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34화 (134/216)

< 134 : 환대 >

"앗, 내가 그말을 하려고 했는데."

내 곁에서 임연객이 서운한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기를 회복한 군사들을 보고 유금필은 내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유금필은 자신이 데리고 온 80명의 기병들과 선두에 섰다. 그나마 유금필은 나와 임연객은 최후방에 있도록 배려해줬다.

선필이 재암성 군사들과 나를 호위했다. 선필은 워낙 나이가 많아서 전투에서 선두에 서기 어려웠다. 그래서 자연스레 후방에 배치되었다. 유금필이 선봉에 서고 김선평은 그 뒤를 받치고 선필은 후방을 엄호하는 대형이었다.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온 선필이 한숨을 쉬었다.

"이리 갑자기 싸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과연 잘 되겠습니까?"

"잘 될 것입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전장에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이런 돌격전에도 끼게 되네. 고창성 전투 때는 성벽을 끼고 있기라도 했지.'

나는 가슴이 너무 뛰어서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멀리 선두에서 유금필이 80기의 기병을 향해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안 들렸다.

하지만 유금필의 말이 끝나자마자 80기의 기병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김선평의 군사들도 고함을 쳤다.

선필의 군사들도 유금필의 말을 듣지도 못했지만 소리를 질렀다.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유금필이 기병들을 이끌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도 선필의 군사들과 함께 말을 몰아 나아갔다.

"사탄이다!"

내 곁에서 선필이 눈앞에 보이는 개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나마 노련한 선필은 돌격하는 와중에도 주변의 지형지물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저 숨만 몰아쉬며 말만 계속 몰았다.

선두에서 유금필은 그대로 개울을 건넜다.

"적을 막아라!"

백제군이 함성을 지르며 유금필의 도하를 막으려는 모습이 보였다. 유금필이 쌍검을 휘두르며 그런 백제군을 찌르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그 광경을 살피다가 심장이 떨려서 고개를 숙이고 말만 몰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나는 묵묵히 주변 사람들을 따라 말을 몰았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왜 내가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달릴 수 있지? 백제군에게 막혔다면 후방에서 말을 모는 내가 멈췄어야 하는데?'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뚫린다. 뚫려! 우리가 백제군을 돌파했다! 어떻게 이리 되지?"

곁에서 선필은 경악해서 부르짖고 있었다. 후방에 있는 선필의 군사들은 제대로 싸울 필요도 없었다.

선봉에 서있던 유금필과 고려 기병의 공격을 못 견딘 백제군은 좌우로 흩어지기 바빴다. 그 뒤를 김선평이 휩쓸었다. 그리고 선필의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백제군은 그대로 달아났다.

"대장군의 말대로 우리가 적의 허를 찔렀어! 백제군은 우리가 바로 사탄을 건널 거라고 예상도 못했던 거 같아. 하하하."

임연객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이겼구나!'

여기까지 오는 내내 임연객은 목을 쓰다듬으며 불안한 마음을 토로했다. 그런 임연객이 저리 웃는 것을 보면 고려가 승기를 잡은 것이다.

어느새 백제군은 사방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사탄과 그 인근을 고려군이 제압한 것이다. 유금필은 기민하게 말을 몰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외쳤다.

"지금 백제군의 대오가 무너졌으니 저들이 다시 정비하고 돌아오는데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 전에 이곳에 보루를 짓고 목책을 세워야 한다!"

어느새 김선평이나 선필의 군사들도 유금필의 명에 복종하고 있었다. 유금필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의 나무를 베고 공사를 시작했다.

유금필은 그대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상보께서 서라벌에 전갈을 보내주십시오. 지난번에 제가 벽진성주 이총언의 군사를 본 일이 있습니다. 그들이 상당히 정예합니다. 벽진성의 군사들을 불러 사탄 건너편에 주둔하게 하면 백제군을 빈틈없이 막을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장군."

선필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말에서 내려 한쪽에 가서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유금필은 미소를 지으면서 내쪽으로 다가왔다.

"정윤비 마마께서 제 말을 거들어주시고 또한 군사들을 독려해주셔서 이겼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민망해져서 손을 내저었다.

'내가 없었어도 유금필이 알아서 이겼을 걸? 왕건이 두려워할만 하군. 왕건이 상보라 부르는 선필마저 유금필을 거역하지 못하게 됐다.'

유금필은 이제 전투도 끝났고 나와 함께 정세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아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유금필이 백제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사탄을 점거했으니 이 싸움은 곧 끝날 것입니다. 인근 호족들의 협력을 받지 못하는 백제군은 식량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싸움을 길게 끌 수 없는데 우리가 사탄을 끼고 시간을 끌면 백제군은 답이 없습니다. 이 이치를 알고 백제군도 물러날 것입니다."

"음……"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리 허무하게 이 전투가 끝나다니. 백제군은 입장에서는 수군까지 동원해 고려군을 붙잡아두고 이 작전을 펼쳤는데. 유금필이 온 첫날 전투가 끝나버렸어.'

물론 나나 고려 입장에선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너무 순식간에 일이 이루어지니 황당하긴 했다.

"그리고 요 근래 백제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견훤이 묘하게 힘을 못 쓰는 것 같습니다. 백제 내에서 견훤의 위상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거슬립니다. 정윤비 마마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유금필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아니 미래에서 온 것도 아닌데 유금필이 어찌 저런 사실을 알았지? 어떻게 또?'

그리고 유금필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 지식을 흘리기로 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아마 3년 안에 백제 내에서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는 아예 단정적으로 말했다. 역사기록을 보면 곧 견훤의 아들 신검이 반란을 일으킨다.

