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0화
80. 석종
‘아무래도 멀미가 나는 것 같다. 속이 이상해.’
나는 뱃전을 잡고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시대에 빙의하고 나서 나는 딱 1번 배를 탔다.
공산 전투 이후 충주에서 개경으로 올 때 남한강 수로를 이용했다.
‘그때 괜찮아서 배를 타도 멀쩡할 줄 알았는데 바닷길은 다른 건가?’
그래도 속이 약간 불편한 정도라서 다행이었다. 엄청난 거리를 항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명주는 오늘날의 강릉이고 언양군은 울산이었다.
해안가를 따라서 쭉 남쪽으로 가면 됐다.
“국선 괜찮소?”
왕무는 내 상태를 눈치채고 곁에 와서 물었다.
“참을 만합니다. 그건 그렇고 군사들은 제대로 연습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가 준비하고 있는 계책에 대해 물었다.
‘내 계책대로만 되면 만에 하나 손긍훈을 구해내지 못하더라도 왕무의 위신은 어느 정도 세우고 돌아갈 수 있다.’
그러자 왕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선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소. 우리를 따라온 스님들이 고생이 많습니다. 그건 그렇고 국선의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약간 불편한 정도입니다. 정윤 전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또 군사들 중에도 혹시 멀미를 하는 자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어려서 수군의 일도 겪어봐서 괜찮소. 개경에서 데리고 온 군사들도 그렇고.”
왕무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왕건 본인이 수군을 더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이었다.
왕씨 일족 중에서도 수군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왕무도 진작 수군에 대해 교육을 받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개경에서 데리고 온 군사들도 거의 왕건의 직계 군사들이라서 이정도 항해에는 거뜬했다.
‘다행이야.’
그렇게 왕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한 중년 남자가 우리 곁에 다가왔다. 김순식의 동생 김순우였다.
김순식은 길잡이 겸 명주 군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자기 동생을 딸려 보냈다.
의외로 김순식은 이번 손긍훈 구출 작전에 대해서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자기 동생도 보내고 여러 물자를 아낌없이 지원해 줬다.
-내가 그래도 진골의 후예인데 손씨 같은 충효의 가문이 이런 고초를 겪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명주성에서 잠깐 회동했을 때 김순식은 그런 말까지 했다. 그 덕에 일이 수월하게 진행됐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김순우가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언양군 앞바다에 당도할 것입니다. 미리 어선으로 위장한 척후선들을 보내 살펴보니 언양군 일대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대로 상륙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허허허. 참 격세지감입니다.”
보고를 하며 김순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격세지감이라. 무엇 때문입니까?”
왕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서라벌의 코앞인 언양군이 무방비 상태인 것을 보니 세상이 변한 것이 느껴집니다. 난세가 시작된 이후에도 신라 조정이 언양군 일대만은 철통같이 방비했는데 그 수군이 이제는 흩어졌습니다.”
김순우는 허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견훤의 서라벌 침공으로 신라는 거의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견훤도 이 일대를 확실하게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언양군 일대가 무방비 상태가 됐는데 신라 진골의 후예인 김순우는 이 모습을 보고 심경이 복잡한 것 같았다.
‘우리한테는 매우 잘된 일인데.’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했지만 김순우를 배려해서 입 밖으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내일 당도한다면 손긍훈에게 응천군 경계까지 나오라고 밀사를 보내야겠습니다. 내가 직접 기병들을 거느리고 응천군 경계까지 가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왕무가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제는 진짜 전투를 벌여야 할 판이라 긴장한 기색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김순우 역시 군례를 올리며 밀사를 보내기 위해 물러났다.
“국선은 어찌할 것이오? 안전하게 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겠소?”
왕무가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계책을 베풀려면 직접 나와서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살펴야 합니다. 제 계책이 통한다면 백제 무리들을 한번은 놀라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속이 불편해서 배에 더 있고 싶지 않아. 잠깐이라도 상륙을 해야겠어. 이 상태가 지속되면 진짜 명주로 돌아갈 때는 토를 할 거 같아.’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왕무 역시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와 위험을 함께 하겠다니 그래 내가 반드시 국선을 지키겠소.”
그렇게 나도 상륙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 * *
다음날 김순우의 말대로 나와 왕무 일행은 언양군 앞바다에 당도했다. 그리고 그대로 고려 기병들은 상륙했다.
‘만세! 진짜 땅에 오르니 속이 편해지네.’
나는 배에서 내리니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서 배를 탔지만 앞으로는 웬만하면 타지 말아야겠다는 결심도 했다.
“지세를 보니 약간의 수비군만 있었어도 상륙하지 못하고 돌아갈 뻔했는데 아무 방비가 없어 무사히 상륙했소.”
