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81 - 야망
“연우야. 이거 먹어.”
왕무가 수저로 죽을 떠서 나에게 먹여줬다. 나는 침상에 누운 채로 고개만 까딱해서 죽을 받아먹었다.
‘그나마 죽은 내 입맛에 맞네. 구토를 하진 않을 것 같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 유별날 정도로 입덧이 심해졌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속이 메슥거려서 괴로웠다. 그런데 오늘 먹은 죽은 맛있었다.
‘아니면 왕무가 나한테 먹여줘서 그런 건가?’
내 지위가 정윤비이니만큼 나를 돌봐줄 시녀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시녀들이 나에게 밥도 먹여주고 씻겨주고 그랬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는 시녀들이 먹여준 음식을 토해냈다. 그러다가 왕무가 직접 나서니 겨우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야. 왕무가 밥을 먹여줘야 그나마 몸이 받아들이다니. 왕무가 나를 얄밉다고 여기진 않을까?’
나는 그런 걱정도 여러 번 했다. 그런데 내 몸이 그렇게 반응하니 나도 도리가 없었다. 거기에 왕무는 내 시중을 들면서도 오히려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자 연우야. 밥도 먹었고 잠시 걷자.”
왕무가 침상에 드러누워 있는 나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 귀찮아. 그냥 하루 종일 누워 있고 싶다. 의원이 가벼운 운동은 하는 게 좋다고 하긴 했는데. 근데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하지만 왕무가 내 어깨를 감싸며 일으키니 나도 도리가 없었다. 나는 억지로 힘을 내서 일어났다.
‘역시 왕무가 나를 좀 도와줘야 해. 시녀들이 나보고 운동을 하자고 했으면 나는 짜증을 냈을 거야. 그러면 시녀들은 놀라서 내 명을 따를 거고. 그럼 나는 운동을 조금도 못 하고 지낼 거고. 그럼 우리 아이에게……뭐 왕무가 몇 달만 고생해야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무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와 왕무는 서로 달라붙어 있는 상태로 나주원의 정원을 거닐었다. 정원의 수국이 다 뽑혀나가서 군데군데 흙이 드러나 있었다.
“정원이며 여러 전각들을 수리할 필요가 있는데 연우 너의 안정을 깰까 봐 수리를 미루기로 했어. 자 저런 건 보지 마.”
왕무가 내 귀에 대고 그리 속삭였다. 정원을 다시 조성한다고 인부들이 들락날락하면 한동안 시끄러울 게 뻔했다.
“응, 무야.”
나는 웃으면서 왕무의 얼굴만 바라봤다. 정원의 꽃들보다 왕무의 얼굴이 더 볼만했다.
‘왕무는 꽃미남이니까. 흐흐흐.’
그런데 확실히 임신을 하니 체력이 떨어진 것 같았다.
“좀 졸려.”
나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래. 낮잠 자자.”
왕무는 나를 반쯤 껴안다시피 부축했다. 처소에 이르러서도 나와 왕무의 몸은 떨어지지 않았다. 왕무는 나를 안은 채로 그대로 침상에 누웠다.
나는 기분 좋게 왕무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왕무의 덩치가 커서 그런지 품속에 안기니 온몸이 그야말로 따스했다.
* * *
한동안 나는 왕무와 찰싹 붙어서 지냈다. 왕무도 군영에는 가끔 나가며 나를 보살피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주고 마음껏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와 왕무가 노닥거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건 결코 빈둥거리는 게 아니야.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라고.’
얼마 전에 내가 유긍달을 날려버렸다. 자연스레 고려 조정 내에서 정윤파가 최대 파벌로 등극했다.
그런 만큼 나와 왕무가 한동안은 몸을 사리고 있어야 했다.
‘아버님도 나에게 그리 말씀하셨어. 내가 계속 얼굴을 들이밀며 나서는 게 결코 좋지 않아. 왕건이 나한테 한 조언도 마음에 걸리고.’
그래서 내가 은거해 있는 사이 임희와 왕규를 중심으로 조정의 일을 수습하고 있었다.
‘왕무와 함께 나주원에서 지내는 것도 다 정치적 업무란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왕무를 바라봤다. 내가 침상에 누워 있는 사이 잠깐 짬이 난 왕무는 서탁에 앉아 무슨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최소한의 업무를 보긴 봐야 했다.
내가 일하는 왕무를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윤 전하!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래. 내가 만나보겠다.”
왕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갈래.”
나는 재빨리 왕무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왕건이 사람을 보냈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그럼 같이 가자.”
왕무가 뻗은 내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나와 왕무는 손님을 맞이하는 다실로 갔다. 왕건이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대내학사 김악이었다.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 폐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김악은 우리에게 먼저 예를 올렸다.
“무슨 일입니까?”
왕건의 심복인 김악이 직접 온 것을 보고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왕무가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큰일은 아닙니다. 서천축에서 스님 하나가 왔습니다. 이름이 무슨 질리부일라? 그런데 폐하께서는 천축이며 서역의 승려들을 좋아하시니 또 직접 나가셔서 환영행사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정윤비 마마께서 회임도 하셨으니 좋은 기운을 받으라고 그 서천축 스님을 궁에 초청까지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 역시 오라고 하십니다. 그 질리부일라란 스님을 만나보라는 의도지요.”
김악이 약간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 왕건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아 그럼 폐하의 처소로 가면 됩니까?”
왕무가 물었다.
