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36화 (136/216)

< 136 : 지렁이 >

개경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힘겨웠다.

"그래도 백제의 장군들이니 예를 갖추어 호송하라."

유금필이 그런 명을 내리는 바람에 80명의 고려 군사들은 개경으로 돌아가는 내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포로가 된 백제 장군 7명을 감시하면서 시중도 들어야 하니 80명의 인원으로도 빠듯했다.

"너무 많이 사로잡았어. 그냥 적당히 2~3명만 잡았어야 했는데."

포로 관리를 맡게 된 임연객은 그런 헛소리를 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유금필과 나란히 말을 몰았다. 그러다가 결국 호기심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아쉽지 않으십니까?"

미래의 역사학도로서 나는 유금필이 독립하지 않고 순순히 개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역사서에 유금필의 속마음은 적혀있지 않았다.

사학도로서 나는 유금필의 속내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무엇이 아쉽다는 말씀입니까?"

유금필이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하하하."

구체적으로 왜 왕건을 배반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냥 웃는데 유금필이 수염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그래도 여행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성왕 이래 난리가 나며 사람들이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됐습니다. 아예 마을마다 목책이나 성을 짓고 지키지 않으면 도적떼들이 몰려왔죠. 그때 어린 심정에 꼭 예전처럼 여행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 아마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음."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살아생전에 삼한 땅 곳곳을 마음만 먹으면 여행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견훤이 마음먹고 수비만 하며 시간을 끌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으니. 허허허. 물론 정윤비 마마의 말씀대로 백제에서 무슨 변란이라도 일어나면 시간을 약간은 단축시킬지도 모르지요."

유금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사실을 알아내다니. 이걸 가지고 논문을 쓰면 엄청난 명성을 날릴 수 있는데. 어쨌든 유금필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통일은 조만간 된다. 진짜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말을 몰았다.

나와 일행은 별 탈 없이 개경 인근에 이르렀다.

'하긴 유금필과 기병 80기와 함께 이동하는데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지. 그건 그렇고 왕무를 다시 볼 수 있구나!'

개경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전령 하나가 달려오더니 외쳤다.

"폐하께서 대장군을 위해 직접 개경 교외까지 나오셨습니다."

과연 멀리서 거대한 먼지가 일었다. 왕건이 직접 중신들과 군사들을 거느리고 달려 나온 것이다.

'왕건은 중요한 사람이 와도 구정까지만 나와서 환영했는데 이번에는 진짜 유금필에게 고마웠나봐. 진작 좀 그러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말에서 내렸다. 유금필과 다른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고 기다리는데 마침내 왕건이 당도했다.

"대장군!"

왕건은 유금필에게 달려와서 그 두 손을 꽉 쥐며 외쳤다.

'이제부터는 왕건도 확실히 유금필을 믿을 거고. 어쨌든 역사대로 일이 흘러가겠군.'

내가 그쪽을 바라보며 그런 계산을 할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드니 다름 아닌 왕무였다.

'왕무가 웃고 있구나. 내가 떠나던 날 구정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왕무에게 물어볼까?'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왕무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얼굴이 진짜 작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무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왕무는 웃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주변 사람 눈치 안 보고 이렇게 왕무랑 있을 수 있으니 좋네.'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왔기에 이래도 됐다. 왕건이 유금필을 마중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출정한 군졸들의 친구, 친척들도 다 따라왔다. 군사들은 자기 친구나 친척들을 보고 나와 왕무처럼 껴안거나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침상에서 눈을 번쩍 떴다. 나는 여전히 왕무의 품속에 있었다. 어제 나는 왕무와 함께 나주원에 돌아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입을 맞추고 침상 위에서 서로 껴안은 채 잠들었다.

'아니 어느새 이렇게 됐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내 머리를 긁었다. 그 사이에 왕무도 잠에서 깬 거 같았다.

"연우야."

그러더니 왕무가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제 와서 빼는 것도 위선 같아서 나도 그 입맞춤을 즐겼다.

'나는, 나는 왕무를 어느 정도 좋아하긴 하는구나.'

왕무의 입술을 느끼면서 내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 나니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해?'

한참 입맞춤을 즐기던 왕무가 어느새 입을 떼었다.

"연우야. 괜찮아?"

또 귀신같이 내 동요를 눈치 챈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왕무의 입술로 입을 가져갔다. 적당히 입맞춤을 하면서 이 상황을 얼버무리고 싶었다. 그런데 왕무는 다시 입을 떼며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연우야."

그런 왕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아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한림원에 나가보긴 해야겠네요."

그냥 한림원에 나가서 왕건의 헛소리를 듣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나는 침상에서 나와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왕무도 말없이 그런 나를 도왔다.

물론 왕건의 헛소리를 듣는 것이 더 낫다는 내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아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이번에 유금필이 조용히 돌아온 것을 보면 그만한 충신이 없어. 그런데 그 충신을 그동안 못 썼어. 아니 유금필을 계속 부려먹었으면 벌써 삼한통일을 하든가 땅을 더 넓혔을 텐데. 수군도 버티고. 허허 이거 참. 내가 그동안 입은 손해가 막심하군. 정말 원통하다."

왕건은 한림원에서 이까지 갈며 부르짖었다. 왕건은 진심으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니 억울하고 원통한 건 유금필 아닌가? 그런데 왜 왕건이 저러는 거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가 나는 화들짝 놀랐다. 왕건이 갑자기 눈물까지 주르르 흘리는 것이다.

내가 몸 둘 바를 모르는데 곁에서 대내학사 김악이 속삭였다.

"정윤비 마마께서 출정하신 사이에 내봉경 최응이 병사했습니다. 그 이후로 폐하께서 가끔씩 그러십니다."