왕무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상륙을 성공한 것에 대해 기뻐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예, 정윤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굳이 아니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해서 나는 활짝 웃으면서 그리 대답했다.
왕무는 지금 완전무장을 한 채였다. 갑옷을 두르고 장창을 쥔 채 말 위에 올랐다. 이번에는 백제군과 교전이 있을 확률이 높으니 그런 것이다.
다른 고려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엄중했다. 기병들은 나를 호위하는 형세로 포진을 했다.
‘내 계책이 통하면 좋을 텐데.’
나도 떨렸다. 그 와중에 왕무가 명을 내렸다.
“출발한다.”
고려 기병들은 그대로 손긍훈과 약속한 응천군 경계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놀랍게도 나와 왕무 일행은 별 방해를 받지 않고 응천군 경계에서 손긍훈과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 늙은이를 돕기 위해 고려의 정윤 전하께서 직접 출전하시다니…….”
손긍훈이 우리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일어나시오.”
왕무는 놀라서 그런 손긍훈을 일으키려 했다. 그사이 나는 찬찬히 손긍훈과 함께 온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일가를 모두 이끌고 왔군. 대략 120명 정도 된다. 노약자까지 섞여 있어 속도가 느릴 텐데 여기까지 무사히 오다니 다행이다.’
거기에 손긍훈을 비롯한 손씨 일족의 남자들 30명은 완전 무장한 채 말을 타고 왔다. 이들은 기병으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여기까지 데려온 기병이 100기니 지금 전력은 130기가 됐다. 그리고 어쩌면 아무 교전 없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도.’
나는 그런 기대를 했다.
“가보인 석종은 가져오셨습니까?”
나는 손긍훈에게 물었다.
“그것은 이쪽에 있습니다.”
손긍훈은 말 위에 실려 있는 나무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매우 엄중하게 봉해진 나무상자였다. 나는 그것을 눈여겨봤다.
“백제 군사들은 무슨 수로 따돌리셨습니까?”
“응천에 와 있는 백제군사 수는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을 기습해 사로잡아 묶어두고 왔습니다. 그들을 죽이거나 하면 남겨진 응천 백성들에게 보복을 할까 두려워 포박만 해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은 괜찮았습니다만 곧 백제군이 눈치를 채고 움직일 것입니다.”
손긍훈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시간이 얼마 없을 듯합니다. 자 출발합시다.”
왕무가 말위에 오르면서 말했다. 일행들은 모두 말이며 수레에 올라 행군을 시작했다.
“이 일대 백제군의 전력은 얼마나 됩니까?”
말을 몰며 왕무는 손긍훈에게 그점을 물었다.
“백제 강주도독 양검이 이찬 능환과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이 일대를 감독하고 있습니다. 백제군의 주력은 고려의 진보성주 홍술을 포위하기 위해 가 있습니다. 이 일대는 이미 평정됐다 여기고 많은 군사들을 배치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백제군을 따르는 일대 호족들의 군사들이 있습니다만 저와 다 아는 사이입니다.”
“500기라.”
말 위에서 왕무는 그리 중얼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양검과 능환이라. 이거 부석사에서 봤던 사람들이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살펴보고 좀 초조함을 느꼈다.
‘역시나 수레를 이용한다고 해도 노약자들이 합류하니 속도가 안 나. 해안까지 가는데 한참 걸리겠어.’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왕무가 풀어놨던 사방의 척후들이 급보를 전해왔다.
“이 일대의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우리 앞길에도 군사들이 있습니다.”
“좋다. 전투준비를 하라.”
왕무가 외쳤다. 고려 기병들은 나와 손긍훈의 일가를 가운데 두고 사방을 엄호하는 대형을 갖추고 진격했다.
곧이어 눈앞에 200명 정도 되는 군사들이 보였다. 들고 있는 깃발을 보니 계변성주 박윤웅이 거느리는 군사들이었다.
‘보병들이 섞인 군사라 우리 전력으로 이길 수 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왕무 역시 기병들을 돌격시키려고 하는데 갑자기 손긍훈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박 형. 우리는 지난날 적고적들을 토벌할 때 함께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때 박 형이 제 목숨을 구해줬습니다. 오늘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성이며 세력을 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나는 손 형이 부러울 따름이오. 가시오. 보중하시오.”
말 위에서 박윤웅은 손긍훈에게 그리 말하더니 길을 열어줬다.
다른 지역의 호족들은 몰라도 이 일대의 호족들은 거의 원래 신라조정의 태수나 촌주 출신이었다.
출신도 진골 아니면 6두품인 사람들이 많았다. 신라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자립했다고는 해도 호족들끼리 서로 협력하는 일이 많았다.