“아닙니다. 동양원에서 질리부일라 대사를 만나실 것입니다. 내일 사시에 그 스님이 설법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때 오십시오. 어쨌든 꼭 오라고 폐하께서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김악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왕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외국 승려들을 좋아하시니 천축이며 서역에서 속속 중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폐하께서 삼한을 평정했다는 소식이 다른 나라에도 모두 알려졌습니다. 삼한이 평화를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더 모이고 있습니다. 질리부일라는 이름난 승려라 폐하께서 직접 맞이하시는 거고, 그보다 명성이 떨어지는 승려들도 계속 우리 고려에 오고 있습니다. 어허 나라가 어찌 될지? 안 그렇습니까? 정윤비 마마! 정윤비 마마께서 한림원에서 중심을 잡아주셔야 하는데.”
용무를 마친 김악은 안 가고 앉아서 세태를 한탄했다. 김악은 지금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싫은 모양이었다. 나와 왕무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아니 왕건이 분명히 예전에 외국 승려들을 우대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줬는데 김악은 그새 그걸 까먹었나?’
나는 황당해져서 김악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김악은 나주원에서 한참 떠들다가 겨우 떠났다. 김악이 사라지자 왕무는 이마에서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연우야. 질리부일라 대사가 왔다니 한번 만나보면 확실히 좋을 것 같아. 연우 네가 예전에 마후라 대사와도 친했잖아. 그 멀리서 고려까지 불법을 전하러 오신 고승이니 만나면 유익할 거야.”
그러나 나는 김악의 이야기를 듣고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무래도 내일 동양원에서 폐하께서 심상치 않은 말씀을 하실 것 같아. 준비를 좀 하고 가야겠어.”
“심상치 않다니?”
“예전에 폐하께 들은 말이 있어. 외국 승려들을 우대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하셨지. 첫째는 이 사람들로부터 거란이나 중원의 정세에 대해 듣기 위함이고, 둘째는 이 승려들을 이용하면 중원에 연락을 하기 편하다는 거야. 거기에 동양원에서 모임을 여는 것도 이상해.”
내가 왕무에게 말했다.
“동양원이 왜?”
“동양원에서 모임을 열면 자연스럽게 유금필도 부를 수 있거든. 자, 처소에 돌아가서 북방의 정세나 군사배치에 대해 좀 외워가자. 내일 분명 그에 관해 말이 나올 거야.”
나는 왕무에게 손짓을 했다.
‘거기에 왕건이 직접 우리 부부를 부른 건 이만하면 슬슬 다시 정치활동을 해도 된다는 신호야. 준비를 잘해가서 왕건의 비위를 맞춰야지.’
나와 왕무는 손을 꼭 잡고 후다닥 처소로 달려갔다.
* * *
다음 날 동양원에서 질리부일라 대사는 왕실 인사들을 앞에 두고 설법을 하기 시작했다. 내 예상대로 유금필 역시 자연스레 동양원에 와 있었다.
‘너무 졸린데.’
나는 억지로 졸음을 참았다. 질리부일라 대사는 역시나 명성이 높은 승려답게 어학능력이 뛰어났다. 고려말도 상당히 잘했다. 다만 어눌한 억양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어눌한 어조로 설법을 길게 하니 더 졸렸다. 그런데 설법을 듣다가 한순간 나는 눈이 번쩍 떠졌다.
“……지금 중국 땅에서는 살생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당금 중원 진나라의 황제 석경당은 연운 16주를 거란에 넘겨주고 해마다 거란에 조공을 바치고 있습니다. 석경당이 황제가 될 때 거란군사를 빌렸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렇게 조공을 받으면서도 거란 사람들은 중원 땅을 가끔씩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이에 중원 사람들은 석경당을 원망하며 연운 16주를 되찾겠다고 이를 갈고 있습니다. 그러나 증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무수한 살생을 저지를 생각을 하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무기를 내려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모두 해결될 일입니다. 그래도 우리 고려국 폐하께서는 삼한 땅에 평화를 가져오셨으니 중원과 사정이 다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질리부일라 대사가 적당히 왕건도 칭찬하며 설법을 이어가려 하는데 왕건이 손을 들었다.
“대사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오. 폐하께서 이리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마음껏 물으십시오.”
질리부일라 대사가 감격해서 말했다.
“지금 중원 사람들의 원망이 그토록 심합니까? 그 사람들이 안쓰러워서 묻는 것입니다.”
왕건이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건 거란 사람들의 욕심이 문제입니다. 연운 16주에서 나오는 곡식으로도 충분히 거란 사람들이 넉넉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끝없이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젠 중원 땅 전체를 가져야 한다는 거죠. 중원 사람들은 이에 대해 증오를 쌓고 있고요. 결국 불법을 닦는 것 외에 답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불법에 관심이 많으시니 다행입니다.”
질리부일라 대사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호 그렇습니까? 민심이 그러면 진나라 황제 석경당이 곤란할 것 같습니다. 허허허.”
왕건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질리부일라 대사가 뭔가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왕건은 불법에 대한 관심보다는 전쟁을 할 마음이 더 가득해 보였다.
“석경당 그 사람도 욕심이 많아 탈이지요. 당장 황제가 되고 싶어 거란 군사를 빌렸다가 지금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됐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의 원망이 심하지요. 거기다가 불법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대사의 말씀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자 공양을 드시지요.”
왕건이 질리부일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소승을 후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질리부일라는 왕건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 것 같았다. 공양을 마친 왕건은 질리부일라에게 선물까지 건네고 그를 내보냈다. 질리부일라를 위해 왕건은 구산사에 처소까지 진작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질리부일라 대사가 떠나자마자 왕건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거란 이 자식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다. 한번 손을 봐줘야겠어!”
“폐하!”
그 말을 들은 유금필이 민망한지 외쳤다. 서천축에서 온 질리부일라가 익숙하지 않은 고려말로 몇 시간이나 전쟁을 벌이면 안 된다고 설법을 하고 갔다.
그런데 질리부일라가 떠나자마자 왕건이 거란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이야기를 꺼내니 사람들이 난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