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79화
79. 동창
나와 왕무는 왕건의 지시도 있고 해서 전력으로 명주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 명주까지 가는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역참도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왕건 이전에 집권했던 궁예 시절에는 철원이 수도였어. 그래서 철원 인근의 도로는 잘 닦여 있군.’
철원과 명주는 가까운 거리라 명주까지 가는 길도 괜찮았다. 그래서 강행군을 해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명주를 향해 가면서 왕무에게 상당히 감탄했다.
‘나는 명주에 가까이 갈수록 초조해지는데 왕무는 태연한 기색이구나. 아니 오히려 약간은 신이 난 기색이야.’
나는 지난 몇 년간 왕무와 함께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했다. 그 덕에 어느 정도 왕무의 기분을 읽을 수 있게 됐다. 평소에 왕무는 과묵해서 진짜 필요한 말만 했다.
‘그런데 지금 보면 필요 없는 말도 가끔씩 하고 기분이 좋아 보여. 과연 고려의 정윤이긴 정윤이야. 손긍훈 구출작전이 쉬운 일은 아닌데 이리 태연하다니.’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왕무가 내 곁에서 말을 걸었다.
“국선. 말을 타는 것은 괜찮으시오? 부석사에서 탈출할 때처럼 졸거나 하면.”
왕무는 평소와 다르게 쓸데없는 것까지 걱정하고 있었다.
“끄떡없습니다. 그때는 커다란 바위를 미느라 힘을 써서 그런거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나도 부석사에서 위기를 겪은 이후에는 체력관리를 틈틈이 했다.
“그렇군.”
왕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무의 기분이 약간은 시무룩해진 거 같은데? 왜 저럴까? 하긴 그동안은 태연한 척했지만 역시나 명주에 가까이 다가오니 동요하긴 하는가 보군.’
나도 명주가 다가오니 좀 떨렸다.
‘내가 개경에선 김순식의 아들 김장명과 친한 것처럼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 인연이 얄팍했어. 김순식이 오기 전에 김장명한테 장학금을 한번 준 거뿐인데. 말도 많이 안 나눠보고. 에잇, 오지수를 데려왔어야 했는데.’
김장명과 오지수는 진지한 관계가 될 뻔한 사이였다. 데려왔으면 김순식과 교섭을 할 때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지수가 명주에 오는 것은 왕건이 몹시 꺼리는 일이라 도리가 없었다.
“목수들은 내가 지시한 것을 잘 만들고 있나요?”
나는 왕무에게 물었다.
“국선이 만들라고 한 그대로 만들고 있소. 만들기 어려운 것도 아니라서 행군을 하면서도 목수들이 틈틈이 잘 만들고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일행은 어느덧 대관령에 이르렀다. 대관령 인근을 수비하는 평창성주 백훤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고개를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명주 쪽도 평소와 똑같고 수상한 점이 없습니다.”
백훤은 우리 앞에서 군례를 올리며 보고를 올렸다. 아직도 고려 조정은 김순식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훤을 시켜서 대관령을 봉쇄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이 대관령만 막아두면 명주 세력은 태백산맥을 넘을 수가 없었다.
“대관령을 바로 넘을 수 있겠소?”
왕무는 백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다행히 올해는 날씨가 일찍 따뜻해져서 대관령의 눈이 녹았습니다. 바로 넘어가시면 됩니다. 제가 길 안내를 하겠습니다.”
백훤이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눈이 오면 길이 막히는구나.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맞았군.’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행과 함께 대관령을 넘었다. 하지만 대관령을 넘는 게 만만치 않긴 했다.
‘이 고갯길을 말을 타고 넘어가는 것도 쉬운 건 아니야. 이래서 명주의 김순식이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도 명주에 갇혀서 지냈어. 단순히 책에서 역사적 사실을 배우는 것을 넘어서 몸으로 체감하게 되는군. 일종의 필드워크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힘겨운 행군을 버텨냈다. 그리고 대관령을 넘어서자 명주 쪽에서도 사람이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그 선두에는 김장명이 있었다.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를 뵙습니다.”
김장명은 말에서 내려서 군례를 올렸다. 키가 작은 것은 여전했는데 왕건의 명을 받고 명주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선을 지키면서 의젓해진 것 같았다.
‘역시 오지수를 데려왔어야 했어.’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왕무는 정중하게 그런 김장명의 인사를 받으며 백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김장명과 합류한 일행은 그대로 명주성을 향해 달려갔다.
“배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는 김장명에게 그 점을 물었다.
“충효로 이름난 손씨 가문이 그런 고초를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님께서도 힘써 큰 배를 모았습니다. 언양군까지 가는 것도 쉬운 일입니다. 명주에는 저 먼 우산국까지 갈 수 있는 뱃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언양군까지의 항해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다만 짧은 시간 안에 배를 모으려니 많은 숫자를 모을 수는 없었습니다.”
김장명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김순식이 아무리 강대한 호족이라고 해도 평소에 수군을 키우지는 않았다.
그래서 왕건의 전갈을 받고 나서 명주 인근의 상선이며 조운선을 긁어모은 모양이었는데 수가 넉넉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병들을 몇 명이나 태울 수 있습니까?”
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견훤의 세력권 한가운데서 손긍훈을 빼오려면 속도가 빠른 기병들을 상륙시켜야 했다. 보병은 상륙시켜 봤자 소용이 없었다.
“손긍훈의 일가가 그래도 숫자가 100명은 될 테니 그 사람들이 탈 배는 비워둬야 하고. 기병들이 말을 1필씩만 데리고 타면 그래도 300기는 태울 수 있을 것입니다.”
