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 화왕백두 >
"허허허, 제가 대접해 드린 음식이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유긍달은 내말을 듣고도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태연자약한 유긍달의 모습을 보고 나는 등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유긍달을 잘 옭아매야 한다. 실패하면……내가 오히려 역풍을 맞는다!'
내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유긍달 곁에 앉아있던 황보제공, 박수경, 임명필, 강신주 등이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러다가 평주원의 박수경이 불쑥 일어나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유긍달이 직접 이 문제로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허나 황보제공 같은 경우에는 사람됨이 이런 대화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수경이 나선 것 같았다.
"정윤비 마마의 말씀은 참 기발하고 재밌습니다. 그러나 몇몇 의문점이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잡찬이 정윤비 마마께서 채식을 한다는 것을 부적절한 방법으로 알아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굳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티를 낼 이유가 있습니까? 충주 객사에서 채식을 대접한 것은 우연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허허허, 그 당시에는 아직 내가 정윤 전하와 혼사를 치르기 전이었습니다. 나와 잡찬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전이었지요. 나와 잡찬 사이의 협상과 타협이 가능할 때였습니다. 잡찬은 나를 위협하면서도 또 달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음식취향 같은 것을 알아내고 그 취향에 맞춰준 것입니다. 중요한 정보는 알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고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나 음식취향 같은 사소한 정보는 바로바로 이용하는 것이 이득입니다. 설마 음식취향 같은 것에 내가 덫을 깔아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박 장군께서도 잡찬을 만날 때 잡찬이 박 장군의 취향이나 기분을 너무 잘 맞춰준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습니까?"
나는 침착하게 박수경의 예리한 질문에 대응했다.
"허허허."
내 말을 듣고 박수경은 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당장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진주원의 임명필이 나섰다.
'아니 나와 일 대 일로 말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차륜전을 쓰네. 하긴 나야 미리 오늘의 일을 준비할 시간이 있었지만, 저 사람들은 갑자기 이런 일에 직면하게 됐으니. 내가 이해해 주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임명필은 말을 이었다.
"정윤비 마마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지가 않아서 묻겠습니다. 그럼 정윤비 마마께서는 잡찬이 나주원에 세작을 심었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정윤비 마마의 입으로 명백하게 그리 말씀해 주십시오."
"하하하."
임명필의 말을 듣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임명필이 예리한 면이 있군. 내가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눈치챘어.'
나는 여러 가지 사실을 나열해서 유긍달이 나주원에 세작을 심었다고 암시만 했다. 결코 직접적으로 유긍달이 세작을 심었다고 말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증거가 부족하니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할 수가 없지. 나중에 일이 잘 안 풀리면 빠져나가려고 암시적으로 말했는데. 임명필이 그걸 눈치 챘군.'
내가 쓴 계책은 곰곰이 따져보면 허술한 면이 많았다.
'나는 미래에서 역사서를 읽고 온 사람이야. 역사 속에서 유긍달의 행보는 정말 교묘하고 뛰어났어. 그래서 두 명의 외손자를 왕으로 만든 거고. 수십 년에 걸쳐 그러기 위해선 직관만으로는 부족하고, 정보망이 있어야 해.'
나는 내 미래지식을 기반으로 유긍달이 세작을 심어서 정보를 얻고 있다고 미리 결론을 내려놨다. 그리고 이런 계략을 쓴 것이다.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증거를 얻기 위해, 아침과 저녁의 식사를 다르게 한 계책을 쓴 것이니 당연히 치밀한 면이 부족했다.
'그래도 유긍달이 자신이 얻은 정보를 다른 대호족들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인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다른 대호족들도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걸?'
다만 지금 물증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유긍달이 세작을 심었다는 사실을 고발해서 유긍달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제시한 증거 정도로는 유긍달을 끌어내릴 수 없었다.
내가 웃으며 머리를 굴리는 사이 생각을 정리했는지 박수경이 다시 나섰다.
"그리고 어쨌든 정윤비 마마의 말씀을 들어보면 나주원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시녀들을 의심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윤비 마마의 지략을 고려하면 그 시녀들을 필히 철저히 감시하셨을 텐데. 뭔가 더 확고한 물증을 잡아내셨습니까?"
"내가 상산에서 데려온 시녀들을 통해 저녁식사를 준비한 시녀들을 감시하라고 시켰습니다. 외부와 무슨 서신 같은 것을 주고받는 지 유심히 살폈습니다."
내가 순순히 박수경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서 뭔가가 나왔습니까?"
박수경이 재차 날카롭게 물었다.
"뭐 나온 것은 없습니다. 감시를 아무리 해도 그 시녀는 열심히 청소를 하고 정원을 가꾸고 식사 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 시녀가 궁밖의 집에 갈 때까지 감시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대답을 듣고 장내가 수런거렸다. 사실 그래서 내가 여태까지 이 일을 터뜨리지 않고 참은 것이다. 증거가 나왔다면 즉시 터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결코 나주원을 수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초라한 나주원을 증축하면 더 많은 고용인을 고용해야 했다. 그러면 세작을 잡아내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몇 년간 초라한 나주원을 그대로 내버려뒀다.
웅성웅성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내 말을 듣던 정윤파 인사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박수경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다행입니다. 결국 충주 객사에서 채식이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는 것이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수런거리는 장내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좌승. 여태까지는 재미있으셨습니까?"
