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 대마불사 >
'좋아, 유긍달을 옭아매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모두가 모여 있는 앞에서 일을 터뜨렸으니 유긍달도 손 쓸 방법이 없겠지.'
지금 유긍달은 부하들을 불러 뒷수습을 명할 수도 없었다. 장내의 시선이 모두 유긍달에게 쏠려 있었다.
"……"
유긍달은 그저 말없이 자신이 떨어뜨린 찻잔만을 매만지고 있었다.
'대단하다. 지금같은 상황에서도 침착한 표정이라니.'
나는 유긍달에게 감탄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낮이었다.
'오지수는 이미 멀리 달아났을 거다. 김장명에게도 오지수를 마중 나오라고 전갈을 보냈으니 조만간 만나겠지. 그리고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반정윤파가 감히 오지수의 일을 거론하지 못할 것이다. 유긍달이 벌인 일에 비하면 오지수의 도주는 작은 일이니.'
나는 그런 계산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러 대호족들과 중신들은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청난 사건이 터졌으니 향후 조정의 정세가 어찌 흘러갈지 자기들끼리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유천궁과 정주 왕후는 놀라서 정주원의 시녀와 하인들을 불러서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정주원 정원에도 수국이 피어있었다. 그와 관련해서 조사를 명하는 것 같았다.
'이러니 유긍달이 묵묵부답이지. 정주원에도 수국이 있으니 잡아떼기가 어렵거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왕무 쪽으로 걸어갔다.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너무 졸렸다.
'어젯밤에 긴장해서 잠도 못 잤어. 왕규와 광주원군도 너무 일찍 왔고. 이젠 좀 돌아가서 자야지.'
피곤해서 그런지 걸음걸이도 휘청거렸다.
"국선!"
그런 나를 보고 왕무가 놀란 기색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왕무가 나를 부축했다. 다른 정윤파 인사들도 속속 달려왔다.
"허허허, 연우야. 네가 또 한번 해냈구나!"
임희가 감개무량한 얼굴로 말했다. 노련한 임희는 이번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왕규 역시 기세등등한 어조로 외쳤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이제 광주원군의 일만 마무리하면……"
"대광,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아마 오늘 유천궁과 정주원이 공주의 혼사를 결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유천궁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천궁과 정주원 사람들이 한쪽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지금 정주원 내에도 세작이 있다는 의구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공주의 혼사를 논의할 여력이 없을 것이다.
손님들이 아직 있으니 유천궁도 의논만하고 있지, 손님들이 없었다면 정주원이 발칵 뒤집혔을 게 뻔했다. 유천궁도 내심 손님들이 빨리 가기를 바랄 것이다.
"크하하하."
그 와중에 한쪽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름 아닌 공직이 낸 소리였다.
"오늘 정윤비 마마 덕에 재밌는 일을 보게 됐습니다. 과연 우리 고려에는 인재가 참으로 많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가 여기에 더 있을 필요는 없을 듯하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웃으면서 나에게 먼저 예를 올린 공직은 정주 왕후와 유천궁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대로 정주원을 나섰다.
공직도 오늘 정주원에서 공주의 혼사를 결정하지 못할 거라 짐작하는 것이다. 다른 중립파 인사들도 상기된 얼굴로 그런 공직을 따라 하나 둘 정주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다급하게 왕무에게 말했다.
"왜 그리 서두르십니까? 우리가 이겼는데. 아예 유긍달과 그 무리들을 이 자리에서 쓸어내 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왕규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이 아저씨는 너무 과격해서 문제야.'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유긍달이 큰 죄를 지었으나 이걸로 유긍달과 그 세력을 쓸어내긴 어렵습니다. 그러기에는 유긍달과 연루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유설란도 김부와 결혼했다. 이외에도 유긍달과 충주 쪽과 연계된 세력이 자못 컸다. 유긍달을 가혹하게 처리할 경우 불안해 할 사람이 많다는 소리였다.
'왕건이 뭐 알아서 잘 마무리하겠지. 적절하게 유긍달에게 책임을 묻고 연루된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게 다독이고.'
왕건의 얼굴을 떠올리니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개경에서 일어나는 일은 폐하께서 거의 다 알고 계십니다. 지금이 한밤중도 아니고 낮이니 폐하께서도 지금 정주원에서 터진 사건을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추궁이 있을 수 있으니 서둘러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건의 정보망에 대해서는 나도 일찍이 실감한 바 있었다. 게다가 대내학사 김악도 정주원에 있었다. 왕건에게 평소 구박을 받긴 해도 김악은 왕건의 심복 중 하나였다. 이만한 일이면 즉시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일을 쳐도 크게 친 건데. 뒷수습은 왕건이 다 해야 하니. 왕건도 울화가 많이 치밀어 오를 거야. 우선은 빠져나가 있어야 해.'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사람들을 독촉했다.
정윤파 인사들도 내 말을 듣고 허둥지둥 정주원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정주원 밖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와 함께 왕건이 진짜 놀란 표정으로 정주원 안에 들어섰다.
'아 졸려 언제 끝나지?'
나는 하품을 하며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왕건은 명을 내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정주원에 남아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와 왕무도 여태 정주원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가고 있는데도 일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허겁지겁 달려온 왕건은 우선 유긍달을 불렀다. 그리고 정주원에서 마련한 방에서 독대를 나누었다. 독대를 마치고 나온 유긍달의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다.
그 다음으로 왕건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임희와 왕규였다. 이 대화도 한참 걸렸다. 임희와 왕규는 약간 지친 기색으로 방에서 나왔다.