"흐음."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시간이 흐르는구나. 왕건 주변의 신하들이 떠나기 시작하는군. 통일도 다가오고 있고.'

어쨌든 일을 해서 심란한 마음을 달래볼까 하고 한림원에 왔는데 왕건이 저 상태니 내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오늘은 아무래도 일을 보기 힘들다."

그러더니 왕건은 몸을 일으켜 한림원을 떠났다.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나주원에 돌아왔다. 나주원에 혼자 있으려니 또 막막해져서 나는 경란이에게 물었다.

"정윤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니?"

"군영에 일을 보기 위해 나가셨습니다."

"알았다."

나는 또 한숨을 쉬며 경란이를 내보냈다.

'왕무가 곁에 있으면 더 막막할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방금 나갔던 경란이가 다시 들어오더니 말했다.

"영해공이 정윤비 마마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영해공? 그건 누구야?"

낯선 작위를 듣고 나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께서 소장에게 과분하게 대광 벼슬과 영해공의 작위를 내리시고 수군을 맡기셨습니다. 허허허. 모두 정윤비 마마의 은혜입니다. 벼슬과 작위를 받고 정윤 전하께는 바로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정윤비 마마께서는 그때 계시지 않아서……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리 달려왔습니다."

번쩍이는 비단옷을 입고 온 왕만세가 흐뭇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나한테 고맙기도 하고 자랑도 할 겸 달려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왕만세가 확실히 영해공 작위를 받지. 그런데 순간적으로 경란이가 영해공이라 하니 생각이 잠시 안 났어.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 억울하네. 아버님도 상산백 작위에 머물러 계시는데 왕만세는 그냥 한방에 영해공. 공작이 됐어.'

그냥 미래에서 이런 사실을 읽을 때는 별 감정이 안 들었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이 돼서 이런 일을 겪으니 억울하기도 하고 떨떠름하기도 했다.

"축하드립니다."

어쨌든 예의상 내가 입을 여는데 왕만세는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두 정윤비 마마의 은혜입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소장을 밀어주셔서 그런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별 말씀을."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쨌든 이로써 고려 수군은 정윤파에 가담하게 됐다.

'물론 수군 병력은 상륙시켜 육전에 써먹기 힘든 게 단점이긴 해. 그러나 여러모로 유용해. 다른 대호족들도 난감하긴 할 걸.'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사실이 있어 왕만세에게 물었다.

"수군 재건은 잘 되고 있습니까?"

"폐하께서 물자를 넉넉하게 대주셔서 문제없습니다. 조만간 백제 수군을 압도하는 규모가 될 것입니다."

왕만세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말했다.

"그럼 삼한 땅 어디라도 갈 수 있는 큰 전선도 많겠지요?"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백제 수군에게 설욕하기 위해 대규모 상륙전을 염두에 두고 전선을 건조하라 명하셨습니다."

왕만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왕만세의 함대를 이용해서 큰일을 처리해야 해.'

그런 계산을 하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니 내가 왕만세와 이야기를 하는데 왜 이리 시끄러워?'

나는 황당함을 느끼며 경란이를 다시 불렀다.

"왜 이리 시끄럽니?"

"궁에서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궁안 사람들이 다 구경하러 갔습니다."

경란이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아니 지렁이 한 마리가 나왔다고 이러면 되니? 사람이 침착해야지."

내가 근엄하게 충고를 하는데 경란이가 말했다.

"폐하께서도 직접 나와 지렁이를 보시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사천감의 일관도 부르고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끄응."

경란이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왕건부터 호들갑을 떠니 이리 크게 난리가 나지.'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왕만세도 흥분해서 외쳤다.

"아니 그런 범상치 않은 영물이 등장하다니. 무슨 징조가 아닐까요? 일관까지 나온다니."

왕건의 친척이라 그런지 왕만세의 사고방식도 왕건과 비슷한 것 같았다.

"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경란아. 우리를 좀 안내해라."

왕만세가 지렁이를 직접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는 그리 말했다. 왕만세도 이제 수군 총수가 되었으니 그 비위를 좀 맞춰줘야 했다.

"제가 정윤비 마마를 호위하겠습니다."

그러자 왕만세는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나와 왕만세는 경란이의 안내를 받아 지렁이가 등장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 주변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래도 정윤비인 내가 등장하자 사람들이 길을 열어줬다. 내가 앞으로 나가니 과연 왕건의 모습이 보였다.

그 곁에는 사천감의 일관이 굽신거리면서 왕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니 저 토룡을 보니 거의 70척은 되는 것 같다. 이런 일이 생기다니 무슨 징조인지 점을 좀 쳐봐라."

나는 그 말을 듣고 기가 찼다.

'70척이라니? 장난하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물론 지금 꿈틀거리는 지렁이가 크긴 컸다. 이 시대는 지금보다 기온이 따뜻해서 저런 지렁이도 가끔 나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시대 1척은 약 20cm니까 70척이면 14m라는 소리야. 그건 절대 아닌데?'

내가 보기엔 한 1m 쯤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왕인 왕건이 70척이라고 단정을 지으니 다른 사람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왕건의 명을 받은 일관은 신중한 태도로 점을 치더니 외쳤다.

"70척이나 되는 토룡이 등장한 것은 곧 귀한 손님이 온다는 소리입니다. 토룡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 영물입니다. 조만간 북방 발해에서 손님이 와서 나라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오오."

그 소리를 듣고 왕건은 자신의 입을 가리며 놀란 척했다. 그러나 그런 왕건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것도 왕건이 꾸민 공작임을 눈치챘다.

'왕건이 지금 발해 유민들과 일을 꾸미고 있구나. 그래. 대광현이 올 때가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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