김장명이 대답했다.
“300기라 아쉽지만 그나마 다행입니다.”
300기면 적은 숫자는 아니라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계산으로는 구출작전을 성공시킬 만한 숫자였다.
“정윤비 마마의 은혜를 입고도 제대로 준비를 못 해서 송구스럽습니다.”
김장명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내가 장학금을 준 것을 두고 은혜라고 하는 것 같았다.
“뭐 그걸 가지고.”
나는 그런 김장명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진짜 그때 저는 개경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명주는 해산물이 많이 나서 어렸을 때 매일 먹었습니다. 그런데 개경의 학관에 다닐 때는 돈이 없어서 생선 한 마리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내리신 돈으로 그날 당장 생선을 구워 먹었는데 그때 그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개경에서 외로운 처지의 저에게 잘해준 사람은 정윤비 마마를 비롯해 몇몇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김장명은 그러자 자신의 개경 유학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음, 내가 베풀어 준 은혜를 김장명은 크다고 느끼고 있군. 내 판단이 옳았던 거야.’
나는 흐뭇해져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불쑥 왕무가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국선이 곤궁한 그대에게 돈을 줬었다고? 학관에서 인연이 깊었나 보군.”
“그때 제 처지가 궁핍해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김장명이 왕무에게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음, 장학금이라. 빈궁한 처지의 학생이라면 누구에게나 줬겠군.”
왕무가 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정윤비 마마라면 아마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저 역시 장학금을 내어 가난한 학생들을 후원하고자 합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전란이 끝나면 학관에 평민 자제들도 들어올 수 있으니 장학금을 크게 만들어 보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김장명은 웃으면서 말했다.
“분명 내가 그랬습니다.”
곁에서 나도 웃으면서 김장명을 거들었다.
“장학금 같은 일은 예부령이 나서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무가 고지식하게 말했다. 김장명은 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림원령은 여전히 수업 시작 전에 목탁을 들고 오십시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건 똑같군요. 하하하.”
김장명도 내 말을 듣고 옛 추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음, 김장명의 태도를 보니 아직도 명주 세력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지금은 왕건의 방해 때문에 안 되지만 나중에 기회를 봐서 계책을 잘 짠다면. 오지수와 김장명이 혼인만 하면 딱 좋은데.’
다만 왕무는 대관령을 넘고 나서 여러모로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와 김장명의 대화에 끼지 않고 말만 몰고 가기 시작했다. 이미 전장에 와 있는 것처럼 굳은 표정이었다.
‘왜 저래? 명주에서 준비한 배의 숫자가 부족해서 그런가? 왕무는 직접 상륙해서 구출작전을 지휘해야 하는데 필요한 군사 수에 대해 나와 생각이 다를 수도. 그래도 마음을 풀고 김장명과 잘 지내야지. 나중에 유긍달 등과 싸우려면 김순식의 힘이 꼭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왕무를 달래주기 위해 말을 몰아 그 곁으로 갔다.
“정윤 전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거느리고 가는 군사들의 숫자가 적어도 손긍훈을 빼내 올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 견훤은 전력을 다해 사벌주를 평정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후방인 응천군 인근의 경계는 약할 것입니다.”
“나도 그에 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왕무는 여전히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하긴 내가 너무 뻔한 얘기만 했어. 후방의 경계가 느슨할 것이야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래서 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나서 왕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준비한 배 숫자가 적다고 명주 사람들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많은 군사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 응천군 일대의 호족들은 우리를 적극적으로 막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억지로 견훤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미래지식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역사기록을 보면 응천군 일대의 호족들은 얼마 안 가 견훤이 한번 패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왕건에게 다 귀부하는 사람들이야. 지금도 마음은 왕건에게 가 있는 게 확실하다.’
나는 이런 정보를 갖고 있기에 얼핏 보면 엄청 어려워 보이는 손긍훈 구출 작전에 자청해서 나선 것이다.
‘인근의 지리를 잘 아는 호족들이 마음으로 견훤을 따르며 철통같이 경비를 하면 고려군은 상륙조차 할 수 없어.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 사람들이 형식적인 경비만 할 거야.’
다만 이건 내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뽑아낸 특급정보였다. 다른 사람이 듣게 할 수 없어서 왕무에게만 알려주려고 귓속말을 했다.
“음, 호족들이 그리 나온다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들도 손씨 집안의 충효에 대해서는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내가 건네준 정보가 왕무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좀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나와 왕무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김장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명주성에 다 왔습니다.”
“일이 매우 다급하니 명주성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명주 도독만 만나고 바로 배를 타고 출진해야겠다.”
왕무는 전투 생각을 하며 긴장한 모양인지 좀 굳은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 정윤 전하께서는 나주원의 오지수 공주 마마와 친남매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
“오지수 공주 마마께서는 요 근래 어찌 지내시는지? 기실 학관에서 오지수 공주 마마와도 친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개경에서 오지수 공주 마마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김장명이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지금 말고는 오지수에 대해 물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낸 모양이다.
“지수는 바쁘게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있다. 아쉽군. 시간이 없어서.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는데.”
그러자 왕무는 반색을 하며 김장명에게 살갑게 말했다.
‘음 왕무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있군. 명주와 힘을 합쳐야 살길이 생긴다. 김순식은 그 속을 알 수가 없고 김장명이라도 확실히 포섭해야지. 그나마 내가 전해준 특급 정보를 듣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모양이군. 이제야 좀 제대로 하고 있어.’
그런 왕무의 모습을 보고 나는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