 왕건이 옛날 궁예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게 나에겐 더 유리하려나?'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왕건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척했다. 나이가 많은 왕건은 한번 발동이 걸리자 옛날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 신라 9주에서 도적들이 여러 성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각지를 장악한 도적들이 진짜 입에 담을 수 없는 참혹한 짓을 저질렀다. 자기들이 장악한 성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으니 정말 온갖 일을 다 벌였지. 그때 나는 어렸기에 아버님과 함께 고향인 송악만 겨우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궁예와 견훤이 일어나서 그런 도적들을 모두 격파하고 나라를 세웠다. 그 두 사람이 그 끔찍한 상황에서 우선 백성들을 구한 공로는 인정해야 해. 궁예와 견훤은 확실히 영웅이었다."

왕건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왕건 입에서 궁예와 견훤을 칭찬하는 말이 나오다니. 왕건이 확실히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 같네.'

나는 혹시 누가 이 말을 들으면 안 될 거 같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왕건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리 놀랄 필요 없다. 어차피 궁예나 견훤이나 죽었으니 칭찬을 좀 해줘도 무방하다. 특히 궁예는 그때 보기 드물게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는 백성들이 죽든 말든 재산을 수탈해가고 남의 아내와 딸을 납치해 가는 도적들이 들끓던 시대였다. 승려들도 고리대금을 하고 승병을 동원해 싸웠지. 근데 궁예만은 계율을 철저히 지켰다. 왕이 되고 나서도 후궁 같은 걸 들이거나 하지는 않았어. 그래서 내가 오랜 세월을 궁예를 섬겼던 거고."

"그건……"

나는 애매한 어조로 맞장구를 쳤다.

'계속 궁예를 칭찬해서 어쩌자는 거야? 왕건 본인이 궁예를 쫓아내고 왕이 됐는데.'

나는 표정 관리를 하며 신중하게 왕건의 말을 경청했다.

"관심법도 처음에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관심법으로 죽은 사람들의 뒤를 캐보면 다 진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때 내가 뒷수습을 하겠다고 광치내로서 조사를 해봐서 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서 조사를 못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궁예가 그걸 못 참고 과감히 관심법이란 명분으로 그런 사람들을 죽인거지. 그런데 그게 모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난세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다 죄를 조금씩은 저질렀거든."

왕건이 말을 하다가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여기 차가 있습니다."

나는 비위를 맞출 겸 차를 찻잔에 따른 뒤 왕건에게 바쳤다. 왕건은 반색을 하며 차를 마셨다.

"고맙다. 내가 광치내가 된 것도 궁예 생각에는 내가 그나마 도덕적이라 그런 거였다. 호색한 것이 큰 결점이긴 하나 어쨌든 책임을 지고 연애를 한 여인들을 다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거지. 어쨌든 처음에는 그랬던 궁예도 결국 죄 없는 석총같은 사람도 죽이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거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거지? 안 그래도 힘든데. 에구구."

왕건은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왕건의 의도는 대체 뭐야?'

나도 그게 명확하지 않아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왕건이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수단은 될 수 있으면 앞으로는 쓰지 말거라. 연우 네가 얻어낼 것은 이번에 다 얻어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 지수를 빼돌린 것에 대해 책임도 져야지. 연우 네가 갖고 있는 격구단을 이용해 지수를 탈출시켰으니 그 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너도 내가 지정한 전각에서 지내거라. 거기서 책이나 읽으며 기다려라. 그래야 명분이 서지. 내가 적절한 시기에 풀어주마. 내가 한쪽만 벌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왕건이 태연한 표정으로 그런 명을 내렸다. 나에게도 일종의 가택연금 비슷한 벌을 내릴 모양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건이 벌을 준 건 어쨌든 이 벌을 끝으로 이번 문제는 마무리 짓겠다는 거야. 잠시 전각에서 몸을 사리며 쉬고 있다가 나와야지.'

내가 전각에 유폐(?)되는 벌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왕무는 격분했다.

"국선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유폐라는 벌을! 내가 폐하께 가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사실 유폐도 아닙니다."

왕건이 지정한 전각은 궁 한쪽에 있었는데 식사, 생필품, 읽을 책 등이 다 풍족하게 지급되었다. 다만 다른 사람을 한동안 만나지 말라는 것이 왕건의 의도였다.

'김선우였을 때는 이게 벌이 아니라 축복이었을 걸. 먹여주고 재워주고 혼자서 공부할 책도 주고.'

나는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국선! 그럼 우리가 얼마나 서로 못 보게 될지."

왕무가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그, 그건.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나도 문득 왕무를 못 본다 생각하니 이게 큰 벌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여기에서 왕무가 섣불리 왕건에게 맞서는 것은 좋지 않은 수였다.

"국선!"

"폐하께서 저를 오래 가둬두진 않으실 것입니다. 폐하를 믿어보세요."

나는 왕무의 손을 잡고 그리 달랬다.

어쨌든 나는 다음날 바로 읽을 책들을 싸들고 왕건이 지정한 전각에 들어갔다. 최치원이 나에게 남긴 책들을 모두 들고 갔다.

'기왕 시간이 생겼으니 최치원의 충고대로 공부나 열심히 해야지.'

나는 그런 결심을 하고 서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한지 너무 오래 돼서 서탁에 앉으려니 어색했다.