"역시 정윤비 마마라면 느끼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 백제가 수군을 먼저 동원하고 서라벌까지 와서 신중한 작전을 펼쳤는데, 이건 견훤이 즐겨 쓰는 수법이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의 솜씨입니다. 거기다가 이만한 대군을 태자 신검이 지휘한 것도 처음입니다. 견훤은 성격상 절대 자기 군사를 남에게 맡길 사람이 아닙니다. 허허허. 앞으로 정세가 어찌 돌아갈지? 정윤비 마마의 예견대로 정말 3년 안에 무슨 일이 터질 거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번 한번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유심히 백제 쪽을 살펴야 합니다."

나는 마치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못해봤는데 과연 유금필은……'

유금필은 내가 맞장구를 쳐주자 흡족한 듯 웃으며 이런저런 병법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유금필과 대화를 하고 뒷수습을 하는 사이 유금필의 명대로 벽진성주 이총언의 군사들도 달려왔다. 벽진성의 군사들은 아예 서라벌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오자마자 주먹밥을 전투를 마친 군사들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와 주먹밥이다."

군사들은 환성을 지르며 허겁지겁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멀리서 달려와서 바로 전투를 벌인 고려 기병들은 더 맛있게 주먹밥을 먹었다.

나 역시 한참동안 식사를 하지 못해서 주먹밥 하나를 집어들었다.

"서라벌에 입성하시면 괜찮은 식사를 하실 텐데. 이런 음식을 드시게 하다니 송구스럽습니다. 허나 지금 사방에 백제군이 있습니다. 한동안 군영에서 함께 움직이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유금필이 미안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군사들이 다 맛있게 먹는 음식입니다. 저도 정말 맛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열심히 주먹밥을 먹었다. 물론 맛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정말 맛이 없군. 너무 대충 만들었어. 그래도 안 먹으면 힘이 빠져서 위험해질 수 있어. 열심히 먹어야지.'

그대로 밤이 되자 사탄 양편에 주둔한 고려군과 사벌주 호족들의 군사들은 커다란 횃불 수백 개를 올려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그리고 멀리 서라벌에서도 횃불이 올랐다.

와아아아

서라벌과 사탄의 군사들은 서로의 횃불을 바라보며 함성을 질렀다. 서라벌과 사탄의 군사들이 서로 호응하고 있다는 것을 백제군에게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확실히 이런 무력시위는 효과를 본 것 같았다.

"백제군이 전 전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방에서 전령의 급보가 당도했다.

"경계를 풀지 마라! 후퇴하는 척하다가 돌아올 수 있다. 계속 사탄을 굳게 지키고 밤에는 봉화를 올려라."

유금필은 여전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백제군은 3일 내내 후퇴만 했다. 완전히 백제 땅으로 돌아갈 작정인 것이다.

"정윤비 마마와 대장군께서는 서라벌로 돌아가십시오. 상보께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두 분을 호위할 것입니다. 사탄은 저와 벽진성주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김선평이 군영에서 그리 말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유금필도 이제는 긴장을 풀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나와 유금필은 선필의 군사들과 함께 서라벌로 향했다.

그런데 서라벌에 입성하기도 전에 전령 하나가 달려와 외쳤다.

"신라 태자께서 직접 중신들을 이끌고 대장군을 마중 나오셨습니다."

과연 멀리서 화려한 의장을 갖춘 신라 태자와 중신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정윤비 마마께서 서라벌을 구하러 달려오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신라 태자는 말 위에서 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별 말씀을."

나도 적당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그리고 신라 태자는 그대로 말에서 내리더니 유금필을 향해 길게 읍을 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유금필은 깜짝 놀라서 말에서 내려 신라 태자를 말렸다. 그러나 신라 태자는 계속 허리를 굽히려고 했다.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신라 태자가 직접 유금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대장군의 힘으로 우리 신라가 살아났습니다. 이 은혜를 갚기 위해 우리 신라 조정은 대장군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그냥 신라 조정이 유금필에게 고마워하는 미담같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신라 태자가 어떻게든 신라를 살려보려고 유금필을 유혹하는군.'

나는 미래에서 와서 신라 태자의 성향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 때 끝까지 반대한 것이 신라 태자였다.

거기에 왕건이 미리 나에게 언질을 주기도 했다.

'신라가 유금필을 서라벌에 붙잡아 두려는 수작을 부릴 거라고 왕건이 말해줬는데 과연 그대로군.'

만약 유금필이 왕건이나 견훤처럼 될 야심을 품고 서라벌에 머무르며 주변 호족들을 규합한다면 개경의 왕건으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이미 유금필의 실력을 본 사벌주 호족들은 유금필과 싸울 엄두를 못 낼 것이다.

서라벌의 신라 조정을 보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유금필이 신라 조정을 끼고 버티면 나름 독립된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신라 입장에서는 그러면 나라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기에 그런 유금필을 도울 것이다.

신라 태자와 만난 일행이 서라벌에 들어서자 서라벌 주민들이 거의 다 나와서 유금필에게 환호를 보냈다.

왕건이 서라벌을 방문했을 때와 비견되는 인파고 환영이었다.

내 곁에서 임연객이나 선필도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선필이 속삭였다.

"동남 3주는 사방이 산으로 막혀있어 개경에서 군사를 보내기 어렵습니다.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 할거하려고 하면 능히 그럴 수 있습니다."

노련한 선필도 신라의 지나친 환대를 보고 그 속내를 짐작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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