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1화
81. 분기점
‘역시 내 생각대로다! 이 인근 호족들은 우리와 손긍훈을 쫓을 마음이 없어. 호족들이 이런 마음이니 내 계책이 통할 수밖에 없지.’
나는 언덕 아래서 동요하는 백제군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김인훈 등의 호족들과 그 군사들이 흔들리자 양검이 이끌고 온 백제출신 군사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요하지 마라!”
양검과 능환이 군사들을 독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손순의 이야기는 이 시대에 보통 백성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고사였다.
그런 손순의 후손을 쫓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를 듣자 백제군사들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효자의 후손을 핍박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인근 호족들이 이끌고 온 군사들 중 몇몇 아예 무릎까지 꿇고 하늘을 향해 외치기까지 했다.
“이건 사기다. 우리는 부부사기단을 쫓고 있다. 현혹되지 마라! 부석사에서도 그렇고 저 사기꾼들이 나타나는 곳마다 이런 일이 생기는데 말이 되느냐?”
언덕 아래서 양검과 그 부하들 몇몇이 절규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지금이다. 공격하라!”
왕무는 외쳤다. 매복해 있던 200명의 고려 군사들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200명이 확성기를 이용해 전력을 다해 소리를 지르자 그 효과가 엄청 났다. 마치 수천 명의 군사들이 외치는 것 같았다.
양검이나 능환도 이 함성소리를 듣고는 움찔했다.
“쳐라!”
왕무는 고려 기병들을 이끌고 언덕 아래를 향해 돌격했다.
“적의 수가 우리 예상보다 많다. 퇴각한다.”
능환이 그렇게 외치며 후퇴신호를 보냈다. 백제군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동요하던 인근 호족들의 군사들도 이 후퇴 명령은 잘 따랐다.
전투 경험이 꽤 있는 왕무는 그런 백제군을 쫓는 시늉만 하다가 돌아왔다.
“오오, 선조님!”
그사이 손긍훈은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가보인 석종을 바라보며 무릎까지 꿇고 있었다.
다른 손씨 일족들도 모두 감동한 표정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노인도 있었다.
손씨 일족에게는 내가 세운 계략에 대해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진짜 이 석종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 성주, 서둘러야 합니다. 다시 백제군이 대오를 정비해서 추격하면 막을 길이 없습니다.”
왕무는 그런 손긍훈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손긍훈은 석종을 꼭 껴안고 몸을 일으켰다. 고려 기병들은 손씨 일족들을 사방에서 엄호하는 진형을 갖추고 그대로 해안을 향해 달렸다.
나 역시 말을 몰며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는데 백제군의 추격은 없었다.
‘한번 대오가 무너졌으니 양검이 군사를 정비하는 데 몇 시간은 걸릴 것이다. 역시 한번 백제군을 놀라게 할 계책을 마련해 온 내가 옳았어. 내 덕에 편하게 온 거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흐뭇해하는데 멀리 바다가 보였다. 바다 위엔 명주에서 온 배들이 떠 있었다.
“서둘러, 서둘러 오십시오.”
배를 지키던 김순우는 애가 타는지 직접 몇몇 사람들과 상륙해 있었다. 그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우리를 향해 외쳤다.
해안에 당도한 일행은 미리 준비한 배에 차례로 올라탔다. 배에 오르자마자 명주의 배들이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가 성공했습니다.”
나는 뱃전에 서서 왕무를 보며 말했다. 이번 일은 실패할 확률도 컸는데 마침 일이 잘 풀린 것이다.
‘이번 일로 정윤 왕무와 상산의 입지는 더 공고해졌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전히 완전무장한 상태의 왕무가 내 곁에서 말했다.
“이번에도 국선의 계책이 통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흐뭇해져서 왕무도 칭찬해 줬다.
“모두 정윤 전하께서 적절하게 군사를 배치한 덕분입니다. 어쨌거나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쉬십시오.”
이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왕무가 딱 알맞은 지점에 군사를 매복시켜놔서 내 계책의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다.
군사들을 직접 지휘하고 배치하는 일은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왕무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푹 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왕무는 갑자기 그런 내 앞에서 얼굴을 붉혔다.