그래서 나는 침상에 누워서 책을 훑어보기로 했다. 최치원이 남긴 책은 꽤 난이도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반쯤 졸면서 건성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가 한 구절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도 수국에 관한 구절이 있네!"

나는 최치원이 남긴 다른 책도 집어 들어 허겁지겁 넘겨봤다. 어느 책이든 찾아보면 반드시 짧게 수국에 대해 언급하는 구절이 있었다.

'아니, 그냥 속시원하게 나에게 말을 해주면 될 것을 굳이 이리 간접적인 방법으로 알려주려 하다니.'

나는 최치원은 왜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썼는지 궁금했다.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데 문 밖에서 시녀가 말했다.

"정윤비 마마, 식사를 대령하겠습니다."

"그래. 들어와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시녀들이 내가 먹을 상을 차렸다. 나는 젓가락을 들어 밥을 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속이 미식거렸다.

'나주원 음식이 아니라서 입맛에 안 맞나? 하긴 몇 년간 세작이 해주는 음식을 먹어놓고 무슨 입맛을 따지는지.'

나는 나주원의 음식을 그리워하는 나 자신이 웃겨서 혀를 찼다.

'반찬투정 같은 거 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하며 참고 식사를 하는데 속이 요동쳤다. 나는 속이 불편해서 아예 반찬을 먹지 않고 밥만 먹었다. 속을 좀 달래볼 참이었다.

우웩

그런데 그런 내 처방이 잘못됐는지 음식이 목구멍에서 역류하기 시작했다.

'왜, 왜 이러지? 김선우일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나는 상에다 내가 먹은 음식을 다 토해냈다. 그제야 속이 좀 후련해졌다. 대신 밥상은 엉망이 됐다.

"마마!"

곁에서 식사시중을 들던 시녀가 놀라서 나를 부축하며 등을 두드려줬다. 이 난리가 나니 전각을 지키던 시녀며 하인들이 모두 놀라서 나에게 달려왔다.

"제가 신선한 재료만 선정해서 식사를 만들었는데."

식사를 담당하는 시녀가 사색이 돼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시녀를 노려보았다.

'설마 누군가가 나를 독살하려고? 아니지 최소 왕건이 살아있을 때는 독살같은 수단은 못 쓸텐데.'

내가 머리를 굴리는데 한쪽에서 나이가 많은 시녀가 조심스레 나서더니 말했다.

"혹시?"

나이가 지긋한 어의가 신중하게 내 맥을 짚더니 왕건에게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 회임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입을 쩍 벌렸다.

'회임이면 임신? 내가 임신이라고?'

물론 내가 한동안 왕무의 후계에 대한 고민도 진지하게 했다. 또 원래 역사 속의 임연우도 자녀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나도 임신이 가능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무와 관계를 갖기도 했어. 그래! 임신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긴 한데.'

그런데 막상 임신이 현실로 닥치니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의의 이야기를 듣던 왕건이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말했다.

"뭔가가 잘못된 것 아니냐? 다시 맥을 짚어봐."

"회임을 하게 되면 감정이 격해지기 쉽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의가 그리 말했다. 그러면서도 왕건의 말대로 다시 내 맥을 짚었다. 어쨌든 내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왕건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왕건이 주위를 둘러보며 명을 내렸다.

"정윤비가 회임했으니……에잇 벌은 취소! 나주원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라. 빨리 정윤에게도 이 사실을 전하라."

나도 지금 임신 사실을 듣고 너무 경황이 없었다.

'우선 왕무를 봐야 해!'

막연히 그런 생각에 휩싸여서 내가 몸을 일으키는데 어의가 손사래를 치며 시녀들에게 말했다.

"회임 초기에는 조심해야 하니 어서 마마를 부축하시오."

시녀들이 어의의 지시대로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회임 초기에는 고비가 많으니 거리가 짧아도 나주원까지 걸어가지 마시고 가마를 타고 가십시오."

어의가 나를 향해 조언을 건넸다. 곁에서 그 말을 듣고 왕건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회임초기에는 막 뛰어다니거나 말을 타도 괜찮은 거 아니었나? 운동도 하고 더 좋지 않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초반의 고비를 넘기면 가볍게 운동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어의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왕건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군. 나는 왜 그렇게 알고 있었지? 어쨌든 나도 함께 나주원에 가주마. 나주왕후가 연우 너를 잘 도와줄 거다."

왕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내가 회임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궁과 조정에 퍼졌다. 임희, 상산부인, 왕규, 광주원 부인 등이 우르르 나주원에 몰려왔다.

"으하하하. 역시 정윤비 마마의 신산귀계는 놀랍습니다. 철저히 명분을 지키면서 폐하께서 내리신 벌도 빠져나가시다니."

문안인사차 왔다는 왕규가 오자마자 감탄하는 기색으로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왕규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안 그래도 오해 받을 것 같아 찜찜한데.'

이 시점에 내 임신 사실이 알려진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나는 내가 임신했을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게 내 큰 계획의 일부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왕규와 같은 생각을 하기 쉬운 것이다.

'왕건은 과연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할지.'

나는 그게 몹시 걱정됐다. 그런 내 곁에서 왕무가 내손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내 임신 사실을 듣자마자 군영에 있다가 갑옷도 벗지 않고 달려온 왕무였다. 그 이후에는 내 곁에 찰싹 붙어서 나를 보살펴줬다.

'에라 모르겠다. 우선은 나와 왕무의 아이를 건강하게 낳는 것에만 집중하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