"폐하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아버님."
임희가 나오자 나는 재빨리 그리 물었다.
"연우 너도 폐하의 부름을 곧 받을게다. 그때 폐하께서 다 말씀해주실 테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거라."
임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안 해줬다.
'왕건이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주요 호족들은 다 부를 기세인데. 언제나 끝날지.'
임희와 왕규가 나온 뒤에는 바로 황보제공과 박수경이 왕건의 명을 받고 들어갔다. 일이 마무리될 기미가 안 보였다.
어젯밤 잠도 못 자고 해서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윤비 마마! 폐하께서 마마를 부르십니다."
그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나는 시녀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에구구, 연우 너 때문에 내가 힘들어 죽겠구나. 일을 쳐도 어마어마한 일을 쳤다. 오늘 연우 네가 벌인 일을 듣고 나는 처음에 믿을 수가 없었다. 나 참. 유긍달 그 사람도 그렇고."
내가 들어서자마자 왕건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왕건은 기진맥진한 표정이었다.
'나야 지루하게 기다리며 잠깐 잠이라도 잤지만 왕건은 종일 호족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했으니.'
내가 터뜨린 일의 뒷수습을 하는 왕건의 모습을 보니 나도 약간은 미안했다.
'그리고 이제는 왕건에게 더 잘 보여야 해.'
오늘 일로 사실상 유긍달을 중심으로 한 반정윤파는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긍달이 자기 파벌 인사들까지도 감시해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제 반정윤파는 예전같은 결속력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 정윤파가 가장 강력한 파벌이 됐다. 다만 이런 구도에서 왕건이 왕무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거나 하면 또 곤란해진다.'
왕건이 왕무를 아끼고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왕무의 세력이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상황에서 왕건의 마음이 어찌 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앞으로 한 5~6년간 왕건의 비위를 잘 맞추면 왕무가 안정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왕건에게 굽신거렸다.
"기실 저도 얼마 전에야 유긍달이 수국을 이용해 정보를 캐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최치원 선생의 책을 읽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다만 이게 사실인지 확신이 없어서 차마 폐하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혹시 유긍달을 모함한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웠습니다. 오늘 여러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유긍달을 추궁해서 겨우 사실을 알아낸 것입니다."
나는 왕건의 비위를 맞출 겸 적당히 둘러댔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나는 원래 유긍달이 정보를 어찌 전달받는지에 대해 감도 못 잡고 있었다.
내 저녁 식사를 준비해온 시녀들을 의심하면서도 증거가 없어 끙끙 앓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왕건의 명을 받고 황룡사에 내려가는 길에 최치원의 책을 읽다가 수국에 관한 구절을 읽고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최치원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걸까? 분명 그날 궁에 와서 정원에 수국이 피어있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나에게 은근히 알리려 한 게 틀림없어. 최치원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텐데.'
그런데 최치원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물어볼 방도가 없었다.
"연우 네가 확신이 없었다고? 그런데 우리 지수를 잘도 그리 빼돌렸구나. 내가 보기엔 확신이 있어서 지수를 빼돌린 것처럼 보인다만. 용호군 기병을 풀어서 우리 지수를 데려오라고 할까?"
왕건이 예리하게 일침을 가했다. 거기에 오지수가 빠져나간 사실도 이미 눈치 챈 것 같았다. 왕건이 용호군 기병을 보내거나 하면 곤란했기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폐, 폐하."
"마음 같아서는 용호군 기병을 보내고 싶지만 그럴 수야 없지. 다만 내 생전에는 지수가 개경에 다시는 못 돌아올 거다. 유긍달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개경의 충주저에 연금될 것이다. 그리고 궁 안에서 피를 보는 일은 좋지 않다. 연루된 시녀들은 모두 유배를 갈 거야."
왕건이 대뜸 그리 결론을 냈다.
"폐하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나는 왕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와 왕무 입장에서는 아예 유긍달을 날려버리는 게 좋았다. 그러면 왕요, 왕소, 왕정 태자까지 죄인의 외손자로 엮어서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그런 사태까지 가는 것은 막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최치원 선생이 대단하긴 하구나. 그러고 보니 궁에서 최 선생을 만났을 때 그리 설총의 화왕계 이야기를 해서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 선생에게 다 깊은 뜻이 있었구나. 궁에 피어있는 꽃을 주의깊게 살펴보라고 실마리를 던져준 것이었어. 어떻게든 조정에 출사를 시켰어야 했는데. 수국처럼 변하는 꽃은 역시나 좋지 않구나. 소나무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좋아. 이 개경도 소나무가 많아 자라 예전에 송악이라 불렸지."
내가 순순히 왕건의 명에 따르자 왕건은 긴장이 풀렸는지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런 왕건의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건이 문득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연우야. 네가 우리 무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과연 내가 너를 우리 무와 혼인시킨 일이 옳았다. 결국 연우 너의 수완으로 왕무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었구나. 지수를 통해 명주 세력을 끌어들여도 지금 같은 상황에선 다른 대호족들이 뭐라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과찬이십니다."
얼핏 들으면 왕건이 나를 칭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예를 올리는데 왕건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늘 유긍달이 벌인 일이 드러나서 여러 대호족들이 크게 분노했다. 자기들이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당연하지. 허나 유긍달이 연금되고 나서 사람들의 분노가 가라앉고 난 뒤가 문제다. 사람들이 연우 너에 대해 어찌 생각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