‘왜 저래?’
나도 그런 왕무의 반응에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순간 놀랐다. 그때 멀리서 김순우가 황급히 다가와서 외쳤다.
“손씨의 노약자 중에 멀미가 심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서둘러 의원을 보내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왕무는 재빨리 김순우 쪽으로 다가가더니 열심히 그일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 * *
일행은 어쨌든 무사히 명주에 상륙했다. 명주에 도착하고 나서도 나는 바로 개경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손씨 일족들과 함께 개경에 돌아가야 하는데 손씨의 노약자들 중 아픈 사람이 많이 나왔다.
‘하긴 평온하게 응천군에서 살다가 갑자기 그 긴박한 추격전을 하고 항해까지.’
한동안 이 사람들이 휴식을 취해야 했다. 또 손긍훈도 막상 고려에 망명을 하고 나니 막막한 모양이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응천군의 영지며 기반을 다 내던지고 가족들과 함께 낯선 고려에 온 셈이었다.
“소신은 그저 대왕 폐하와 또 정윤 전하만 믿을 뿐입니다. 또한 소신의 일가를 구하기 위해 그런 계책을 마련해 주신 정윤비 마마도 믿습니다.”
손긍훈은 매일 우리를 찾아와서 말했다. 명주에 도착하고 나서는 손긍훈에게도 우리의 계책에 대해 얘기해 줬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왕무는 듬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곁에 있는 나는 좀 심란하긴 했다.
‘왕건이 손씨 일족을 책임져주겠지? 100명이 넘는 사람의 생계 해결은 만만치 않은 일이라. 설마 이것도 나에게 떠넘기는 것은?’
-히히히, 연우야. 네가 구해온 사람들이니 우리 연우가 끝까지 책임져야지. 그래 은제련소에서 은을 좀 쓰면 되겠구나? 그래도 저택 부지 정도는 내가 양심적으로 마련하마.
왕건이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하는 상상이 덜컥 들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왕무는 열심히 손긍훈과 대화를 나누며 손긍훈의 불안을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왕무랑 같이 와서 다행이야.’
어쨌든 손씨 일가를 보살피며 명주에 머무르는 사이 어느덧 4월이었다.
우리가 개경에서 명주까지 와서 배를 준비하고 손긍훈을 빼내 오고 하는 와중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어영부영하다가 개경에 가면 또 5월. 이 긴박한 순간에 시간을 너무 오래 쓰고 있어.’
나는 그 생각에 초조했다.
‘올해가 벌써 929년. 올해, 내년이 진짜 중요한 시기다. 삼한의 정세가 크게 변해. 이때를 잘 노려서 공을 세워놔야 역사를 바꾸고 왕무를 구해낼 수 있어.’
내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러는 사이 개경에서 전갈이 왔다. 손긍훈과 손씨 일가를 맞이할 준비가 끝났으니 서둘러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나와 왕무는 즉시 군사들과 함께 손씨 일가를 호위하며 개경으로 향했다.
* * *
나는 한림원에 들어서며 상념에 잠겼다. 개경에 돌아오고 나서 나는 바로 한림원 출근을 재개했다. 쉴 시간이 없었다.
한림원에 있으면 왕건과도 만날 수 있고 고려 정세에 영향을 끼치기에도 용이했다. 그래서 나는 휴식도 없이 바로 한림원에 나왔다.
‘내가 왕건에게 여러 번 당해서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했나?’
나는 어제 왕건이 열었던 손긍훈 환영식을 떠올렸다. 왕건은 망명한 손긍훈에게 자기 사재로 저택과 식량을 내렸다.
그리고 중신들과 직접 구정까지 나와서 손긍훈을 위로하며 연회를 베풀었다.
‘손긍훈은 매우 감동한 모습이었어. 이런 일에는 왕건이 시원하게 돈을 쓰긴 하는구나.’
나와 왕무도 구출작전의 성공에 대해 칭찬을 받았다. 나름대로 목적했던 성과를 이룬 것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림원에 와서 앉았다.