나는 다시 공직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공직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내가 최치원 선생의 제자인 것은 모두 아실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문학공부를 하라고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해서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맨 처음 집어든 책이 '백거이의 시에 나오는 꽃과 나무'입니다."
기실 나는 최치원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리 알려져 있었다. 내가 말을 이으려 하는데 공직이 끼어들었다.
"문학 이야기에는 별 흥미가 없습니다만."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매우 재미있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그 책을 처음 집어든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최치원 선생이 딱 한번 우리 고려의 왕궁에 오셨는데 기억하십니까? 그때 최치원 선생이 폐하를 뵙고 설총의 화왕계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러다가 백거이의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또 최치원 선생이 문학을 공부하려면 꽃과 나무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막판에 최치원 선생이 '화왕백두'란 글귀를 써서 폐하께 바치기도 했습니다. 폐하께서 워낙 자랑을 하셨으니 여러분들도 모두 아실 것입니다. 그때는 최치원 선생의 말씀이 지루하다고 생각해서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은연중에 내 뇌리에 남아있어서 나는 '백거이의 시에 나오는 꽃과 나무'란 책을 집어든 것입니다."
내가 장내를 둘러보며 설명했다.
탁
그리고 그 순간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에 앉아있던 유긍달이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린 것이다.
"유 공!"
곁에 앉아있던 황보제공이 약간 당황해서 외쳤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최치원 이야기를 꺼내니 모두가 당황한 것 같았다.
"그리고 예전에 해량원 부인께서 폐하와 혼인할 때 일이 떠오릅니다. 그때 폐하의 명을 받아 내가 해량원의 건축을 감독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돈이며 인력을 다 댈 수가 없어서 힘겨웠습니다. 그때 마침 충주원과 황주원에서 도움을 줬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해량원의 건축을 도와주신 것입니까?"
나는 유긍달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유긍달은 내 질문을 듣고도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곁에 있던 황보제공이 입을 열었다.
"내 딸아이에게 안 된 일이지만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신 일이고 우리에겐 여유가 있으니 도운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그 일을 왜 지금 거론하시는지?"
황보제공은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황보 공은 그런 생각으로 나선 것이겠지만 잡찬의 뜻은 아마 달랐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내가 최치원 선생의 책을 읽다가 한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백거이의 시에 나온 꽃과 나무에 대해서 최치원 선생이 일일이 논평을 남겼습니다. 자 이 구절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품속에서 최치원이 남긴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수국은 그 성질이 독특한 꽃이라 시문에서 비유적으로 쓰기 좋다. 수국은 주변 흙의 성질에 따라 그 색이 변한다. 절에나 불상 앞에 심어진 수국은 그 자체가 불법을 상징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 변한다는 불법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허나 충의를 중시하는 유학의 입장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변하지 않기에 칭송받는 매화나 소나무와는 다른 것이다."
나는 그 구절을 읽고 나서 책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뭐 좋은 내용 같습니다. 최치원 선생이 남긴 글이니 훌륭한 내용이겠지요. 그런데 그걸 왜 지금?"
내 말을 듣고도 황보제공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박수경, 임명필은 뭔가를 느꼈는지 이제 나서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정주원의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수국은 흙의 성질에 따라 색이 변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인위적으로 색을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석회같은 것을 흙에 섞으면 색이 변합니다. 그런데 나주원 같은 경우 건물이 낡고 오래돼서 석회를 비치해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 수리할 곳이 있으면 석회를 바릅니다. 거기에 내가 의심하고 있던 시녀는 정원을 가꾸는 일도 담당했습니다. 그 시녀가 석회를 수국 주위에 묻어놔도 그냥 거름을 주는구나 생각하지 수상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그 시녀가 꽃들을 돌보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수국 꽃 색깔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관찰력이 예민한 사람이라도 꽃 몇 송이의 색이 변한 것을 잡아낼 수 없습니다."
내 말을 듣고 황보제공도 뭔가를 느꼈는지 말이 없었다.
"……"
"황보 가문은 군사를 다루는데도 능하니 아실 것입니다. 군문에서 봉화를 이용해서 간단히 정보를 주고 받기도 합니다. 나주원의 수국이 봉화와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아니 정원에 피어있는 수국은 그 수가 많으니 훨씬 더 복잡한 정보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 그런."
내 말을 듣고도 황보제공은 뭐라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 곁에서 유긍달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황보 공. 저 수국이 나주원에만 피어있겠습니까? 해량원을 지을 때 충주원이 막판에 도와준 것은 정원을 조성하는데 관여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해량원에도 수국이 한쪽에 피게 됐습니다. 황보 공. 황주원은 어떻습니까?"
내가 교묘하게 질문을 계속 던지는데 황보제공은 이젠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유긍달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 공. 설마?"
그런데 내 뒤쪽에서 격렬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광주원의 왕규가 외치는 소리였다.
"참, 참을 수가 없다! 당장 광주원을 살펴야겠다. 하인을 잠깐 불러다오!"
나에게 호응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짜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왕규를 따라온 하인들은 지위가 낮아 정주원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 하인들을 불러 조치를 취할 작정인 것 같았다.
나와 말싸움을 벌이던 박수경과 임명필도 적지 않게 당황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각자 평주원과 진주원도 한번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