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 기책 >
"그럼 살펴서 가십시오."
"오늘 이렇게 정윤비 마마를 만나 뵙게 되니 참 영광입니다. 정말 부석사에서 보여주신 신통력은……"
내가 특별히 초빙한 화엄종 승려들은 일제히 합장을 하며 말했다.
"그때 일은 이상하게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몸이 워낙 피곤해서 그런가?"
나는 손을 휘저으며 그리 말했다.
'부석사에서는 사기를 친 건데 사람들이 이리 나를 떠받들어주니. 양심에 찔리네. 그래도 왕건의 명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개경에서 왕건은 나에게 화엄종 승려들을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냥 툭 던진 말이었지만 왕의 말이니 나는 거스를 수가 없었다.
'왕건의 명이라 승려들을 만나긴 만났는데. 이게 의미가 있을까? 왕건은 유금필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나보고 이러라고 했는데……'
그러나 지금 서라벌에는 유금필 열풍이 불고 있어서 내가 화엄종 승려들을 만나고 나름 정치활동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화엄종 승려들을 보내고 나서 임연객은 내 곁에서 한숨을 쉬었다.
"대장군이 서라벌에 들어오기도 전에 소수의 군사들을 모아 백제군을 물리칠 줄은 나도 몰랐어. 서라벌 사람들이 저리 환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임연객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지금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유금필의 모습을 보면, 이 시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30 여년 전의 견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견훤이 5천명의 군사들로 완산주에 입성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백제를 건국했다. 거기다가 견훤도 처음에는 왕을 칭하지 않고 신라로부터 무슨 관직을 받았을 걸?'
임연객도 차마 입 밖에 내지만 못할 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고려의 병부경인 임연객 입장에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임연객에게 무슨 말을 해주려고 하는데 시종들이 외쳤다.
"선필 공, 권행 공, 장길 공께서 정윤비 마마를 뵙고자 합니다."
"모셔라."
내가 대답하자마자 선필을 필두로 한 호족들이 들어왔다. 이 사람들은 왕건에게 확실히 줄을 선 사람이었다. 이 사람들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정윤비 마마. 지금 신라 조정이 대장군을 예우하는 것이 도를 넘는 수준입니다. 신라 국왕이 직접 대장군을 위한 연회를 매일 열고 있습니다. 이게 며칠째 입니까? 정윤비 마마께서 본격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선필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딸인 정혜를 왕건에게 시집보내서 그런지 선필은 왕건을 위해 전력으로 뛰고 있는 것 같았다.
"힘든 전투를 거쳤으니 대장군도 좀 쉬어야지요. 맛있는 음식도 먹고."
나는 선필 등의 반응을 보는 것도 재밌어서 모르는 척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권행이 곁에서 갑갑하다는 표정으로 나섰다. 권행 역시 왕건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못 보셨겠지만 30년 전만 해도 각지의 호걸들이 이런 식으로 할거했습니다. 만약, 만약 대장군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우리들이 막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거느리는 군사들도 대장군과 싸우자고 하면 우리 명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정윤비 마마만이 대장군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대장군이 견훤이나 궁예의 뒤를 따를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까?"
내가 웃으며 직설적으로 묻자 선필이 머뭇거렸다.
"대장군이 그런 마음을 품었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신라 국왕이 여는 연회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대장군이 굳이 서라벌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제군은 철군했습니다. 그런데도 대장군은 계속 서라벌에 주둔하고 있으니……정윤비 마마께서 대장군을 한번 불러서 그 의도를 물어보십시오. 그럼 대장군도 정윤비 마마의 위엄에 눌려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나서시고 우리들이 뒤에서 거들면 대장군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권행도 선필을 거들었다. 장길도 말만 안 하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하하하. 여러분들은 대장군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대장군이 이리 서라벌에 머물러 있는 것도 다 충성심이 깊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기다리면 대장군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장군의 뜻이 과연 무엇입니까?"
선필이 물었다.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혹여 기밀이 새어나가면 큰일이라. 군사와 관련된 기밀입니다."
나는 얄미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미래에서 와서 유금필의 의도를 다 알고 있지만. 흐흐흐. 알려주지 말아야지. 나중에 내 예측이 딱 들어맞으면 선필 등도 나를 두려워하겠지.'
나는 그동안 선필이나 안동 삼태사를 정윤파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나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면 선필이 신라를 항복시키는 일과 관련해서 유긍달과도 긴밀하게 접촉하는 듯하고. 이번 기회에 내 실력을 한번 더 보여줘야겠어.'
그래서 나는 뜸을 들이며 내가 알고 있는 기밀을 안 알려줬다. 나중에 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시종이 다시 달려오더니 말했다.
"신라 국왕 폐하께서 정윤비 마마를 임해전에 초대하셨습니다. 유금필 대장군도 그곳에 계십니다."
"간다고 전해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시종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그러자 선필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간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만에 하나 신라 측과 대장군이 정윤비 마마를 초청한 뒤 마마를 억류하면 우리들을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몸이 안 좋으니 못 간다고 하십시오. 이곳이야 우리들이 호위하고 있어 안전하지만 임해전은 신라군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장길도 놀라서 외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장담하건데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대범함을 보여줄 겸 당장 임해전으로 갈 채비를 했다.