왕건은 한림원 가운데서 이맛살을 찌푸린 채 무슨 문서를 읽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손긍훈 구출 작전에 성공했다고 해도 전체적인 전황은 고려에 불리한 상황이다. 다른 전선의 보고서인가 보군.’
내가 그런 예상을 하는데 왕건이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아니 연우야. 이번에 일을 잘해놓고 왜 보고서는 이렇게 썼느냐?”
왕건은 들고 있는 보고서를 흔들며 말했다.
‘내 보고서였어? 다 사실대로 썼는데 왜?’
나는 손긍훈 구출 작전을 마치고 그 경과를 적은 보고서를 왕건에게 바쳤다. 그런데 왕건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예?”
“아니 왜 이렇게 자세하게 사실대로 다 썼어? 그냥 손긍훈을 구출해서 빠져나가는데 간교한 백제군이 추격해 왔다. 그런데 하늘이 노해서 손씨의 석종이 굉음을 내서 백제군이 무너졌다. 역시 하늘은 고려를 돕는다라고 쓰면 되지. 종이 아깝게 뭣 하러 군사들이 매복해서 소리를 냈느니 하는 군더더기를 넣느냐? 이거 참 올라온 보고서를 없앨 수도 없고. 어디 두꺼운 책에 끼워 숨겨놔야겠다. 하하하.”
왕건은 그러더니 웃으면서 내 보고서를 진짜 두꺼운 책에 끼워 넣는 시늉을 했다.
“하하하.”
나도 그런 왕건을 보며 웃었다.
‘웃는 것을 보니 왕건도 농담이겠지.’
“어쨌든 간만에 듣는 승리 소식이구나. 이대로 기세를 몰아 견훤을 격파하면 좋을 텐데.”
왕건은 밝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와 왕무가 거둔 성과로 사기가 오른 모양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손긍훈을 구출해낸 것은 좋지만 그 영지인 응천군은 백제군이 다 점령했을 거고. 역사 기록을 보면 올해도 왕건이 고생을 많이 한다. 무엇보다 올 7월 고려의 진보성주 홍술이 전사한다.’
올해와 내년의 정세는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역사학도인 나는 이 시기를 기록한 사료를 여러 차례 읽었다.
그래서 월 단위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공산전투 직후 왕건을 구하러 갈 때 내가 언급했다. 홍술은 왕건이 사벌주에서 가장 믿는 호족이었다.
그런데 그 홍술이 견훤의 공격으로 전사하는 대사건이 곧 터지는 것이다.
‘지금이 5월이니 이제 2달 남았다. 지금이라도 잘 준비하면 또 나와 왕무가 홍술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홍술을 구하고 은혜를 입히면 홍술을 왕무의 세력에 끌어들일 확률도 높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야. 나도 견훤이 7월에 홍술을 공격할 것은 알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몰라. 왜냐하면 역사서에 너무 간략하게 적혀 있어서.’
구체적으로 견훤이 어떤 방식으로 홍술을 공격했는지 알아야 반격을 할 텐데 그게 역사서에 안 적혀 있었다.
‘이게 미래 역사학도인 내 한계야. 그래도 언제 공격당하는지 알고 있으니 대비를 해두면 좋긴 할 텐데.’
거기에 나를 망설이게 하는 문제가 또 있었다.
‘왕건이 나를 어느 정도 믿고 소소한 사건들엔 나를 잘 써먹지만 대규모 군사를 움직이는 군무에 내가 관여하는 것을 용납할까?’
이번에 손긍훈 구출작전도 동원된 군사 수는 300명이었다. 그래서 왕건이 선뜻 내 뜻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나 홍술을 구하려면 수천 명의 대군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 군무에도 왕건이 내 말을 들어줄까? 에잇 모르겠다. 어쨌든 시도는 해봐야지.’
나는 그 생각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만간 견훤이 한번 군사를 일으켜 사벌주 쪽을 공격할 확률도 있지 않을까요?”
“허허허. 지금 한창 농번기인데 견훤이 군사를 움직일까?”
왕건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학사들과 다른 일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운만 띄워두고 차차 수를 내보자.’
그런 왕건의 반응을 보며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