박윤웅도 신라 진골 출신이고 이웃에 있는 손긍훈과 왕래가 잦아 이런 일이 생기자 눈을 감아주는 것이다. 거기에 주위에 백제 사람도 없었다.
‘이대로 쭉 가면 좋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으나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후방에서 백제 군사들이 우리 뒤를 쫓고 있습니다. 백제 강주도독 양검이 거느리는 군사들입니다. 인근 호족들도 함께 달려와 그 수가 1천명은 됩니다.”
뒤에서 달려온 척후가 외쳤다.
“서두르자.”
왕무가 그런 명을 내렸으나 노약자가 있어서 속도를 더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백제군의 선두가 어느새 우리 뒤에 보일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백제군의 선두에는 양검, 능환 같은 사람들이 직접 서 있었다.
“잡아라! 고려의 부부사기단을 이번에는 체포해야 한다. 부석사에서도 그렇고 또 사기를 쳐!”
양검이 지시를 내렸는지 수많은 백제 군사들이 그런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어떻게 나와 왕무가 온 줄 알아낸 모양이었다.
‘부부사기단이라니 이놈들이!’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그냥 반격을 하고 싶었다.
‘아니야. 이건 백제의 격장지계야.’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 분노를 가라앉혔다.
“궁예, 왕건의 사이비 집단을 토벌하자!”
백제군은 그런 고함을 치기도 했다.
‘이놈들이 어느 정도는 핵심도 찌르는군.’
나는 속이 뜨끔한 것을 느끼며 계속 말을 몰았다. 이 와중에도 백제군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왕무가 군사를 꽤 잘 다루긴 했다. 원래 상륙한 고려 기병은 300기였는데 우리가 응천군 경계까지 끌고 간 기병은 100기였다.
남은 200기는 당연히 백제군의 추격에 대비해서 매복시켜 놨다. 그리고 백제군에게 잡히기 전 우리는 군사들이 매복한 지점에 도착했다. 반격하기 좋은 높은 언덕이었다.
다만 이 사실을 모르는 손긍훈은 백제군이 우리를 따라잡으려 하자 절망한 표정이었다.
“오오. 이런 난세에 충효를 지키려 하는 것은 과욕이란 말입니까? 제가 충효를 저버리고 견훤이 말하는 대로 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선조께서 아이를 묻으려 할 때는 하늘이 도와주셨건만.”
손긍훈이 비통하게 하늘을 보며 외쳤다.
‘지금이다. 지금이 타이밍이야.’
나는 손긍훈을 보며 외쳤다.
“손 성주. 석종을 좀 빌려주십시오.”
“왜요?”
손긍훈은 바로 외쳤다. 다만 급해서 손긍훈에게 설명을 해줄 시간이 없었다.
“멈춰라!”
왕무는 군사들을 멈추게 하고 그대로 석종이 든 나무상자를 괴력으로 열어버렸다. 그리고 석종을 나에게 건넸다.
“모두 잘 봐라.”
나는 아예 멈춘 수레 위에 올라타 뒤에서 추격해 오는 백제군을 보고 외쳤다. 우리 일행은 언덕 위에 있어서 아래에서 몰려오는 백제군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수레 위에서 나는 그대로 내 손바닥으로 손씨의 석종을 힘껏 쳤다. 그리고 그와 함께 기이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우.”
아마 이 시대 사람들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을 것이다.
‘팔관회 때 써먹었던 다성 음악을 또 사용하게 됐네.’
나는 개경을 떠나기 전 승려와 목수들을 동원할 것을 왕건에게 청했는데 모두 이 계책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팔관회 때 다성음악에 대해 함께 연구했던 법왕사의 승려들이 와서 행군도중 이에 관해 가르쳤다.
그리고 지금 200명의 매복한 군사들이 그에 따라 소리를 내고 있었다.
‘거기에 목수들을 동원해 초보적인 확성기를 만들었지. 200명이 한꺼번에 확성기를 사용하니 위력이 대단하군.’
그냥 나무를 깔때기 모양으로 깎아서 사용해도 마치 수천 명이 다성음악으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위력을 냈다.
그야말로 사방이 기이한 소리로 가득 찼다.
“이게 뭐냐? 무슨 소리냐?”
“사람 목소리 같기도 하지만 생전 처음 듣는데.”
우리를 쫓던 백제군이 동요해서 중얼거리는데 대뜸 한 사람이 외쳤다.
“손씨의 석종이 내는 소리다. 하늘이 노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인근 호족 중 한 사람인 김인훈이었다. 이 사람 역시 박윤웅처럼 손긍훈을 마지못해 쫓고 있었는데 좋은 핑곗거리가 생기자 이리 외친 것이다.
김인훈이 거느린 군사들도 짐짓 놀란 듯 엎드려서 벌벌 떠는 시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