"연우 아니 정윤비 마마. 다른 분들 말씀이 맞는 것 같은데."
임연객이 내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걱정없어."
나는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정 그러면 제가 마마를 호위하겠습니다."
장길이 외쳤다.
"아니 서라벌 안에서 오가는데 무슨 호위가 필요합니까? 시종들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나는 호탕하게 대답하고 처소에서 나와 바로 말에 올랐다.
임연객, 선필, 장길 등이 놀라서 쫓아왔지만 나는 말 위에서 손을 흔들어주고 임해전을 향해 달려갔다.
말을 타고 가니 임해전도 금방이었다. 나는 성큼성큼 임해전에 들어섰다. 임해전에는 신라 국왕과 태자, 중신들. 그리고 유금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 측 인사들과 대강 인사를 마친 나는 유금필을 보고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대장군께서 서라벌에 오래 머무시니 초조한 모양입니다. 대장군께서 머무시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말해줘도 되겠습니까?"
내가 대놓고 그리 말하자 신라 측 인사들이 몸을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유금필은 웃으면서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그 연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는 한쪽에 놓인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뭐라 써내려갔다. 그리고 종이를 살며시 접어 유금필에게 건넸다.
내가 건넨 종이를 본 유금필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이쿠.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안 됩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이것까지 눈치 채고 계셨군요. 이건 정윤비 마마라도 모를 줄 알았는데."
유금필은 나에게 그리 당부를 하면서 종이는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게 찢어서 자기 주머니 속에 넣었다.
"대장군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유금필의 속내를 읽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것이 유금필을 견제하는데도 효과가 있다고.'
나와 유금필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은 신라 사람들은 모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신라 태자는 나를 흘겨보면서 유금필에게 술을 따라주고 정성을 다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유금필은 신라를 위해 움직여 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저러니. 하긴 저 사람도 나라를 살려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거겠지.'
나는 씁쓸한 심정으로 술을 한잔 들이켰다.
'그건 그렇고 유금필의 구상대로 하려면 서라벌에 한동안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왕무를 그동안 또 못 보겠네. 나와 헤어질 때 왕무의 표정은 어땠지?'
전투가 끝나니 또 왕무가 떠올라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당장 개경으로 돌아가서 왕무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시간을 지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왕건이 한동안 잠을 못 잘테니 그건 통쾌하네. 유금필이 서라벌에서 이리 시간을 끄니 왕건은 더 초조할걸? 그거 하나는 잘됐어.'
나는 억지로 그런 생각을 하며 기분을 달랬다.
며칠 뒤
임연객 앞에는 7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당신의 이름은 뭐야? 이미 사로잡혔으니 엉뚱한 반항은 하지 말라고. 그래 장군 금달. 그쪽은 이름이 환궁? 그리고 이쪽은 백제 상장 구도의 아들 단서."
임연객은 포박당한 남자들을 꼼꼼하게 취조하고 그들의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
다른 쪽에서 유금필은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로잡은 백제 군졸들은 다 서라벌에 넘겨라. 데려가기 힘드니 그쪽에서 처리하게 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살펴보는 내 곁으로 선필,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다가왔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이것을 다 예측하고 계셨군요. 허허허."
선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백제군이 우리 군사들이 철수하는 길목마다 매복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안동으로 돌아가다가 큰일 날 뻔했습니다. 대장군 덕에 살았습니다."
권행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백제군은 전부 철수한 것이 아니라 일부 정병들은 매복시켜 놨습니다. 유금필 장군은 개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여러 사벌주 호족들도 고향으로 가야 합니다. 서라벌에 모인 군사들이 흩어질 때를 신검은 노리고 있었습니다. 유금필 장군은 이들을 일망타진 하려고 서라벌에서 시간을 끈 것입니다. 저들이 매복을 할 시간을 줘야했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설명을 보탰다.
당연히 백제군의 움직임을 다 예측하고 있던 유금필은 서라벌에서 뜸을 들이다가, 전격적으로 군사를 움직여 길목마다 매복한 백제군을 역으로 각개격파했다.
"그것도 모르고 대장군을 의심했으니. 어쨌든 정윤비 마마께서 이것을 다 파악하시고 저희들을 말려주셔서 다행입니다."
선필을 필두로 한 호족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한테 놀라서 한동안은 딴마음을 못 품겠지.'
그리고 나는 유금필 쪽으로 걸어갔다.
"자 이제는 모든 일이 끝났으니 개경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사로잡은 백제 장군들은 바로 데려가야겠습니다."
"대장군께서 직접 나서서 저들을 생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투 때 유금필이 상당히 무리를 하면서까지 백제 장군들을 생포했다.
'미래에서 온 나도 유금필이 그런 이유만은 모르겠어.'
"다 폐하를 위해서입니다. 폐하께서 매곡성주 공직의 자제들을 위해 힘을 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로들은 서로 교환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거기까지 생각한 유금필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